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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샌프란시스코를 울린 3발의 총성, 일본 앞잡이를 처단하다

by 낮달2018 2026. 3. 23.

미국인 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1876~1930) 의사

▲ 장인환, 전명운의 상항 의거는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첫 의열투쟁의 시작이었다.

1908년 3월 23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항 오클랜드(Oakland)행 도선(渡船) 대합실 페리(Ferry) 빌딩 앞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주 샌프란시스코 일본 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자동차에서 내린 이는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였다.

 

전날 페어몬트호텔에서 묵은 그는 워싱턴 디시(D.C.)로 가기 위해 페리호 도선 대합실을 찾은 것이었다. 스티븐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근처에 있던 한 동양인 청년이 붕대에 숨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방아쇠가 붕대에 걸리면서 그의 리볼버는 격발 되지 않았다. 당황한 청년은 권총을 거꾸로 잡고 권총 자루로 면상을 후려쳐서 스티븐스가 차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지게 했다.

완력과 체격이 청년보다 우세했던 스티븐스가 정신을 수습하여 청년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이자, 청년은 몸을 빼내 거리 저쪽을 향해 달려갔다. 이에 스티븐스는 피를 흘리며 청년을 뒤쫓으려 했는데, 몇 발짝 안 가서 그의 등 뒤에서 권총 세 발이 발사되었다. “페리 빌딩 앞쪽 중앙 탑에서 남쪽으로 약 20야드 되는 지점”(현지 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보도)에서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긴 이도 같은 동양인이었다.

첫 번째 총알은 몸을 피하던 청년의 어깨에 맞았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몸을 관통했다. 현장에 있던 순찰 경관들이 두 청년을 체포했다. 권총을 발사하여 스티븐스를 쓰러뜨린 청년은 보석 없이 구속되었으며 저격에 실패한 앞의 청년은 병원에서 응급처치받은 뒤 공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스티븐스는 이틀 후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두 청년이 스티븐스에게 총을 쏘았지만…

▲ 상항 의거는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항 오클랜드(Oakland)행 도선 대합실 페리(Ferry) 빌딩 앞에서 벌어졌다.

저격에 실패한 청년은 서울 출신의 스물다섯 살 전명운(1884~1947), 뒤의 청년은 평양 출신의 서른세 살 장인환(1876~1930)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으로 부르기도 하는 ‘상항(桑港) 의거’*다. [관련 글 :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열다]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자음을 가지고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 말”, 즉 음역어(音譯語). 로스앤젤레스를 나성(羅城)으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항 의거는 항일 민족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의열(義烈)투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해외 거주 한인 최초의 의거로 이듬해(1909)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거로 이어졌다. 강제 합병 뒤에는 1928년 타이완에서 일본 육군 대장을 척살한 조명하(1905~1928) 의거와 도쿄와 상하이에서 수행한 이봉창(1900~1932)과 윤봉길(1908~1932) 의거로 계승되었다.

▲ 더럼 스티븐스는 1904년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 되어 일본의 조선침략에 적극 협조했다. 왼쪽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한 스티븐스.
▲ 외교 고문으로 재임할 당시, 스티븐스가 사인교(가마)를 타고 출근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처단된 스티븐스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워싱턴 주재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외교무대에 등장한 것은 갑신정변(1884)의 결과로 한성조약(1885)이 체결될 때였다. 그는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를 자문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메이지 일왕이 제정한 최초의 훈장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1904년에는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강제 체결케 하여 12월 27일 대한제국 외부(오늘날의 외교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1905),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1907) 등에 관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린 총성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강제 병탄에 골몰하고 있는 일본과 이를 묵인하고 있는 강대국 미국의 주의를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의거는 세계 주요 매체로 타전되었고 특히 샌프란시스코 언론들은 다투어 ‘은둔의 나라’에서 온 열혈 청년에 관한 기사를 이어갔다.

당시엔 서구 강대국들도 일제의 한국 병탄 논리였던 ‘한국은 근대화하기에 능력이 떨어지므로 선진 일본의 도움과 보호가 불가피하다’라는 인식을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논리에서 ‘한국에 도움을 주고 있던’ 자국인 고문이 한국 청년들에게 응징당한 사건을 통해 이들은 한일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한국 청년들의 항변과 거사를 주목해 주었다.

▲ 스티븐스가 일본의 침략적 보호를 왜곡선전한 것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 의거 후 <샌프란시스코 콜>은 의거를 실행한 두 의사를 '애국자들'이라고 지칭했다.

<샌프란시스코 콜(San Francisco Call)>은 이들을 ‘애국자들(Patriots)’이라고 지칭했으며 이들의 거사가 “샌프란시스코 코리안의 공모는 ‘성스러운 전쟁에 신명을 바쳐 모든 일본인을 근절하라’는 ‘의병(Righteous Army) 선언’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하는 등 의거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스티븐스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틀 전인 3월 21일, 일본 기선 니폰마루(日本丸)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선상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는 제목의 친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한국은 1년 전(1907) 7월 이완용이 통감 사저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1905)에 이어 이 조약으로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의 한국 병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 ‘보호’를 다음과 같이 왜곡 선전하였다.

1.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 사람 사이에 교제가 점점 친밀하며,
2.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3. 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치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시골의 농민들과 일반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아니함으로 농민들은 일본 사람을 환영한다.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등에 이 회견 내용이 보도되자 한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는 하와이 사탕 농장에 이민을 왔다가 미주 본토로 들어온 노동자와 유학생, 우국 망명자들이 한인의 권익 신장과 조국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 공동회를 개최하고 최정익·문양목·정재관·이학현 등 4명의 대표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에 보내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대표들은 다음 날 스티븐스를 찾아가 망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지만, 스티븐스는 간단히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요, 동양에 큰 행운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니 광무황제의 실덕(失德)이 크고 완고한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러시아에 빼앗겼을 것이라고 일본 정책을 도와 말하며 신문에 낸 것이 사실이니 다시 정정할 것이 없다.”

▲ 이역만리 미국에서 발생한 상항 의거는 식민지 조선이 잠들어 있지 않음을 세상에 알렸다.

분개한 한인 대표들이 스티븐스를 난타하는 등의 한 차례 승강이가 벌어진 뒤, 대표들은 호텔에 있던 사람들에게 스티븐스의 폭언과 망언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물러났다. 대표들에게 스티븐스의 망동을 전해 들은 교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분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즉각적인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가 전명운과 장인환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에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가 이듬해 본토로 이주해 온 젊은이였다. 전명운도 총대들과 전후하여 스티븐스를 만나러 호텔로 갔으나 면회가 거절되어 공동회에 돌아왔다.

전명운이 ‘내가 해치워 버리겠다’라며 나섰고, 회의장이 가득 차 앉을 자리가 없어서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장인환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어느 분이든지 총 한 자루 사주시오. 내가 그놈을 죽일 터이니”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이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에 왔는데, 장인환은 철도 공사장,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전명운은 철도 쪽에서 일하고 있었다.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면서도 장인환은 대동보국회*에, 전명운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모아 설립한 공립협회*에 각각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경, 김우제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미주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 국권 회복과 동족 상애를 목적으로 설립하여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두 사람의 단독적 거사 진행인 성공의 요인이었다

이들은 각각 스티븐스를 저격해 처단하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아무도 이들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암살 계획을 각각 따로, 단독으로 진행했는데, 그것이 조직 차원의 정교한 계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의거 후,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지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기고자 했으나 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왔으나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해 한인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배재학당 학당장, YMCA 총무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미국에서 돌아와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동양화’라는 미명 아래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에 나서 일제의 침략전쟁과 일본 정신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 수감 직후 촬영된 장인환의 머그 샷

한인사회는 상항 의거가 개인 간의 원한이나 이권 문제가 아닌, 한일간에 침략과 배일로 얽힌 갈등의 결과이므로 결속하여 장인환·전명운의 무죄 석방을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의거 당일 밤 9시 30분 한인교회에서 제2차 임시 공동회를 개최하여 법정투쟁을 대비한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재판을 돕기 위한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의거 이후 한인사회, 통합과 단결로 거족적 재판 지원

의거 전후에 꾸린 공동회는 1909년 5월까지 1년여 활동을 벌여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주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국내, 중국,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줄지어 들어온 의연금의 총액이 8,568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공립협회나 대동보국회의 1년 예산이 약 1,600~2,000달러인 것과 비겨 보면 의연금 모금 운동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통일된 활동에 자극받은 두 단체의 여성들도 합동으로 한국부인회를 설립해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장인환·전명운 의거는 재판 과정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침, 의거의 발생과 공판 진행이 미국에서 일본인 노동자 배척 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에 일어났으므로 미국인의 동정 여론을 얻기에 유리했다. 한인사회는 결속하여 한인 공동회를 개최하고, 공판투쟁으로 스티븐스는 물론,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의 각성으로 이어져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돕는 계기를 만들었다.

▲ 미국 오클랜드에서 발행된 <공립신보>(1908.3.25.)에 실린 장인환, 전명운 의사(좌우). 중앙은 1919년 장의사 석방 뒤 만난 두 사람.

일제는 두 사람이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일랜드계 미국인 변호사 세 사람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전명운은 1908년 6월 27일 증거 불충분으로 가석방되었다. 장인환은 동년 12월 23일 사형을 면한 대신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25년 금고형을 받아 샌 쿠엔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배심원들은 최소한도 거사가 애국적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걸 참작한 듯하다.

노동 이민으로 미국에 온 평양 청년 장인환

장인환은 1876년 평안남도 평양군 대동면 선교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에게 의탁하여 자랐다. 20살 때(1895년)부터는 잡화상을 경영하였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1904년 11월, 29세 때 하와이 노동 이민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와이의 코할라(Kohala)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2년 동안 일하던 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때는 1906년 7월이었다. 이주 직후 산아르도(San Ardo)에 가서 철도 공사장에서 2개월간 노동했는데, 거기서 척추부상을 입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치료받았으나 온전히 회복되지 못해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그는 농장 고용원, 식당에서 청소 잡부 등으로 일하면서 적은 임금으로 힘겹게 이국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미 본국의 미이미(美以美敎 : 감리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거리 선교에 힘쓸 만큼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창립 구성원이 되었다. 또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의거 직전에는 산호세에 있는 브라운 기숙학교에서 잡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특별한 학식이 없어 나라를 별달리 보국(報國)할 방책이 없으나 언제든지 우리나라가 일본과 독립전쟁을 개시하는 날에는 나는 반드시 칼을 차고 총을 메어 떨어지는 날 가을 풀에 말머리 행오(行伍, 행렬) 앞에서 나의 한 창자 더욱 피가 솟을 뿐이다.”

미국에 와서 조국에서 들려오는 을사늑약과 고종의 퇴위, 군대 해산 등 후 일제의 침략 만행 소식에 분개하면서 장인환은 그렇게 말했다. 살기 위해 이국땅으로 이민 온 무명의 젊은이는 조국을 위한 선택으로 10년간의 복역, 1년여에 걸친 재판 기간의 구류 생활을 합쳐서 11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했다.

▲장인환의 귀국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 자 기사. 오른쪽 사진은 석방되어 한인 동포 소녀와 찍은 사진이다.

복역 후 민족운동과 귀국, 고아원 사업에 매진

 

장인환은 10년 동안 모범수로 생활한 데다가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적극적인 가석방 운동에 힘입어 19191월 가석방됐다. 그는 복역 중 익힌 세탁과 양복 봉제 기술을 살려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소를 경영하였다.

 

또 공립협회를 이은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도 가담하여 1922년부터 1년간 부회장으로 민족운동에 힘을 보탰다. 1924년에 25년 금고형에서 10년 감형 처분이 내려져 법률적으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상항 의거로부터 16년 만이었다.

 

장인환은 19274월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관에서 발급한 귀국 여행 여권으로 평양에 귀향했다. 1904년 고국을 떠난 지 23년 만이었다. 그의 귀국 소식에 조만식 등 국내 민족운동가들이 귀국환영회를 열어주었다. 6월에는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결혼도 했다.

 

장인환은 가석방된 뒤 미주 교포에게 조선 고아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며 미주 교포 136인과 하와이 교포 653인의 기부 헌금을 받아 평북 선천읍 천목동에 큰 벽돌로 고아원을 지어 대동고아원 외국 총무로 불리었다. 그는 귀국한 뒤 선천에서 대동고아원 사업에 매달렸다.

▲ 장인환 의사가 순국한 샌프란시스코의 620 오페럴가. 안식교회 위생병원 자리(사진 가운데). 현재는 중국 식당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장인환은 일제가 경계하던 불령선인이요, ‘요시찰인이었으므로 적지 않은 제약과 탄압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결국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두고 신혼의 아내를 남겨둔 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인을 데려오려 해도 미국의 까다로운 이민조례에 막혔고, 얼마 뒤에는 어린 딸마저 잃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는 세탁업 등을 벌여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19305, 장인환은 지병으로 입원 치료 중에 3층 병실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54. 장인환은 북미 국민회에서 치른 한인 사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시 남부 교외 콜마(Colma)에 있는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3·1절에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758월에는 해외 애국지사 유해 본국 이장계획에 따라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봉안됐다.

▲ 1975년 8월에는 해외 애국지사 유해 본국 이장계획에 따라 장인환 의사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봉안됐다

 

 

2025. 03. 낮달

 



참고문헌
· 독립기념관 전시팀, 장인환 :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쏘다! 독립기념관 제241호(2008년 3월), 독립기념관, 2008.03.01.
· 홍선표, 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 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독립기념관 통권 제375호(2019년 5월), 독립기념관, 2019.05.01.
· 국가보훈처 편, 장인환 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1-2, 국가보훈부, 2008. 
· 오인환·문충한·공정자, 장인환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8집(2007년 6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06.29.
· 정재환, 이승만은 ‘스티븐스 처단’ 장인환·전명운 재판 통역을 거부했다, 뉴스톱, 2019.6.13.
· 박민영, 1908년 상항 의거가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백범학술원, 2012.
· 이달의 독립운동가 장인환, 공훈전자사료관,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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