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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마지막 여름방학,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by 낮달2018 2026. 2. 15.

부끄러움과 내면적 성찰…, 역사에 맞선 저항의 시인 윤동주(1917~1945)

 

1942년 4월, 윤동주는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비롯한 보편교회주의 기독교 교파인 성공회(聖公會)에서 경영하는 미션스쿨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부친은 그가 이른바 명문대로 불리는 ‘제국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1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본 교토제국대학 입시에서 서양사학과에 붙은 송몽규와 달리 낙방하고 만 것이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함께 다닌 서울의 절친 강처중에게 6월까지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의 시를 우송했다. 이들 작품은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이었다. 강처중은 광복 후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정음사에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을 펴냈다.

 

마지막 귀향 때 찍은 사진, ‘모국어의 위기’를 내다본 시인

 

그해 여름방학 때, 윤동주는 7월부터 8월까지 2주간 고향 용정을 다녀가는데, 그게 그의 마지막 귀향이 되었다. 그때 찍었다는 사진 속에 ‘가쿠란(學蘭)’이라 불리는, 목을 채우는 깃을 세운 교복을 입은 윤동주는 해맑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한 해 전 연희전문 졸업 때 찍은 사진에서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것은, 짧게 깎은 까까머리 때문일까. 같은 시기 송몽규를 비롯한 또래의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까까머리였다.

▲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면서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일제는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으로 일본어를 필수 과목,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지정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였고, 1940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데 이어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1942년 5월에는 국어전해(全解) 운동과 국어 상용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모국어의 위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 하였을 것이다.

 

* 일제는 1942년에 들어 시행한 국어 전해(全解:모두 이해하거나 해석함) 운동과 국어 상용운동을 통해 일본어 보급에 나섰다. 여기서 국어란 물론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1942년 10월 도쿄를 떠나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릿쿄대학에서 1학기만 하고 같은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으로 간 것은 대학의 교련 수업을 거부한 일 때문이었다. 릿쿄대학에서는 매주 1시간씩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남학생들은 머리를 깎아야 했다.

그는 교련 수업에 교련복을 입지 않고 참가한 일이 있었고, 결국 교련 수업을 시행하지 않는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이었다. 도시샤대는 그가 평소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1902~1950)이 다닌 학교이기도 했고, 교토에는 송몽규가 교토 제대에 다니고 있었다.

 

간도에서 태어난 이주민 3세 윤동주

 

윤동주는 젠다오 성(間島省)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이주민 3세다. 19세기 후반에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에서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윤동주는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했던 명동소학교에서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문익환(1918~1994)과 같이 공부했다.

 

소학교를 졸업할 때 그는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선물한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받았고, 송몽규와 함께 인근 중국인 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해 1년간 수학했다. 그 후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고,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해 숭실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이 활자로 실렸다. 그러나 이듬해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했다.

 

윤동주가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지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와 ‘빗자루’(12월호)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1936년이다. 이듬해에도 그는 같은 잡지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1월호), ‘무얼 먹고 사나’(3월호)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된 백석 시집 <사슴>을 구할 수 없자, 그는 도서관에서 온종일 걸려 정자로 베껴서 소장했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문학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짐작게 하는 일화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1939년 연전 2학년 때 <조선일보>와 <소년>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사랑받는 ‘별 헤는 밤’과 ‘서시’가 쓰인 게 이 무렵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이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1941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유학 준비로 한 ‘창씨개명’ 부끄러워하며 쓴 시 ‘참회록’

 

1942년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준비할 때다. 유학에는 창씨개명이 필수였으므로 원서 제출 하루 전까지 미루다 결국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가 되었는데 그는 이를 두고두고 부끄러워하였다.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 시 ‘참회록’은 이때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고백한 작품이다.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 시 ‘참회록’ 중에서

▲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의 영면 50주기에 도시샤 대학에서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3월, 일제가 개정 병역법을 시행하면서 조선에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징병이 현실로 다가왔다.

 

*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일본제국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 ‘불령(不逞)’은 ‘불만이나 원한을 품다’, ‘난을 일으킨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1943년 초여름, 윤동주가 일본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친구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 한 달 뒤 그는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3년 초여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의 영문과 동기들과 함께 교토의 한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그날 우지(宇治)강 아마가세(天ケ瀬)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한 달 뒤인 7월 14일, 그는 귀향길에 오르려다 사상범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鴨川)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관련 글 : 일제, 국가보안법의 뿌리인 치안유지법시행]

 

이듬해인 1944년 3월,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는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징역 2년 형을 선고했다.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心讀)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內鮮)*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 하는 망동”(판결문)을 한 혐의였다.

 

* 일제가 일본과 조선을 함께 이르던 말. 내지(內地)와 조선(朝鮮)을 줄인 말이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돌연한 죽음, ‘생체실험’ 의심

 

윤동주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용된 뒤 고향의 동생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애틋한 사연의 엽서를 주고받고 신약성서를 읽으며 옥중생활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관련 글 : 스물일곱 윤동주, 후쿠오카 감옥에서 지다]

 

일제는 뇌내출혈(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학창 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한 20대 청년이 수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뒤이어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7일에는 송몽규도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윤동주의 부친과 당숙 윤영춘은 급히 그의 유해를 찾아왔다. 1942년 여름에 고향을 떠난 뒤, 3년 만에 그는 살아서가 아니라 주검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영정으로 쓴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실었던 시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自像畵)’*가 낭독되었다. 그는 용정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가족들은 묘비에 “시인 윤동주의 묘”라고 새겼다.

 

* 이 시는 현재 ‘우물 속의 초상화’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 연희전문의 후배로 그의 생체실험 희생 의혹을 제기한 정병욱 교사와 함께.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은 1980년대에 그의 아우 윤일주(1927~1985)와 후배 정병욱 교수의 증언으로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었다. 그리고 이는 2009년 광복절에 방송된 서울방송(SBS)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었다. [관련 글 : 윤동주는 정말 생체실험에 희생되었는가]

 

복역 중에 윤동주는 정기적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이는 당시 규슈(九州) 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으면서 ‘바닷물’을 실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 출판된 <바다와 독약>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책.

그 의문의 주사는 결국 청년 윤동주의 목숨을 앗아갔고 3주 후에는 함께 복역 중이었던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마저도 쓰러뜨렸다.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 제국대학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은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의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바다와 독약>이다.

 

*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의 승무원 11명은 포로가 되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규슈 제대의 실험을 참작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이었을 것이다. 약리학자들은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시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다. 암산은 ‘신경 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라는 것이다.

▲ 이준익 감독의 영화  < 동주 >(2015)에도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을 사실로 다루고 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을 사실로 다루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5)에는 이 암산 테스트 장면이 나온다. 이 흑백 영화는 “후쿠오카 감옥에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1천8백여 명이 사망했다”라는 자막이 흐르면서 막을 내린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설’에 머물 뿐 공적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부친과 당숙이 시신을 인수하러 간 사이에 다시 배달된 전보는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사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 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일본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은 윤동주의 죽음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추정되고 있다.

 

시인은 조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잊히지 않았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에 조국은 해방되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조국은 스물일곱 살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추도회가 열렸다. 그리고 1948년 1월, 마침내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간행되었다. 1941년 연전을 졸업할 때 이루지 못한 시집 발간은 7년 후 유고 시집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31편의 시를 싣고 있었던 정음사 판에 이어 1955년에 10주기에 93편의 작품을 담은 유고 시집이 간행되었다.

▲ 여러 차례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그의 육필원고.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애로 우리 곁을 떠났지만, 윤동주는 아마 이 땅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된 듯하다. 문익환 목사의 말처럼 사람들은 <서시>를, <별 헤는 밤>과 <참회록>을 읽으면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조국만이 아니다. 그를 가두고 종내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 식민지 종주국 일본의 시민들도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교토에는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를 꾸린 사람들이 에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시비를 세웠다. 시인의 탄생 100년을 맞아 윤동주가 살아생전에 마지막 소풍을 간 우지 강가에 세운 이 시비는 이 시비는 ‘기억과 화해의 비’로 명명되었다.

 

그뿐 아니라 윤동주의 시를 읽고 그의 생애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임(‘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도 있다. 그들은 윤동주의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시는 아름답다. 몇 번씩 읽어도 눈물이 난다. 혼자 읽어도 그렇다…….”라고 고백한다.

 

▲ 윤동주를 일본에 널리 알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중앙일보 사진)

윤동주를 읽으며 이처럼 느끼는 정서는 우리의 정서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자기 성찰을 그치지 않는 식민지 청년의 고결하고 따뜻한 영혼은 식민지 종주국의 국민조차 감화시킨 것일까. 한편, 일본의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그의 시를 싣고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가 쓴 수필 속에 ‘서시’ 등 3편의 시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린 부분이 실린 것이다.

 

요절이라고는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반복해서 맞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 이바라기 노리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정선 현대문 精選 現代文 B)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비극적인 가해와 피해의 역사가 있다. 그 시기를 정리하고 넘는 것은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기 역사 청산’이고, 일본에는 ‘전후 청산’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어도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 왜곡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재무장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 시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일본 사회는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다시 읽는다. 그가 아파했던 ‘부끄러운 이름’은 진정 그 부끄러움을 벗었던가. 겨울이 지나고 우리의 별에도 ‘봄’은 왔건만, ‘이름자 묻힌 언덕’에 ‘자랑처럼’ 풀은 진정 ‘무성한’가. 해방된 지 64년. 그러나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고단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의 시를 읽거나,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거기 각별한 울림이 있다고 느끼곤 했다. 특히 ‘별 헤는 밤’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아주 특별하다.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엄격한 시인의 태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진정성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이다.

▲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뒤쪽 건물은 윤동주가 거주했던 기숙사(핀슨관)로 그의 시와 원고가 전시된 기념관이기도 하다.

그와 그의 시가 국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것도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진정성과 고결함 때문이다. 그는 짧은 삶을 살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그는 삶과 세상의 모순에 맞서면서도 그 고통을 자신에게 물었다. 소박한 시어로 삶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되 거기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깊고 그윽한 자기 성찰을 담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그의 시의 진정성이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42년 일본에서 써서 강처중에게 우송한 시 가운데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육첩방(다다미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은 남의 나라’는 그가 처한 상황의 단적 표현이다. 육첩방이란 생활공간은 그를 옭매고 있는 구속과 부자유의 은유다.

 

* ‘씌어진’은 이중피동으로 잘못된 표현이다. ‘쓰인’, 또는 씐‘으로 써야 맞다.

 

그는 그 안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슬픈 천명’이라 말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대학에 다니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식을 습득하는 고여 있는 삶에 회의하면서 그 우울한 삶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삶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부끄러움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만으로 끝나진 않는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그는 그려내기 때문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그가 또 다른 자아와 화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인 것이다.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었던 2017년에 개봉된 영화 <동주> 덕분일까. 제작비 5억의 저예산 영화였지만 1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이 흑백 영화는 한 청년의 고뇌와 시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환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가는 것은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교(立敎)의 모임’ 회원 야요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의 말처럼 “시대의 가치관에 미혹되지 않고 긴 시야로 보편적인 가치”를 노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2년 독립 유공자를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한국문인협회에서 그의 시 정신을 기려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는 부끄러움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한 문학적 열정과 역사와 맞선 저항의 아이콘으로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기려지는 시인으로 살아 있다.

 

 

 

2025. 3. 낮달

 

참고문헌

· 김보예, 윤동주가 한 학기 만에 릿쿄대학 그만둔 사연, 오마이뉴스, 2018.11.24.

· 하성환, 강처중과 박치우윤동주의 벗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23.3.1.

·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 SBS, 2009.8.15.

· 하야시 요코, 일본 여인들이 증언하고, 선양한, 또 추모하는 윤동주, 월간문학 통권 558, 월간문학사, 2015.8.

· 김동수, 지지 않는 별, 항일 시인 윤동주, 독립기념관 통권 제402, 독립기념관, 2021.8.

· 은현희·임채경, 동주를 헤아리는 밤 :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문학사상 521, 문학사상사, 2016.03.

·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동주, 공훈전자사료관,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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