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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4) 세월호 참사와 ‘여객선 사고’, 안산을 다녀오다

by 낮달2018 2019.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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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안산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다녀오다

▲ 안산 화랑유원지에 있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는 일요일에도 문을 열고 있었다.

안산을 다녀왔다. 12일 백만 촛불에 참여한 다음 날 정오께 나는 휴무로 쉬는 아들애를 길라잡이로 지하철을 타고 안산으로 향했다. 집회에 참석하고 하룻밤을 묵은 뒤에 안산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래 마음에 묵은 빚 때문에 낸 궁여지책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 곁에 가 보지 못했다. 부지런한 이웃들은 멀다 하지 않고 팽목항과 안산을 다녀왔다고 했지만 나는 고작 서울광장과 우리 지역의 분향소를 찾은 게 다였다.

 

참사 2년 반, 아직도 진실은 인양되지 못했다

 

지금은 떠났지만,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교사 대부분이 그랬듯이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 정부와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도 내 몫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참담하고 잔인한 4월 이후에 나는 두어 편의 글을 쓰면서 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다스렸을 뿐이다. 아무도 내게 그 빚을 묻지 않았지만, 마음속 부채감은 쉬 가시지 않았다. 지역에서 열린 썰렁한 추모 집회 때마다 슬픔과 분노조차 정치적 지역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되씹어야 했던 씁쓸함은 또 얼마였던가.

 

· 잔인한 봄노란 리본의 공감과 분노(2014/04/26)

· 아이들아, 너희가 바로 새잎이었다(2014/05/01)

· 에스토니아이후, 혹은 세월호 이후(2014/10/02)

 

탑승 인원 476명 중 295명이 죽고 9명이 실종된 이 전대미문의 참사는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고의 진상규명은커녕 아직 실종자 수습도, 선체 인양도 이루어지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제주도 수학여행의 꿈에 부풀었던 열여덟 소년과 소녀 250명이 눈을 번연히 뜬 채 심해에 가라앉아야 했던 이 사고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단순히 희생자의 숫자 때문이 아니다. 국가의 직무 유기로 그들을 살려내지 못한 이상 단 두세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7시간은 그 구멍 난 국가의 재난 대응시스템과 책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다.

▲ 세월호는 교통사고라고 한 집권세력의 논리는 여객선 사고라는 명명법으로 이어졌다. 갈무리

그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 싫은, 모든 질책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권력의 의중에 국민의 종복이라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기막히게 영합했다. 특별법을 만들고, 조사특위를 만들었지만, 온갖 야비한 방법으로 그 운영을 방해하고 유족들에 대한 갖가지 음해를 그치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몰염치,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선동을 추종하는 유권자들은 국가와 정부의 책임을 따지기보다 피해자의 분노와 슬픔이 너무 오래갈 뿐 아니라 지나치다고 나무란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억지와 후안무치가 생광스러운 정치적 효과로 이어진다고 믿는 정치인들의 선동은 확대 재생산되고…….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증오는 슬픔마저도 익숙하게도 편을 갈라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내어야 하는 이들에게 지겨운 슬픔너무 오래가는 슬픔도 없다. 수학여행 길에 나선 250명의 소년 소녀가 침몰하는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2학년 8개 반이, 발랄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웃음소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여러 경로로 남겨진 그들의 마지막 전언들과 수습된 그 아들딸의 모습들……. 어떤 어버이가 그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 정말, 함께 울던 우리의 마음은 오늘 어디쯤 있는 것일까.
▲ 단원고등학교에서 안산시 교육지원청으로 옮겨진 '4.16 기억 교실'은 아직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 우리는 정말 바람 소리 말고 파도 소리 말고 누구가 될 수 있을까.

 고잔역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역 광장 앞의 공원과 녹지에 단풍이 불타고 있었다. 걸어서 안산시 교육지원청까지 갔지만, 이전한 단원고 4·16 기억교실은 닫혀 있었다. 건물 전면에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정말 우리는 그들을 잊은 적이 없을까. 택시를 타고 화랑유원지에 있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 분향소에 닿을 때까지 나는 줄곧 그 문구를 되씹고 있었다. 분향소 주차장에 내렸을 때, 나는 내가 잔뜩 긴장해 있음을 깨달았다.

 

저 멀리 분향소로 쓰이는 큼직한 건물로 진입하는 통로 양쪽은 주차장이었다. 통로와 주차장의 경계석에 4·16가족협의회 명의의 현수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건 의례적 글귀라기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히고 있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깃든 조심스러운 질문 같았다.

 

함께 울던

당신의 마음은

오늘 어디쯤에

있습니까?”

 

밖에 누구 없나요?

바람 소리 말고

파도 소리 말고

 

일요일인데도 세 명의 젊은이가 상복을 입고 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말고도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들 몇이 보였다. 정작 아이들을 찾아왔지만, 하염없이 무거워진 마음 때문에 나는 방명록에 서명도 하지도, 거기 오래 머물지도 못했다.

 

거대한 실내 공간에 가득 찬 것은 스러진 아이들의 흔적들이었다.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과 그들에게 바쳐진 하얀 꽃송이들……. 우리는 꽃 한 송이 올리고 잠깐 묵상하는 것으로 분향을 마쳤다. 분향소를 나와 길거리에 서자, 정문 양쪽으로 담장을 따라 연대 단체들의 노란 펼침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 분향소 앞에는 단풍이 고왔지만, 단풍을 즐기기엔 이 도시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이 너무 커 보였다.

우두커니 택시를 기다리며 나는 펼침막의 글귀와 검붉게 타고 있는 단풍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풍을 즐기기에는 이 도시가, 250명의 학생을 잃은 한 고교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이 너무 커 보였다. 의례적으로 꽃 한 송이를 올렸지만 진실로 나는 바람 리파도 소리이상일 수 있을까.

 

여객선 사고’? 민심의 바다는 배를 뒤집을 수 있다

 

돌아와서야 나는 4·16기억 전시관을 빠뜨린 걸 알았다. 미리 염두에 두었는데 경황이 없어 그걸 기억해 내지 못한 거였다. 버스를 타고 귀향하면서 나는 전라남도 진도의 팽목항을 생각했다. 새로 봄이 오면 그 항구를 향해 떠날 수 있을까.

 

어제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의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두 달 뒤에 대통령에게 올린 국정원 보고서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부르며 그걸 대통령 지지도 하락을 부른 악재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7시간과 마찬가지로 세월호는 권력의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이름일까.

▲ 304명을 잃은 슬픔보다 집권 세력에게는 대통령 지지율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화면 갈무리

 그렇다. ‘세월호는 교통사고라 강변한 주호영의 논리와 판박이인 이 명명법은 304명의 목숨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더 중요하다는 그들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흘린 눈물이 단지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이라는 추론이 무리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비판세력에 대한 보수 단체 활용 맞대응 집회여론조작 방안따위를 담고 있는 이 문건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권세력의 민낯이다. 날마다 늘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현 정권의 실정과 국정농단 앞에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건 오히려 시민들이다.

 

그들 선량한 시민들이 밝힌 백만의 촛불은 저들 기득권에 띄우는 비상한 경고다. 저들은 지지율에 골몰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비하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여객선 사고에 모인 민심의 바다가 저들의 배(권력)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16. 11.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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