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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고치고 깁기, ‘영선(營繕)’을 다시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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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영선(營繕)’은 살아 있다

▲ 나무 책걸상에다 무쇠 난로, 삐걱대던 마룻바닥의 옛 교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다. ⓒ 인스타그램

얼마 전 교회 일로 통화하고 있던 아내가 ‘영선부가 어쩌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반색했다.

 

“아니, 당신 영선부라고 했어?”
“그래요, 왜? 교회 시설관리하고 보수하는 부선데. 왜요?”
“아니, 거기에 아직도 영선부가 있다 이거지…….”

 

나는 잠깐 아스라한 감회에 젖었다. 웬 낱말 하나로 괜한 주접을 떨고 있냐고 나무라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 풍요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지난 세기의 낱말 하나가 조그만 교회 조직에 살아 있었다는 발견은 매우 새삼스러웠다.

 

영선, ‘고치고 깁기’

 

‘영선’은 경영할 영(營), 기울 선(繕) 자를 쓰는 한자 말이다. ‘영선’은 표준국어대사전에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으로 나와 있는데 이 뜻으로 보면, ‘영선’은 ‘건축물’에만 한정된 낱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선’은 그보다 훨씬 폭넓게 쓰이는 개념이었다.

 

내게 남은 ‘영선’과 관련된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의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학급 조직에 있었던 ‘영선부’다. 요즘이야, 총무·학예·봉사·체육·지도 등의 부서로 학급을 짜지만, 그때만 해도 전설 같은 ‘오락부’와 함께 ‘영선부’가 있었다.

 

‘영선부’? 아이들이 그게 뭔가 싶어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으니 담임교사는 그게 ‘학급의 책걸상이 부서지거나 고장 나면 목공실로 가져가서 수리해 오는 일을 맡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글쎄, 영선부장이 얼마나 제대로 역할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사내아이들이 우글대는 교실에서 책걸상 파손이 적잖았던 것은 틀림이 없다.

 

두 번째 기억은 70년대 병영의 ‘영선실’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부대의 모든 건물은 미군들이 쓰던 ‘퀀셋(Quonset)’ 막사였다. 둥근 원통을 엎어 놓은 것 같은 그 막사의 특징은 여름엔 찜통이 따로 없을 정도로 더웠고 겨울은 겨울대로 썰렁하기만 했다는 점이다.

 

각 중대와 중대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 예의 ‘영선실(營繕室)’이 있었는데 그게 부대의 정식 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비좁은 공간에 낡은 재봉틀 한 대가 놓여 있었고, ‘영선병(營繕兵)’이라고 불린 담당 병사가 병사들의 피복을 수선해 주곤 했다.

 

그때, 영선병은 나보다 한참 밥그릇이 위인 강 씨 성의 선임병이었다. 충남 어디쯤이 고향인 이 선임병은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전투력은 ‘꽝’이었다. 무장 구보에서 낙오를 도맡아 하면서 중대 전투력을 까먹던 그를 ‘영선병’으로 파견한 것은 ‘전투력 보전’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모양이다.

 

‘영선부’와 ‘영선병’의 추억

 

정작 영선실과 영선병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거길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부대 한쪽에 세련된 기술로 병사들의 옷을 줄여주던 ‘군장점(軍裝店)’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 휴가를 다녀올 무렵 그 영선병은 제대를 했고 이후에 새로 영선병이 임명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요즘은 학교 걸상도 예전 같지 않다. 높낮이 조절이 되는 데다가 인체공학적이기까지 하다.

제대한 지 30년이 넘었으니 ‘영선’은 이제 잊힌 말이 되었다. 주변에 물었더니 40대 중반의 동료들도 ‘영선’은 처음 듣는 말이라 한다. 하긴 아쉬운 게 없는, 온갖 물자가 넘치는 풍요의 시대다. 성가시게 꿰매고 수선하는 일은 오히려 가외의 일거리일 수도 있으니 영선이 ‘죽은 말’이 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레 아이들이 쓰는 책걸상을 유심히 살펴본다. 우리가 썼던 나무 책걸상은 이제 옛말이다. 요즘 책걸상은 철제의 뼈대에다 합판을 덧댄 아주 세련된 놈으로 바뀌었다. 튼튼하기도 하지만 여자아이들이라 그게 파손되는 예도 없다. 게다가 모두가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학기 초에 나는 연장을 들고 아이들 책걸상의 높낮이를 조절해 준다고 땀깨나 흘리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은 ‘부족’이나 ‘결핍’을 모르고 자란 세대다. 아이들에겐 자기 소유에 대한 개념도 온전하지 않은 듯 보인다. 자기 물건을 잃어버리고도 이를 찾으러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모두가 다 넉넉한 집안도 아닐 텐데도 그렇다.

 

교실에 어지럽게 널린 체육복은 주인을 찾아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쓰레기로 버린다고 해도 아이들은 그런가 하고 심상한 얼굴로 쳐다볼 뿐이다. 책은 더 말할 게 없다. 아이들은 책이나 공책에 자기 이름 써 놓는 것도 생략한다.

 

우리가 자랄 적에는 학년이 바뀌어 새 책을 받으면 우리는 먼저 튼튼한 비료 포대 종이나 달력 종이를 뜯어 책 꺼풀부터 입혔다. 그렇게 간수하며 공부한 책은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딱히 누구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그렇게 아끼고 간수하는 걸 우리는 기본으로 배웠던 것이다.

 

연필은 또 어땠는가. 몽당연필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한두 자루씩 장만했던 연필은 어찌 그리 빨리 닳았는지…….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짤막해진 연필은 못 쓰게 된 볼펜 자루에 끼워서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물자가 부족하고 귀하던 시절이었다.

 

근검, 가난하던 시절 몸에 밴 습관

 

그런 시절을 통해서 얻은 습관은 평생을 간다. 아끼고 간수하는 게 몸에 배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에는 사모님께서 담뱃갑에 끼워 주는 이쑤시개를 분질러서 두 번에 나누어 쓴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같은 근검은 가난한 시절을 겪은 사람의 몸에 밴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종일 학교에서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독서대가 요긴하다. 하루는 멀쩡한 독서대 하나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어서 물었더니, 장석이 빠져 못 쓴단다. 교무실에는 연장이 없어 집에 가져와 초소형 드라이버로 고쳤더니 멀쩡해졌다. 다음날 돌려주었더니 아이의 입이 찢어졌다.

▲ 아이들이 가진 짧은 연필. 몽당연필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다.

내가 아이의 독서대를 고친 것도 영선의 일부가 되겠다. 일반인들은 영선이라는 낱말조차 잊고 살지만, 여전히 영선이라는 낱말은 관련 업계에서는 살아 있는 말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시설관리를 맡은 이를 ‘관리(영선)기사’라 부르고, 국립공원에는 ‘영선직’이라는 직역(職役)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도 ‘영선’은 살아 있다!

▲ 없어져 버린 줄 알았던 '영선'은 이렇게 아직도 살아 있다. 영선직 사원을 모집하는 광고다.

그렇게 보면 ‘영선’이 죽은 말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영선은 가난하고 헐벗었던 지난 시대의 생존을 위한 근검 전략이었지만, 풍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그 의미를 하찮게 여길 수는 없는 까닭이다. 결국 ‘영선’은 물자 이용과 관리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매우 경제적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십몇 년을 써 망가지고 내려앉은 싱크대 일부를 갈았다. 업자가 와서 반나절에 걸쳐 시공하고 갔지만, 싱크대를 붙인 벽면에 타일을 새로 붙이면서 중간 틈새를 제대로 메우지 못했다. 백시멘트로 발라야 하는데 내가 하마고 해 놓고 차일피일 해왔다. 이번 주말에는 그걸 메우는 작업을 치러야 한다. 비록 어설픈 솜씨지만 그건 아파트 영선 기사가 아니라 내 몫의 일이기 때문이다.

 

 

2010. 11.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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