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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백만 부, 난쟁이 일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by 낮달2018 2019.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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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00만 부 돌파 앞두었지만

▲ 사진 222(침묵의 뿌리). 사북의 어린이. 출처 : <침묵의 뿌리>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 100만 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난쏘공”은 8월 15일 227쇄로 99만9800부까지를 찍었으며 다음 주 중에 100만 부 기념쇄로 228쇄를 찍는다는 것인데, 이는 작품의 초판 1쇄가 나온 지 29년 만이라 한다.

 

▲ 작가 조세희 . 인터넷 한겨레

“난쏘공”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78년 6월 5일이었다고 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 작품집을 내가 읽은 것은 인천 부평의 군부대에서였다. 출판된 날짜를 기준으로 역산해 보면 아마 그해 가을이었을 성싶다. 새가 그려진 노란 빛 표지와 국판보다 작으면서도 좀 길쭉한 판형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세로쓰기였던 그 책이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군대란 책 따위를 사물이라고 챙겨 놓을 수 있는 데는 아니었으니. 지금 가진 책도 역시 세로쓰기 본인데 구매한 때는 84년, 1983년도 초판 25쇄다. 가로쓰기 본도 아이들 읽으라고 사 두었다. 두 책은 지금 나란히 서가에 꽃혀 있다. 

 

근무 중 짬짬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 벌거벗은 현실 앞에, 더러 눈물을 흘렸고, 과거와 현재의 중첩,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기법의 새로움에 압도당했다. 그 무렵 나는 <난쏘공>의 서술을 자연스레 장편 <백년의 고독>에서 펼쳐진 작가 마르케스의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과 겹쳐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사른 게 1971년이다. 이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근대화와 물신주의의 포로가 된 1970년대 한국 사회에 인간과 노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했다. 그러나 삶의 일부로서의 공장 노동과 계급적 실체로서의 노동자의 삶이 소설로 나타나는 데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듯하다.

▲내 서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3, 문학과지성사)와 조세희 작품집 <침묵의 뿌리>(1985, 열화당)

황석영의 <객지(客地)>(1971)가 간척지 노동자들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이래, 노동자와 대기업, 노자대립 등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난쏘공”에서였던 것이다. “난쏘공”의 현실은 환상적 분위기의 모더니즘 수법에 힘입어 일종의 안개 속에 싸여 있긴 하지만, 그것이 외려 독자들이 감성적으로 그것을 쉬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던 듯하다.

 

이 연작소설의 중심인물은 물론 난쟁이 일가와 그들과 직간접으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도를 고치는 난쟁이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가정주부 신애, 위장 취업하여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활동가 지섭이 난쟁이 일가의 편이라면, 은강 그룹의 총수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이해를 위해 일하는 율사들은 그 ‘건너편’의 화해할 수 없는 자본가 계급이다.

 

자연스레 노동자로 편입된 난쟁이의 자식들은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은강방직 공장에서 일했지만, 그들의 노동은 생존밖에 보장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좌우 어금니를 뽑는 대신 문화비 지출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팔만 삼천사백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 이백삼십일 원이었다.”   
   -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중에서

 

이 소설에서의 노자대립은 결국 난쟁이 아들에 의해 은강 그룹의 총수가 살해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 가난한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단순하고 간명하다. 그들은 1970년대를 살면서 ‘160년 전의 유럽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비참한 삶’을 견주어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중에서

 

새로운 감수성이 연출해 내는 환상적 분위기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맨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엄마 몰래 고기 냄새를 맡으러 가는’ 아이들과 ‘졸다가 반장에게 옷핀으로 찔려 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는 여공’들을 짓누르고 있는 ‘억압과 착취’는 생생한 현실감으로 가슴을 옥죄어 온다.

 

더는 착취당할 게 없는 노동자들은 뼈와 가시만 남은 고기다. 자신들을 향해 던져진 자본가의 그물코에 걸린 노동자들은 그물의 주인들을 마구 찔러댄다. 그들의 마지막 가시로. 그것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저항과 분노인 것이다. 이 가시고기들의 저항은 난쟁이의 아들에게 은강 그룹 간부인 숙부를 잃은 청년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나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깨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 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밖으로 나와 그물을 걷어 올렸다. 큰 가시고기들이 수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나와 수천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가시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살갗은 찢어졌다. 그렇게 가리가리 찢기는 아픔 속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다 깼다.”
      -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중에서

 

<난쏘공> 말고 내게는 조세희 작가의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년)가 있다. <난쏘공> 이후 작가는 소설 쓰기 대신 카메라를 들고 노동자·농민 등의 집회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는 그가 찍은 사진을 통해 한 시대를 증언하고 싶었던 것일까.

▲ 사진 149(침묵의 뿌리) 사북의 어린이들.

<침묵의 뿌리>에는 그가 방문한 80년대 중반의 강원도 사북 어린이들의 글 몇 개가 실려 있다. 확인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글은 사북초등에 근무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임길택 선생의 문집인 듯하다. 작가의 렌즈는 사북의 어린이들과 노동자들, 그들이 사는 동네와 거리, 산과 탄광을 여과 없이 담았고, 거기 담담하게 글을 붙였다.

 

<침묵의 뿌리>에 실린 한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쓴 일기는 다음과 같다. 22년도 전에, 나는 그 마지막 문장에다 밑줄을 쳐 놓았다.

 

내 얼굴

 

삼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
  - 5학년 김상은

 

그가 찍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진은 아직도 정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침묵의 뿌리>에서 몇 장의 흑백사진을 골랐다. 아래 사진들이 그것이다. 책의 뒷부분엔 사진들에 관한 설명이 아주 길게 붙어 있다.

▲ 사진 161(침묵의 뿌리). 이원갑-사북사태 공소장 제일 앞에 나오는 이름. 출처 : <침묵의 뿌리>
▲ 사진 238(침묵의 뿌리) 1985년, 사북.출처 : <침묵의 뿌리>

“처음엔 검열 걸리지 않고 세상에 나가기만 바랐”던 이 책은 29년간 매년 3만 부 이상이 팔리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이른바 스테디셀러라는 이름에 걸맞은 판매량이다. 그러나 작가는 한겨레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처음 책을 낼 때는 몇 부가 팔릴 거라는 식의 예상보다는, 검열에 걸리지 않고 세상에 나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기만을 바랐어요. 이제 30년이 지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100쇄 기념판’ 출간 같은) 흉한 짓을 하는 이유도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사회가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난쏘공〉을 처음 내던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
     - <한겨레> 인터뷰(2007.9.3.) 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홈에버는 최근 울산점 8명 등 파업 중인 조합원 19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KTX의 여승무원은 해를 넘기는 긴 싸움을 계속하고 있고 이랜드 싸움도 장기전에 들어갔다.

 

세상에, 29년이 흘렀는데도 변한 게 없다고 한다. <난쏘공>이 그렸던 세계를 향한 백만 독자의 분노와 슬픔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겠다던 난쟁이는 하늘이 아니라 벽돌공장 굴뚝 속에 떨어져 죽었다. 그의 어린 아들딸들은 지금도 낙원구 행복동의 헐린 집 장독대 옆에서 이렇게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 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 중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2007. 9.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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