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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칠백의총, 칠백 고혼이 증언하는 우국의 용기와 단심

by 낮달2018 2026. 4. 27.

임란 때 순절한 칠백 의사를 모신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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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기록화 '금산혈전순절도',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소장

난생처음 충남 금산에 들른 건 보곡산골 산벚꽃 축제를 찾으면서였다. 나는 금산이 인삼의 고장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우연히 포털에서 본 기사에 꽂혀 산벚꽃 축제를 겨냥하고 길을 떠난 거였다. 나는 금산이 비단 금(錦) 자를 쓰는 건 물론, 전북 완주와 맞붙은 동네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금산에서 산벚꽃 말고도 칠백의총을 찾다

 

금산에 산벚꽃 구경을 간다니까 “꽃길 자주 쫓는 것 보니 잘 늙고 있는 중”이라고 해 준 벗의 공치사가 싫지는 않았다. 꽃이 있으니 가는 거니, 꽃이 무엇이든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무언가 겨냥할 만한 일이 있어야 길 떠나기가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산군 군북면 일원에 있는 보곡산골마을에서 산벚꽃을 즐긴 다음, 우리 내외는 복수면의 안창살 전문점이라는 한 유명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추부면의 한 모텔에서 묵었다. 다음날 금산수삼시장에 들르려고 숙소를 나서면서 검색해 보니 가는 길에 ‘칠백의총’이 있는 거였다. [관련 글 : 국내 최대 자생 군락지 보곡산골마을산벚꽃을 찾아서]

▲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  국가유산청 칠백의총 관리소가 운영하는 칠백의총기념관

칠백의총? 그게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나는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과 잠깐 헷갈렸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1만여 명의 민·관·군을 합장한 데 만인의총이었으니, 칠백의총도 비슷한 사연이 있는 곳일 거였다. 우리는 숙소를 떠나 10여 분 만에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국가유산청 칠백의총 관리소에 닿았다.

 

금산 칠백의총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의병장 조헌(1544~1592) 선생과 의승장(義僧將) 영규(?~1592)대사가 이끄는 칠백여 명의 의병이 왜적 만 오천여 명과 싸우다 순절하자 그 의병들의 유해를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 칠백의총 누리집의 칠백의총 둘러보기.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조헌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8월 1일(음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조헌의 의병부대는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금산을 점거하고 호남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금산전투(1592)에서 순절한 7백 의사 유해를 모신 곳

 

8월 18일에는 호남 순찰사인 권율 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금산의 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왜적의 기세로 보아 아군이 중과부적의 열세임을 탐지하고 작전을 바꾸어 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조헌 선생에게 띄웠다. 그러나 편지를 미처 받아보지 못한 채 출병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필사적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8월 18일(음력) 모두 순절하였다.

 

조헌 선생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 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를 세우고 인조 25년(1647)에는 사당을 건립, 칠백 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4년(1663)에는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 사액(賜額)하고 토지를 내려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

 

종용사에는 칠백 의사 외에,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1533~1592) 선생과 그 휘하의 의병, 그리고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1557~1592) 선생과 무명 의사 등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매년 9월 23일(임진년 음력 8월 18일 해당)에 칠백 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의총과 종용사를 훼손하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境域)을 황폐하게 만드는 등 유적을 말살하였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으며, 1963년 1월 국가에서는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1963년 5월)에 따라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제1, 2차 보수 정화 사업을 통해 오늘과 같은 성역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6년에는 기념관 신축, 칠백 의사 순의탑(殉義塔) 건립, 경역 조경 등 제2차 정화 사업으로 현재 모습이 되었다.

▲ 칠백의총 경내의 소나무들. 훤칠하게 키가 큰 노송이 곳곳에 서 있었다.
▲ 칠백의총기념관의 전시물 철릭. 철릭은  고려 때 몽골에서 들어와 왕과 문무관의 복장으로 정착했으며 조선 초에는 사대부의 일상 외출복으로도 쓰였다.
▲ 칠백의총기념관의 전시물 임진왜란 당시의 복식과 무기.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념관 앞으로 나오자, 9시가 갓 지난 이른 시간이어선지 칠백의총 주변은 한적했다. 기념관 왼쪽의 왕버들 고목 두 그루가 서 있었고, 간단히 기념관을 둘러보고, 기념관 뒤쪽으로 나갔다. 곧게 자란 훤칠한 노송이 심어진 정원 저편에 홍살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의총이 세워진 게 1592년, 사당이 건립된 게 1647년이니 이 의로운 무덤과 사당은 434년에서 379년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적이다. 홍살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오른쪽 수양버들과 산수유, 소나무와 모과나무 등이 둘러싼 연못 숭의지(崇義池)가 나타난다.

▲ 칠백의총 정문 앞의 홍살문. 정면에서 보이는 문이 의총문이고, 오른쪽 담장 안이 숭의지 연못이다.
▲ 숭의지 연못이 연출하는 풍경은 아름답고, 차분하여서 떠나기가 싫었다.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와 벚나무 고목에서 휘날리는 벚꽃이 떠다니는 맑은 물빛이 연출하는 연못의 풍경은 너무 화사하고 차분하여서 우리는 한 동안 거기서 머물렀다. 의총문(義塚門)으로 들면 오른쪽 뜰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조헌 선생과 700명의 의병이 청주성 탈환 후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순국한 의로운 넋들을 기리고자 1603년(선조 36년)에 세운 비석이다.

 

의병장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

 

조헌과 700명의 의사가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사적을 기록한 이 빗돌은 1940년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폭파해 버렸다. 지금의 빗돌은 1970년대 성역화 사업 때 해방 뒤 모아놓은 비석 조각들로 복원한 것이다. 비문에는 조헌과 의병이 청주성을 탈환한 공적과 조헌과 700명의 의사가 전원 순국한 금산 연곤평 전투와 순절한 분들께 바치는 추모 헌사로 구성되어 있다.

▲ 의총문 주변의 반송과 돌담.
▲ 종용사로 들어가는 취의문. 문 뒤로 보이는 청기와 건물이 종용사다.
▲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와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 의병장 중봉 조헌 선생(1544~1592). 시호는 문열이다.

중봉 조헌 선생은 “조선 전기에, 공조 좌랑, 전라도 도사, 보은 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벌인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문신·학자·의병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다. 1567년 출사하여 궁중의 불사(佛寺)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1572)하게 한 이래, 1587년 정여립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고,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를 극렬히 논하다가 유배되기도 하는 등, 그는 임금에게 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왕의 진노와 유배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정명가도(征明假道)]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 문밖에서 3일간 일본 사신을 목 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중봉 조헌 선생이 태어난 경기도 김포에 세워진 선생의 동상.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김경백·전승업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세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록(선정)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 김포의 우저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순절지인 금산에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서산대사 의발 전수한 기허당 영규대사

 

임진년에 왜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조선의 강토를 짓밟을 때 미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조선의 정규군은 이에 맞섰으나 연전연패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선조 임금은 한양의 궁성을 버리고 명나라 경계에 있는 의주로 도망치듯 피난해 버리고 남은 백성들은 삽시간에 들이닥친 왜군의 총칼에 처참히 쓰러져 갔다.

 

온 백성이 왜군의 침략에 신음하던 이때, 조헌과 같은 선비와 분연히 일어서서 농민, 노비 등 다양한 계층과 합심하여 의병을 형성했다.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던 승려 가운데, 영규대사도 800명의 승군을 이끌고 왜군과 맞섰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3달 15일 만인 1592년 8월 1일 청주성 전투가 이들이 보낸 첫 승전보였다.

 

(……) 하고, 또 아뢰기를,

 

“어떤 중이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이다.’ 하고는 그 무리를 불러 모아 지팡이를 들고 왜적을 쳤다고 합니다.”

 

하고, 신점(申點)은 아뢰기를,

 

“영규(靈圭)라는 자가 있어 3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모이어 거의 8백에 이르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

 

“호성감 이주를 인견하고 고경명의 사망, 승군의 활약 등을 묻다”(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 기사 중에서

 

승리의 여세를 몰아 8월 18일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이 이끌던 의병 700명과 승병장 영규대사가 이끌던 800명의 승군이 금산 연곤평에서 왜적과 대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의병들이 죽창과 활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 이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 기허당 영규대사 진영. ⓒ 국립중앙박물관

조헌과 고경명의 의병부대는 ‘칠백의총’에 묻혔지만, 영규대사가 이끌던 800명의 승병 무덤은 보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 이후 유생과 관료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는 과정에서 공적이 왜곡되거나 승병들의 활약상이 빠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역사 속 묻힌 의승 활약 재조명 영규대사와 8백 의승’]

 

영규대사와 800명의 의승(義僧)은 칠백의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시신 수습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당시 승려들은 피지배계층이고 국방에 대한 의무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의승을 규합하는 등 전란 역사상 큰 역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약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시급하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 취의문에서 바라본 종용사.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사당으로 현종 4년(1663)에 '종용사(從容祠)'라 사액되었다.
▲ 종용사 앞의 안내판.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를 소개하고 있다.

순의비를 지나 취의문(取義門)으로 들면, 청기와를 얹은 사당 종용사가 나타난다. 애당초 사당에는 조헌 선생의 위패만 모셨으나 뒤에 영규대사와 의승 12분, 그리고 칠백 의사(의병)를 함께 제향했다. 또 칠백 의사 이외에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선생과 휘하 의병, 그리고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 선생과 무명 의사 등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영규대사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이며 속성은 박씨다. 법호(法號)는 기허(騎虛), 법명(法名)은 영규(靈圭)이다.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출가하였고, 서산대사 청허 휴정(休靜, 1520∼1604)의 법을 전해 받았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으로 승병을 조직하여 봉기했는데, 이후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봉기하였다. 선조는 청주성 전투의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내렸다. 하지만 영규는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선조는 영규의 높은 공적을 인정해 사후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직위를 하사하였다.

▲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290 번지 영규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빗돌 '영규대사비'. ⓒ 국가유산청

훗날 그의 문도인 대인(大仁)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 기슭에 영규의 영정을 봉안한 진영각과 비를 세웠다. 또 1738년 영규는 밀양 표충사에 청허 휴정,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과 함께 제향되었다. 영규대사의 묘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5번지에 있고, 인근 공주 갑사에서는 영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영규대사 대제를 개최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290번지에는 영규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빗돌 ‘영규대사비’가 있다. 비문에는 숙종 19년(1693)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비를 세우는 데 참여한 이덕윤, 유중, 각총 스님, 박경태 등의 생존연대를 참고할 때, 순조 13년(1813)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하는 비석이다.

▲ 칠백의총은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 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이라 이름하였다.
▲ 칠백의총 무덤 앞에 새로 조성한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종용사 뒤쪽 높다란 단 위에 모신 커다란 봉분이 ‘칠백의총’이다. 봉분 오른편으로 새로 조성한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가, 그 옆의 안내석에는 이런 저간의 경위를 새겨 놓았다. 칠백의총이 품은 역사는 434년 전의 빛바랜 역사지만, 그것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의 귀감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 묻힌 칠백의 고혼이 증언하는 우국의 용기와 그 단심일 터이다.

 

 

2026. 4.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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