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움과 내면적 성찰…, 역사에 맞선 저항의 시인 윤동주(1917~1945)

마지막 귀향 때 찍은 사진, ‘모국어의 위기’를 내다본 시인

그는 일본으로 떠나면서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일제는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으로 일본어를 필수 과목,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지정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였고, 1940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데 이어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1942년 5월에는 국어전해(全解) 운동과 국어 상용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모국어의 위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 하였을 것이다.
일본 유학 준비로 한 ‘창씨개명’ 부끄러워하며 쓴 시 ‘참회록’


1943년 초여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의 영문과 동기들과 함께 교토의 한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그날 우지(宇治)강 아마가세(天ケ瀬)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한 달 뒤인 7월 14일, 그는 귀향길에 오르려다 사상범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鴨川)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관련 글 : 일제, 국가보안법의 뿌리인 ‘치안유지법’ 시행]
이듬해인 1944년 3월,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는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징역 2년 형을 선고했다.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心讀)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內鮮)*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 하는 망동”(판결문)을 한 혐의였다.
* 일제가 일본과 조선을 함께 이르던 말. 내지(內地)와 조선(朝鮮)을 줄인 말이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돌연한 죽음, ‘생체실험’ 의심
윤동주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용된 뒤 고향의 동생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애틋한 사연의 엽서를 주고받고 신약성서를 읽으며 옥중생활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관련 글 : 스물일곱 윤동주, 후쿠오카 감옥에서 지다]
일제는 뇌내출혈(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학창 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한 20대 청년이 수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뒤이어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7일에는 송몽규도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윤동주의 부친과 당숙 윤영춘은 급히 그의 유해를 찾아왔다. 1942년 여름에 고향을 떠난 뒤, 3년 만에 그는 살아서가 아니라 주검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영정으로 쓴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실었던 시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自像畵)’*가 낭독되었다. 그는 용정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가족들은 묘비에 “시인 윤동주의 묘”라고 새겼다.
* 이 시는 현재 ‘우물 속의 초상화’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은 1980년대에 그의 아우 윤일주(1927~1985)와 후배 정병욱 교수의 증언으로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었다. 그리고 이는 2009년 광복절에 방송된 서울방송(SBS)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었다. [관련 글 : 윤동주는 정말 생체실험에 희생되었는가]
복역 중에 윤동주는 정기적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이는 당시 규슈(九州) 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으면서 ‘바닷물’을 실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의 주사는 결국 청년 윤동주의 목숨을 앗아갔고 3주 후에는 함께 복역 중이었던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마저도 쓰러뜨렸다.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 제국대학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은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의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바다와 독약>이다.
*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의 승무원 11명은 포로가 되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규슈 제대의 실험을 참작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이었을 것이다. 약리학자들은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시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다. 암산은 ‘신경 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을 사실로 다루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5)에는 이 암산 테스트 장면이 나온다. 이 흑백 영화는 “후쿠오카 감옥에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1천8백여 명이 사망했다”라는 자막이 흐르면서 막을 내린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설’에 머물 뿐 공적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부친과 당숙이 시신을 인수하러 간 사이에 다시 배달된 전보는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사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 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일본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은 윤동주의 죽음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추정되고 있다.
시인은 조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잊히지 않았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에 조국은 해방되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조국은 스물일곱 살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추도회가 열렸다. 그리고 1948년 1월, 마침내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간행되었다. 1941년 연전을 졸업할 때 이루지 못한 시집 발간은 7년 후 유고 시집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31편의 시를 싣고 있었던 정음사 판에 이어 1955년에 10주기에 93편의 작품을 담은 유고 시집이 간행되었다.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애로 우리 곁을 떠났지만, 윤동주는 아마 이 땅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된 듯하다. 문익환 목사의 말처럼 사람들은 <서시>를, <별 헤는 밤>과 <참회록>을 읽으면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조국만이 아니다. 그를 가두고 종내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 식민지 종주국 일본의 시민들도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교토에는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를 꾸린 사람들이 에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시비를 세웠다. 시인의 탄생 100년을 맞아 윤동주가 살아생전에 마지막 소풍을 간 우지 강가에 세운 이 시비는 이 시비는 ‘기억과 화해의 비’로 명명되었다.
그뿐 아니라 윤동주의 시를 읽고 그의 생애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임(‘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도 있다. 그들은 윤동주의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시는 아름답다. 몇 번씩 읽어도 눈물이 난다. 혼자 읽어도 그렇다…….”라고 고백한다.

윤동주를 읽으며 이처럼 느끼는 정서는 우리의 정서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자기 성찰을 그치지 않는 식민지 청년의 고결하고 따뜻한 영혼은 식민지 종주국의 국민조차 감화시킨 것일까. 한편, 일본의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그의 시를 싣고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가 쓴 수필 속에 ‘서시’ 등 3편의 시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린 부분이 실린 것이다.
요절이라고는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반복해서 맞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 이바라기 노리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정선 현대문 精選 現代文 B)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비극적인 가해와 피해의 역사가 있다. 그 시기를 정리하고 넘는 것은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기 역사 청산’이고, 일본에는 ‘전후 청산’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어도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 왜곡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재무장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 시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일본 사회는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다시 읽는다. 그가 아파했던 ‘부끄러운 이름’은 진정 그 부끄러움을 벗었던가. 겨울이 지나고 우리의 별에도 ‘봄’은 왔건만, ‘이름자 묻힌 언덕’에 ‘자랑처럼’ 풀은 진정 ‘무성한’가. 해방된 지 64년. 그러나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고단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의 시를 읽거나,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거기 각별한 울림이 있다고 느끼곤 했다. 특히 ‘별 헤는 밤’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아주 특별하다.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엄격한 시인의 태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진정성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와 그의 시가 국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것도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진정성과 고결함 때문이다. 그는 짧은 삶을 살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그는 삶과 세상의 모순에 맞서면서도 그 고통을 자신에게 물었다. 소박한 시어로 삶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되 거기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깊고 그윽한 자기 성찰을 담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그의 시의 진정성이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42년 일본에서 써서 강처중에게 우송한 시 가운데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육첩방(다다미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은 남의 나라’는 그가 처한 상황의 단적 표현이다. 육첩방이란 생활공간은 그를 옭매고 있는 구속과 부자유의 은유다.
* ‘씌어진’은 이중피동으로 잘못된 표현이다. ‘쓰인’, 또는 씐‘으로 써야 맞다.
그는 그 안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슬픈 천명’이라 말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대학에 다니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식을 습득하는 고여 있는 삶에 회의하면서 그 우울한 삶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삶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부끄러움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만으로 끝나진 않는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그는 그려내기 때문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그가 또 다른 자아와 화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인 것이다.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었던 2017년에 개봉된 영화 <동주> 덕분일까. 제작비 5억의 저예산 영화였지만 1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이 흑백 영화는 한 청년의 고뇌와 시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환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가는 것은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교(立敎)의 모임’ 회원 야요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의 말처럼 “시대의 가치관에 미혹되지 않고 긴 시야로 보편적인 가치”를 노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2년 독립 유공자를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한국문인협회에서 그의 시 정신을 기려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는 부끄러움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한 문학적 열정과 역사와 맞선 저항의 아이콘으로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기려지는 시인으로 살아 있다.
2025. 3. 낮달
참고문헌
· 김보예, 윤동주가 한 학기 만에 릿쿄대학 그만둔 사연, 오마이뉴스, 2018.11.24.
· 하성환, 강처중과 박치우…윤동주의 벗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23.3.1.
·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 SBS, 2009.8.15.
· 하야시 요코, 일본 여인들이 증언하고, 선양한, 또 추모하는 윤동주, 월간문학 통권 558호, 월간문학사, 2015.8.
· 김동수, 지지 않는 별, 항일 시인 윤동주, 독립기념관 통권 제402호, 독립기념관, 2021.8.
· 은현희·임채경, 동주를 헤아리는 밤 :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문학사상 521호, 문학사상사, 2016.03.
·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동주, 공훈전자사료관,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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