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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한계령을 위한 연가’, ‘고립’에 대한 뜨거운 욕망

by 낮달2018 2019.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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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 폭설은 외부세계와의 고립을 상징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냉정하고 두려운 현실만큼이나 그 '고립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지난해 7월에 시집 두 권을 샀다. 2007년 6월에 고정희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를 구매했으니 꼭 1년 만이다. 명색이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내가 이러하니 이 땅 시인들의 외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두 권 다 개인 시집이 아니라 문태준 시인이 고르고 해설을 붙여 엮은 시집이다. 근년에 ‘뜨고 있는’ 시인은 시를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던 걸까. 문 시인의 시는 ‘가재미’밖에 읽지 않았으면서 그가 엮은 시집을 선뜻 산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을 한 반년쯤 묵혀 두었다. 책 속표지에 휘갈겨 쓴 구입날짜(20080725)와 서명이 민망하다. 비좁은 서가 위에 위태하게 얹힌 예의 책을 꺼내 무심하게 넘겨보기 시작한 게 오늘이다. 읽어내려가다가 정진규의 산문시 ‘옛날 국수가게’에 시선이 머물렀고, 문정희의 ‘키 큰 남자를 보면’ 앞에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고교 시절 이래 수년간의 습작기를 거쳤지만 나는 아직 한 편의 시도 제대로 써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 거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긴 하지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어려운 작품 앞에서 나는 대번에 기가 질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시(日常詩)’로 일컬어지는 김광규의 시에 기울어지고, 쉽게 다가오는 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식으로 시를 공부해 보지 못한 탓인지 나는 문정희의 시를 읽은 기억이 없다. 지난해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교재에 실린 ‘겨울 일기’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문정희 시인은 194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회갑을 넘긴 이다. 그런데 ‘겨울 일기’에는 할머니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럽쇼, 이 할매 좀 봐…….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인의 비유와 언어의 운용은 내 편견을 깨끗이 뛰어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사랑의 아픔을 그는 ‘편안한 칩거’라는 반어로 노래했다. 나는 언젠가 문정희를 읽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이내 그걸 잊어버렸다.

 

두 시집에는 ‘키 큰 남자를 보면’과 ‘한계령을 위한 연가’ 등 문정희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각각에 딸린 문태준 시인의 해설도 마음에 감겨온다. ‘키 큰 남자…’에 대해 문태준은 ‘느닷없이 옛날 옆집 오빠와 누나가 다시 그리워졌다.’고 썼고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은하(銀河)’를 이야기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시에는 아스라한 추억의 편린들이 따뜻하고 빛나고 있다. 키 큰 남자의 팔에 매달려 그의 눈썹을 만지고, 거기 잎으로 매달려 하늘을 갉아먹고 싶다고 여인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인의 그것은 감상이되, 한갓진 감상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생생한 추억의 시간은 허튼 감상 따위야 쉬 넘어버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가끔 '운명에 묶이고' 싶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는 연시이되, 연시를 넘는 삶의 노래처럼 보인다. 한계령,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에 있다는 그 고개는 해마다 눈 소식과 함께 ‘교통두절’을 전해주는 곳이다. 폭설은 그 유장하고 긴 고갯길에 쌓이고 쌓여 외부세계와 고개를 고립시키지만, 시인은 그 폭설 속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시 전문 텍스트로 보기]

그러나 그것은 ‘못 잊을 사람’과 함께라고 하는 전제와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하는 열망으로 뜨겁다. 그래서 그것은 ‘눈부신 고립’이고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동화’로 인식되는 것이다. 폭설에 덮인 한계령은 아름답다. 거기 ‘기꺼이 묶여 /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하고 노래하는 여자를 상상해 보라.

 

시인의 해설처럼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냉정하고 두려운 현실만큼이나 그 ‘고립에 대한 욕망’도 뜨겁다. 현실에 의해 무화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덧없이 빛날 뿐이다.

 

해설자는 시인이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 왔”고,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 왔다.”고 소개한다. 시인의 시가 한갓진 ‘사랑’을 노래하는 ‘연가’가 아니라 단단한 ‘삶’의 노래로 읽히는 까닭이다.

 

청춘의 때를 넘긴 지 오래, 새삼스레 이 연시들이 마음에 감겨오는 것도 나이 듦의 징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일요일 오후 내내 누워 뒹굴며 시집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온라인 서점에 보관해 둔 몇 권의 책과 함께 문정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와,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그리고 기형도와 백무산의 오래된 시집을 각각 주문했다.

 

‘시를 읽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글귀가 여전히 수사로만 존재하는 각박한 세상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하고 힘들어서, 밥과 쌀을 짓는 일이 바빠서 저마다 시를 잊어버리고 살지만, 시는 때로 먹고사는 일의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 또 그것은 밥과 쌀이 되기도 할 터이다.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 <한계령>을 들으면서 시방 백두대간의 한 고개, 한계령을 지나가는 눈발과 1월의 바람을 생각해 본다.

 

 

2009. 1.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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