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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세월호 5주기- ‘에스토니아’ 이후, 혹은 ‘세월호 이후’

by 낮달2018 2019.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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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5주기 

 

16우리는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는다주변에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그들이 특별히 다른 이들보다 야박한 심성을 가진 이여서가 아니다단지 남의 고통을 내 것으로 이해하는 힘, ‘공감’ 능력을 스스로 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는가그것은 상대의 불행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했던 슬픔이고 분노다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하는 것역지사지든공감이든 그들은 거기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세월호 5정권까지 바뀌었지만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책임져야 할 보수 정치세력의 끊임없는 방해와 폄훼 탓이다그런 뜻에서 1994년 사고 이후 3년여의 조사 끝에 보고서를 내놓은 에스토니아호의 사례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2019.4.14.

 

▲ 에스토니아호 사고 이후 스웨덴 스톡홀롬에 세워진 에스토니아호 희생자 추모비. ⓒ <위키백과>

 

1994928일 발트해

 

저녁 7989명을 태우고 탈린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가던 카페리 선인 에스토니아호는 새벽 148분 핀란드 남서 해역에서 침몰했다. 스웨덴(501)과 에스토니아(290), 핀란드, 독일 등 17개국 852명이 숨졌고 137명만이 구조됐다. 추위와 악천후 등으로 주검도 94구밖에 수습하지 못했다. 스웨덴 정부는 3개월 시도 끝에 인양을 포기하고, 콘크리트로 배 주위를 덮어 주검 유실을 막고는 침몰 해역을 757명 영령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포했다.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스웨덴 전문가로 이뤄진 합동조사위원회는 3년여 조사 끝에 1997년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화물칸을 잠그는 함수문의 파손으로 침수가 시작되었고 화물칸 차량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서 침수가 가속화되었다고 밝혔다. 선원들이 침수를 알고도 뒤늦게 대피 방송을 하고, 승객들의 대피를 돕지 않고 먼저 탈출에 나서는 등 인재 요인도 작용했다고 밝혔다.

 

참사 이후, 스웨덴 정부는 대대적인 안전점검과 함께 선박 구조 변경, 선원 안전교육 강화, 구조체계 개선 등의 대책 마련에 나섰다.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도 비상 대피로를 개선하는 등 선박 설계 규정을 바꿔 이후 새로 건조되는 배에 적용토록 했다.

▲ 1994년 9월 28일 발트해역에서 침몰한 카페리 에스토니아호. ⓒ <위키백과>

2014927~28, 스웨덴·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선 27일 밤 추모 기념탑 주위에 852개의 횃불이 켜졌다. 20년 전 에스토니아호의 운명의 항해시간과 같은 6시간의 추도 콘서트도 이어졌다. 28일 에드가르 사비사르 탈린 시장은 추도사에서 에스토니아호 사고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우리 모두와 연관돼 있다.”라고 하며 희생자들과의 연대감을 강조했다.

 

발트해 건너 스웨덴에서도 추모식이 열렸다. 28일 국왕 카를 구스타프 16세가 스톡홀름의 추모탑에 직접 화환을 바쳤다. 그는 에스토니아호 침몰은 전체 사회에 충격을 준 참사였다우리는 희생자의 이름과 비운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빌헬미나와 노르코핑, 린데스베리 등 다른 스웨덴 도시에서도 기념식이 열렸다.

 

           - <한겨레> 기사(바로 가기)에서 발췌 인용

 

사고가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하게 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고 해도, 재해의 원인은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까닭이다. 멀리 갈 것 없이 해방 이후 얼마나 많은 사고가 있었는가.

 

그러나 올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고는 참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였다. 그것은 오직 성장이라는 과실을 겨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반세기가 일종의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진실을 환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숱한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의 모모한 인사들이 세월호 이전이후를 나누면서 근본적 해법을 다투어 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어떤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 6개월을 허송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속절없이 잃은 유족들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안전한 나라를 위해 곡기를 끊고, 한뎃잠을 자면서 싸웠지만, 정치권의 합의는 그들의 요구와 해법을 비켜 갈 뿐이다. 그리고 그예 여당과 보수 세력 등에서는 세월호 피로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에스토니아호 참사 20주년을 맞아 스웨덴 국왕이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1994년의 에스토니아 침몰 20주년을 전하는 외신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20년 후의 한국을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채 반년도 되기 전에 피로를 이야기하는 사회, 진상규명을 위한 첫발도 떼지 못한 상황에서 20주년 추모식에 꽃을 바치는 스웨덴 국왕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한 달 가까이 한뎃잠을 자면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해야 하는, 지치고 버려진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에 겹쳐 보인다

 

벌써 피로라면 세월호 이후는 없다

 

그들은 피로해 하지 않는다. 번연히 눈을 뜬 채로 300여 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심해에 가라앉게 한 사고가 아니었다. 구조 의무를 유기해 버린 정부의 책임도, 오직 이윤만을 노려 규정을 무시하고 운행한 선사의 잘못이 있었던 사고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20년을 아프게 맞으면서 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퍼 왔다는 스웨덴 국립교육청의 대규모 사고 이후의 지침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두 얼굴을 생각하는 이유다. 곡기를 끊고 있는 유족들 주위에서 이른바 폭식 투쟁을 한다는 사람들이나, 세월호 리본을 제거하겠다며 나서는 이들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짐짓 무심한 채, 그들의 도발을 자신들의 이해와 엮고 있는 세력들이다.

 

정말 우리 사회는 사고 이후 차고 넘쳤던 예의 해법대로 세월호 이전이후로 나눌 수 있는 단초를 만들 수 있을까. 3, 5년이 아니라 10, 20년 후에도 진도 앞바다의 심해에 가라앉아야 했던 아름다운 아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슬픔과 아픔으로 기릴 수 있을까.

 


스웨덴 국립교육청

대규모 사고 이후의 지침

 

1994년 9월 발틱해에서 8백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에스토니아호 참사 이후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도록 대규모 사고 이후의 지침을 만들어 권장합니다.

 

연락하라!

전화를 하거나편지를 쓰거나메일을 보내거나 문을 두드려라기다리지 말고 오늘 당장 하라! “아마 혼자 있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생각지 마라엄청난 참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결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재난을 당한 가족을 만나면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과도 얘기하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아이들은 쉽게 간과된다당신이 만약 교사라면 특히 아이들과 얘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고 후 일정 시간이 지나 마주치면 절대 피하지 말고 얘기 나눠라!

만약 큰 재난을 당한 사람을 거리에서나 상점에서나 복도에서 만나면 바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껴안으며 다음과 같이 안부를 묻고 얘기해라 이렇게 다시 보니 얼마나 좋아사고 난 것을 들었어지금은 어때” 큰 사고를 당하면 아주 민감해진다만약 누가 눈길을 주지 않고 길을 건너가거나 건성으로 안녕이라고 하며 그냥 가버리면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했거나 더러운가 라고 생각한다슬퍼하는 데 대해 부끄러워한다절대 그렇게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고를 당한 아이(사람)들이 얘기하도록 하라!

큰 사고를 당한 아이들은 많은 사람에게여러 형태로 계속해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하라얘기를 할 때마다 그 사고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된다교사로서 친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얘기를 들어주는 인내심 있는 청취자가 되는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한 사람이 언제어디서어떻게누구에게 얘기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즉 강요하지 미라얘기를 많이 하고 싶을 때도 있고 입을 꼭 다물어 버릴 때도 있다.

 

위로하지 말고 위로가 돼라!

부모를 잃거나 자식을 잃는 큰 재난에는 사실 어떤 위로의 말도 없다그러나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하라곁에 있으면서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또 지금이 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속해서 관심 가져줘라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와 교사친척뿐이다.

 

비밀을 보장해 줘라!

큰 사고로 충격을 받고 슬픔에 잠겨있을 때는 얘기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그러니 얘기 들은 것 모두를 다른 사림에게 전달하지 마라침묵을 지킬지 퍼뜨려야 할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면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라많은 소문이 나돌고 과장되고 왜곡될 때가 많으니 얘기 퍼뜨리는 것에 대해 아주 조심해야 한다절대 다른 누구에게 들었는데 하는 식의 얘기를 퍼뜨리지 마라!

 

실질적인 것을 도와줘라!

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한다그러니 넌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전화해!” 이렇게 얘기하지 마라대신 이렇게 얘기하라 오늘 빵을 좀 구웠는데 몇 개 가져왔다.” 또는 토요일 친구랑 와서 청소해 줄게진공청소기 있지?”, “이번 주 저녁은 내가 며칠 할게수요일과 토요일이 어때?”

 

기쁜 일과 일상적인 것을 보여줘라!

누구도 항상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가끔은 기쁜 일과 평소의 삶도 필요하다전화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좋다예를 들어 영화관에 좋은 영화가 들어왔던데오늘 저녁이나 내일 저녁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또는 이번 주일에 코펜하겐으로 놀러 가는데 우리 차에 자리가 있어네 여자 친구랑 우리 넷이 같이 가지 않을래내 여자 친구가 네 여자 친구랑 같이 가면 아주 좋아할 텐데.”

 

견뎌내!

슬픔은 금방 지나가지 않는다시간이 걸린다슬픔과 같이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많은 사람은 첫째 몇 주는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 후론 조용해졌다고 증언한다그러니 참사를 당한 가족과 지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라특이한 날을 기억해라생일크리스마스일 주기또는 그 참변을 되살리게 하는 다른 사건그때 다시 연락해라그리고는 참변을 당한 친구나 가족이 다시 슬픔에 잠기게 하지 말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당신이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줘라.


대규모 사고 이후의 지침의 마지막 항목은 견뎌내! 슬픔은 금방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시작된다. 그렇다. 고작 6개월이 지나갔다. 슬픔은 여전하다. 용납하지 못하는 이웃들의 무심과 조롱 앞에서 그들의 슬픔은 더 깊어졌고, 그것은 분노로 응어리질 수도 있다.

 

다시 슬픔에 잠기게 하지 말고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당신이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줘라.”

 

지금 그것이 우리가, 우리 지역이, 사회가, 국가가 그들에게 베풀어야 할 오직 하나뿐인 원칙이고 위로고 배려다. 그러나 2014년의 한국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비극으로 말미암은 슬픔과 분노를 승화하자는 유족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정권이 정파적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증유의 비극을 넘는 데 필요한 것은 그런 소박한 양식과 원칙이다. 그걸 지키지 못하는 사회라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일도, 스무 해 뒤의 추도식 따위도 기약할 수 없을지 모른다.

 

 

2014. 10.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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