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Lettre a D.: Histoire D’un Amour)』(2006)
불혹을 넘기면서 문득 나는 ‘영원한 사랑’ 따위란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망각’이란 꽤 쓸 만한 물건이어서 인간을 사랑의 상실로 인한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죽도록’ 한 ‘목숨 바친’ 사랑도 그 이별을 받아들이면 잊어버리는 데는 고작 몇 해의 시간으로도 족한 것이다. 내 청년기의 끝에 세상을 떠났던 한 친구의 죽음과 그 이후를 바라보면서 나는 우정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음이란 참으로 얼마나 쌀쌀맞고 냉정한 것인가. 불타는 애정도, 얼음장처럼 식는 사랑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 따위는 없다?
어떤 재벌그룹에서 오래 일하다 40대 중후반에 밀려 나온 내 친구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아내를 선택하겠다.’라고 담담히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그의 아내는 홀로 된 그의 어머니와 모녀지간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다정했던 착한 아내였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란 없을 터이지만, 그는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금연’을 약속하고 결혼했고, 십여 년 가까이 아내 앞에서 약속을 지켰다. 그는 주로 건설 현장에서 일해야 했기에 그들은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내 친구는 대단한 골초였다. 그러나 주말의 귀가를 위해서 그는 갖은 노력으로 몸에 밴 담배 냄새를 없앴고, 1박 2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필사적으로 흡연의 유혹을 이겨냈다.
목욕탕을 다녀오면서 그는 담배 한 갑을 사서 단 한 개비를 피우고 나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에 들어갔다. 그 못지않게 나 역시 줄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어서 나는 진심으로 그의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야,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그러나 그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아니, 단지 가증스러운 인간일 뿐이지.
나는 그가 아내를 오래 속여 왔다는 걸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의 방식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녀석이 단연했는지,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비근한 예일 뿐, 나는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이, 다시 태어나도 그녀를 만나겠다는 그의 선언이 진실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편이냐 하면 우리 부부의 경우는 다르다. 아내와 나는 일찌감치 만약 내생(來生)의 삶이 있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합의한 바 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녀가 만나 가족을 이루는 이 부부라는 관계의 도정만큼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그런데 그걸 새로운 삶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나는 새로운 만남을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의 사랑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의 무게나 깊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유한한 삶의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밟아온 익숙한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일 뿐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바친 아름다운 연서
2007년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앙드레 고르(André Gorz, 1923~2007, 당시 84세)는 불치병으로 고통받아온 아내 도린(dorine keir, 1924~2007, 당시 83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가 자살하기 1년 전에 아내를 위해 쓴 책 한 권이 온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앙드레 고르가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바친 아름다운 연서로 일컬어진다. 그들은 1947년 스위스 로잔에서 만나 이후 60년을 함께 살았다. 아내는 남편의 저작 활동을 평생 지지했고 ‘삶의 불안전성’에 맞서 싸우는 남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자살 1년 전, 저자는 아내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한 통의 긴 편지를 썼다.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편지에는, 늘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만 해온’ 고르 자신을 자기 긍정의 세계로 이끌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 1954년 <배반자>를 펴내며 프랑스 지성계에 데뷔한 이래 아내와 나눈 지적 협력의 이야기”(알라딘 해설)가 담겨 있다.
소진하는 게 아니라 풍성하게 하는 사랑
저자는 자신을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던 사르트르와 절친했다. 그의 철학적 관심 역시 ‘소외’와 ‘해방’ 문제를 천착하는 등 사상 경향도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의 명망이 이 부부의 사랑과 죽음을 달리 평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차고 넘친다. <르 피가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묘비명을 상상할 수 있을까.”라고 했고 <르 몽드>에서는 “여든 살 연인들의 자살에서 하나가 된 그들의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다. <디 차이트>는 “이 작고 놀라운 책은 모두가 열망하는 것, 즉 오래 지속되는 사랑, 사랑으로 맺은 평생의 약속, 사랑을 소진하는 게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는 결혼에 대해 말한다.”고 격찬했다.
나는 이 노부부의 사랑과 죽음을 나의 문제로 바꿔 보았다. 앞으로 30년쯤 후에 우리 부부의 사랑과 믿음은 어떤 형식으로 진화할까. 죽음을 함께 할 만큼 그것은 두텁고 깊을까. 나는 그것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책을 읽으면서 ‘영원한 사랑’이란 한갓진 이미지가 아니라 인생의 황혼에서 부부가 서로 여미는 이해와 관용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노부부가 선택한 죽음은 결국 ‘사랑의 소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원한, ‘사랑의 지킴’이었던 것이다.
노년의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
나는 노부부들이 나누는 사랑이 가장 농익은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남편은 늙어서야 비로소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못다 한 사랑과 헌신을 시작한다. 주고받는 사랑, 그 무게를 저울질해야 하는 젊은이의 사랑에 비기면 노인들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연민으로 넘치는 것이다.
젊음의 한 시절을 한량으로 지내며 가족을 소 닭 보듯 했던 남편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늙은 아내를 돌보는 얘기는 더는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가망 없이 무너진 건강,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벗으로 그 고통을 나눌 지아비의 눈길은 그것 자체로도 사랑과 연민이다. 나는 가끔 그런 노부부를 만날 때마다 그들이 살을 맞대고 희비를 함께한 세월의 무게가 얼마나 ‘실존적’인가를 깨닫곤 한다.
그때 지아비가 바라보는 것은 아름다움과 상냥함, 친절과 정겨움을 찾을 수 없는 늙고 병들어 허술한 육신이 아니다. 그는 그 쇠락한 거푸집이 아니라, 함께한 간난의 세월, 그 세월 속에 똬리를 튼 실낱같은 애증의 자취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내의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신혼기의 부부가 ‘일심동체’란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다다를 수 없는 관념적 혼인 생활의 지표일 뿐이다. 그러나 노년기, 삶의 황혼에 선 부부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든 동질적이므로 그들은 ‘일심동체’에 가장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연민은 마침내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걸 그들은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년의 사랑,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형식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2008. 4.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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