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해묵은 고을은 아니었어도 그 마을의 품새는 넉넉했네

by 낮달2018 2026. 5. 2.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를 찾아서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본리는 1995년 대구광역시의 시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평문씨가 500년간 세거해 온 동네다. ⓒ 달성군청
▲ 일반적으로 연못을 가리키는 '지(池)'가 아닌 '인흥원'이란 이름이 붙은 본리의 연못. 원래 논밭을 달성군에서 연못으로 조성했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본리 세거지. 가운데 보이는 집이 수백당(수봉정사)이다. 앞의 밭은 목화밭이고, 오른쪽에 폐사지 탑이 있다.

비슬산 대신 찾은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지난 4월 22일에 나는 아내와 함께 참꽃문화제가 열린 비슬산을 찾았다. 축제는 끝났지만, 일주일간 정상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선 거였다. 축제가 파했으니, 얼마간은 한산할 거라는 기대는 비슬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으로 오르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무는 모습을 보면서 일찌감치 깨졌다.

 

주차장이 만차라서 차를 돌려 내려오다가 골목 안 마을에 간신히 차를 대긴 했는데, 하산한 사람들로부터 셔틀버스는 오후까지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리는 얌전히 차를 돌렸다. 미리 근처의 명소를 검색해 둔지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3길 16(본리리)로 차를 몰았다.

 

본리는 1995년 대구광역시의 시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평문씨가 500년간 세거해 온 동네다. 남평문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1329~1398)의 후손이 대구에 입향한 것은 대체로 500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18세손인 문경호(1812~1874) 때이다.

 

문경호는 문 씨만의 마을을 만들기로 계획하고 원래 고려의 큰 절인 인홍사(仁弘寺)가 있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오늘의 인흥마을을 새로 열었다고 한다. 여기 처음 세운 건물은 1820년을 전후해서 지은 재실 용호재(龍湖齋)로 현재 광거당(廣居堂)이 있는 곳이다.

 

저택이 들어선 것은 1800년대 후반으로 처음에는 초가로 시작했으나 그 후 100년에 걸쳐 지금의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현재 70여 채의 기와집이 정연히 들어서 있는 이 마을의 한옥은 건축 연도는 200년이 채 안 되지만, 전통적인 조선 말기 영남지방 양반 가옥의 전형으로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 인흥마을 안내도.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인흥마을' 리플렛의 사진을 재구성했다.
▲ 인흥마을의 흙으로 쌓은 돌담은 낮은 건 2m에서 높은 건 3m에 이르러 사생활을 보호하며 공간을 나누고 있다.

목화를 전한 문익점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동네

 

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니, 은행나무 고목 옆, 오석 위에 관복 차림의 문신 동상이 왼손엔 서책, 오른손으로 붓을 들고 앉아 있다. 더 물을 것 없이 남평문씨의 중시조인 문익점이다. 고려 후기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하여 전국에 보급한 문신이요, 학자다.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를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서 돌아와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의 제거와 실 뽑는 방법을 알지 못했는데,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나라 승려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산청 목면시배 유지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여기에 삼우당 선생 면화 시배(始培)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경북 의성은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목화씨를 대규모 시험재배한 역사적 장소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는 그의 손자인 문승로가 현감으로 부임하여 목화씨를 대규모로 시험 재배했던 역사적 장소가 있다. 1909년 후손들은 금성면 제오리에 ‘충선공 삼우당 문 선생 목면 유전표(忠宣公三憂堂文先生木綿遺田表)’를 세웠고, 일제는 1935년, 대리리 조문국 유적지에 면작 독려 정책의 일부로 ‘면작(綿作) 기념비’를 세웠다. [관련 글 : 의성 조문국(召文國) - 잃어버린 고대 왕국을 찾아서]

▲ 마을 주차장 앞에 세워진 문익점의 동상. 마을의 입향조는 문익점의 18대손이다.

문익점의 동상의 받침대에는 “우리 동쪽 나라(조선)가 삼백 년 이래로 의관(옷차림) 문물이 찬란하게 새로워진 것은 실로 강성군(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공덕은 강성군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는 ‘조선 21대 영조 왕의 전교’가 새겨져 있다.

 

동상 뒤쪽으로 빈 밭이 펼쳐져 있는데, 왼쪽 입구에는 ‘목화밭’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문익점의 동상을 세우고 마을 안쪽에 붓 모양의 상징 조형물을 지어 문익점을 기리고 있는 마을이니 당연히 ‘목화밭’은 갖추어야 할 구색이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시방 밭은 비어 있었다.

▲ 관리사로 쓰이는 건물 앞쪽에 수백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다.
▲ 유명한 문중문고인 인수문고(가운데). 왼쪽의 거경서사는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고 토론하던 교육과 수양의 공간이다.
▲ 수봉정사 왼쪽 담장 아래에는 분홍빛 모란이 넉넉하게 피어 있다.
▲ 수백당의 관리사에서 수봉정사로 들어오는 일각문 옆 담장 앞에 진홍빛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수백당 안에는 여기저기 진홍과 분홍, 흰 빛 등의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

미리 계획한 답삿길이 아니어서 나는 좀 설렁설렁 마을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정작 문을 열고 있는 집은 마을 어귀의 수백당(守白堂)뿐이었다. ‘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로 수봉(壽峰)과 수백당을 아호로 쓴 문영박(1880~1930)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이 1936년에 세웠다.

 

수백당(수봉정사), 문영박 선생을 추앙하고자 세운 집

 

수봉은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 그가 별세할 때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계속 송달해 주어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 진작 시켰다.”(독립 유공자 공훈록) 이에 정부는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과 국회의원을 지낸 문채갑은 그의 손자라고 한다.)

▲ 수백당 편액을 건 건물 수봉정사는 견고하게 지어진 무게감 있는 건물로 1936년에 수봉 문영박 선생을 기리려고 지었다.
▲ 수봉정사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의 일자 모양의 팔작집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두었다.

수백당 편액을 건 건물 수봉정사(壽峰精舍)는 견고하게 지어진 무게감 있는 건물로 1936년에 수봉 문영박 선생을 기리려고 지었다. 수봉정사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의 일자 모양의 팔작집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두었다. 방에는 들어열개문 형태의 분합문을 달아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방과 마루가 하나의 큰 공간으로 연결되어 손님을 맞거나 문중 모임을 할 때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수백당에는 소나무, 배롱나무, 수석이 조화된 아름다운 정원과 격조 높은 흙담, 그리고 화려함보다 품격을 중시한 선비의 미학이 돋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간결하고 단아한 기와지붕과 소박한 마루를 통해 양반가의 고고한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백당의 인수문고, 2만여 권 소장한 문중문고

 

수백당의 문은 수봉정사 정면에 자리한 솟을대문 말고도 일각문이 셋이나 있다. 정사 뒤쪽 담장에 낸 일각문은 마을 안 골목으로 이어졌고, 오른쪽 담장 가운데 낸 일각문은 인수문고(仁壽文庫)로 드는 문이다. 인수문고는 2만여 권의 국내외 전적(典藉)과 문건 등을 수장하고 있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문중문고다. 인수문고가 소장한 책들은 결본이 거의 없는 완전 본이며, 문중문고지만 지역성에 편협되지 않고 다양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인수문고 왼쪽의 거경서사(居敬書舍)는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고 토론하던 교육과 수양의 공간이다. 오른쪽의 중곡서고(中谷書庫)는 중곡 문태갑(1930~2024)이 평생 모은 근·현대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수봉정사의 마지막 일각문은 인수문고 쪽의 관리사로 이어지는 문이다.[안내도 참고]

 

수백당에는 유난히 모란이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전통적인 진홍빛 모란 말고도 분홍과 흰빛의 모란이 담장 아래에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인수문고로 드는 일각문 옆에 핀 꽃은 큰꽃으아리였는데, 나는 그걸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으로 그 이름을 처음 알았다. [관련 글 : 모란과 장미, 그리고 처음 만난 꽃들 2026년의 봄꽃(4)]

▲ 인흥마을 앞 산책길에 꽃을 피운 꽃산딸나무. 서양에서 들어온 산딸나무다.
▲ 마을을 하나로 이어주는 골목 담장은 돌담이나 꽃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장이 높고 흙과 돌로 정성스럽게 쌓았다.

수백당은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9가구 70여 채의 살림집과 재사(齋舍) 2곳(수봉정사, 광거당), 문고 1동으로 이루어진 세거지의 가장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다. 본리리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길지임에도 허한 부분에 나무를 심어 비보(裨補 : 풍수지리에서 땅의 기운이 부족한 곳을 인위적인 조치-탑, 사찰, 나무 등-를 통해 보완하고 채워 명당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환경 조정 방식)하고 일찍부터 도시계획 개념을 도입하여 마을을 반듯하게 조성했다. 마을을 조감한 사진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백당 뒤쪽 일각문으로 나와 마을의 골목 안으로 접어들면 마을의 집들을 구획하는 흙으로 쌓은 돌담길을 만난다. 가로세로로 뻗어 있는 이 정연한 담장은 낮으면 2m 안팎, 높으면 3m 정도에 이른다. 여름철에는 담장을 따라 능소화가 절경을 이루어 사진가들이 발길이 잦다고 하는데, 나는 지난해 여름부터 여기를 오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 광거당은 인산재 문경호가 처음 본리에 정착할 때 지은 용호재가 있던 자리에 1910년 문봉성, 문영박 부자가 지은 재실(齋室)이다.
▲ 광거당 앞의 헛담. 솟을대문에서 바로 본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림막 구실과 함께 아름답게 꾸민 담장이다.
▲ 광거당 누마루에 걸린 현판 중 청나라 장건이 썼다는 '고산경행루'.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라는 뜻이다. 고

광거당의 헛담, 현판들

 

수백당 뒤쪽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마을 언저리에 광거당(廣居堂)이 있다. 인산재 문경호가 처음 본리에 정착할 때 지은 용호재(龍湖齋)가 있던 자리에 1910년 문봉성, 문영박 부자가 지은 재실(齋室)이다. 이후 광거당 안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온 나라의 문인, 학자들이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이 되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흙과 기와로 쌓은 작은 담장을 ‘헛담’은 광거당 건축미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 담은 대문에서 바로 본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림막(내외 담) 기능과 함께, 기와 조각으로 꽃 한 송이를 형상화한 문양을 새겨 넣어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더한 담이다.

 

누마루에 걸린 편액 중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는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라는 뜻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장건(張謇)이 쓴 글씨다.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덕이 높은 선인을 존경하고 바른길을 따르겠다는 선비의 의지를 드러낸다.

 

건물 오른쪽 누마루 편액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은 추사의 글씨로,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지금 연못은 메워지고 없지만 뜰 안의 대숲과 담장 밖으로 높이 솟은 노송들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란 사실을 환기해 준다.

▲ 마을 왼쪽의 소나무 비보림. 풍수설(風水說)로 허한 곳을 보완하려 심은 노송이다.
▲ 마을 오른쪽 광거당 쪽의 노송들. 역시 풍수설에 따른 비보 숲이다.

인흥마을의 비보림과 인흥원

 

광거당의 노송을 비롯하여 세거지의 좌우에는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노송들이 장관을 이룬다. 풍수설(風水說)로 허한 곳을 보완하려 심은, 평균 높이 14m, 나이가 100년이 훨씬 넘은 소나무로 이루어진 비보림(裨補林)이다.

 

인흥원(仁興園)은 마을 왼쪽 입구에 자리한 연못이다. 연지를 가리키는 ‘-지(池)’가 아니고 정원을 가리키는 ‘동산 원(園)’ 자를 쓴 까닭이 궁금하다. 경주의 안압지를 연상시킨다고 하는데, 규모는 거기 비길 바가 못 된다. 원래부터 있었던 연못이 아니라, 과거 논밭이었던 곳을 달성군에서 연못으로 조성했다. 주변의 한옥, 여름이면 다투어 피어나는 능소화와 어우러져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며, 연꽃과 배롱나무꽃이 핀 풍경도 좋다고 한다.

▲ 인흥원 연못 가에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서 있다.
▲ 인흥마을의 연못 인흥원. 수면에 비치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사진가들을 불러모은다.
▲ 옛 인흥사지에 서 있는 석탑. 2기였으나 1기는 경북대로 옮겨져 복원되어 있다.
▲ 경북대 캠퍼스에 복원되어 세워진 인흥사지 삼층석탑.

마을은 일연 스님이 주석한 절집 인흥사 절터

 

늘 그렇듯 아무 준비 없이 와서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 마을을 떠난다. 마을 앞 목화밭 옆 길가에 허물어진 석탑 한 기가 이곳이 1264년 일연(1206~1289) 스님이 포항의 오어사(吾魚寺)로부터 이곳에 있던 인홍사(仁弘社)로 수행처를 옮겨 주석한 절터였음을 확인해 준다. 일연은 1274년에 이 사찰을 중건하고 원종의 사액을 받아 사찰명을 인흥사(仁興社)로 바꾸었고, 삼국유사의 저본이 된 역대 연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폐사지 석탑은 2기였는데, 1기는 1950년대에 경북대학교로 이전하여 복원되었지만, 나머지 석탑은 부재들이 오랜 시간 방치되거나 파손된 채 남은 것이다. 그러니까, 인흥마을은 고려시대에는 사액까지 받았던 사찰 인흥사 터에 새롭게 조성된 마을이었던 셈이다.

 

비어 있는 목화밭에는 8월쯤 목화꽃이 핀다고 한다. 목화는 한해살이풀이지만 작은 관목 형태도 있으며 꽃이 지고 9월 이후에 꼬투리가 익어 터지면서 솜이 보이는데 털은 모아서 솜을 만들고 종자는 기름을 짠다. 6월이 되면 마을에 능소화가 흐드러지고, 가을이 되어 목화의 하얀 솜이 노출될 것이다. 그걸 다 만나기는 어려운 일, 능소화를 만나러 다시 오게 될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며 우리는 인흥마을을 떠났다.

 

 

2026. 5. 2.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