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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남긴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의 사진은 뒷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안중근의 원본 인물사진은 3장, 모두 1909년의 이미지다. 하얼빈 의거 직후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사받은 뤼순(旅順)의 러시아공사관에서 찍힌 이 사진과 뤼순 감옥 수감 시절에 찍은 초상 사진과 순국 직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옷으로 갈아입고 찍은 전신사진이 그것이다.
사진은 폴로코트로 추정되는 외투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인데 의거 당시와 같은 차림이다. 갓 서른, 그는 다소간 해쓱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하얼빈, 1909년 10월 26일
1909년 10월 26일, 그가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권총으로 발사한 세 발의 탄환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쓰러뜨림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야욕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의 의거가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전쟁임을 제시했다.
안중근은 1907년 8월 서울에서 군대 해산의 참담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충격을 받아 곧장 망명길에 올랐다. 그간 국내에서 학교 경영 등 전개해 온 애국계몽운동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망명을 결행하기 이전에 의병 투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는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연해주의 한인 마을 연추(煙秋)에서 결성된 무장투쟁 중심의 구국운동 단체 ‘동의회(同義會)’*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당시 노령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 최재형(1858~1920)의 지원을 받아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 러시아 공사 이범진(1852~1910)이 주도해 군자금 1만 루블과 함께 아들 이위종(1887~?)을 보내 조직한 구국운동 단체. 회장엔 이위종, 최재형을 총재로 선출했다.
안중근은 1908년 여름에 동의회의 의병부대 우영장(右營將)으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홍의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가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한 일본군 포로 때문에 부대 위치가 알려지면서 뒤이은 회령 영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의병부대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은 1836년에 헨리 휘튼이 펴낸 국제법 책으로 19세기 중 후반께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을 지칭하는 일반적 명칭으로 쓰였다.

1909년 2월 말, 연추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조직한 일심회의 핵심 12인은 손가락 하나씩을 끊고 동의 단지(斷指)동맹을 맺었다. 이는 당장에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그 뜻으로 때를 기다려 다시 창의(倡義)하기를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그 뒤, 그는 주로 연추 지방에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교육과 강연 활동을 전개하면서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08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 단체인 한국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한 교민 단체 신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해조신문(海朝新聞)>이 운영난으로 폐간된 뒤 바로 나왔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안중근이 이토 처단할 거사를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였다. 그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된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 완성자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을 실천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완성한 인물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이토는 1885년 일본에 처음 내각제도 만들어지자 45세로 초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중국의 리훙장(李鴻章)과 다투던 그는 청일전쟁 강화협상인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최종 승자가 되었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한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1905년 한국에 파견된 이토는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대신 다섯 명(을사오적)의 서명을 받아내 을사늑약을 마무리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토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초대 통감이 되어 이후 대한제국 접수 공작을 본격화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이토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에 따라 각 부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정치’로 한국의 국정을 장악했다. 이후 군대 해산과 경찰권 위임 등으로 대한제국은 거의 껍데기만 남은 상태가 되었으니 이러한 대한제국의 침탈을 주도한 자가 바로 이토였다. 그는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로서 이미 한국 독립운동가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주도권을 노리는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었던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그러나 양국은 여전히 만주와 한반도의 이해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이어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은 것은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와 한국은 물론 만주와 몽골 지배를 두고 러시아와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만주를 나누어 가져,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포함한 남만주는 일본이, 동청철도*를 중심으로 북만주는 러시아 영역이었다. 하얼빈은 바로 북만주의 중심 도시로 20세기 초 극동 아시아에서 국제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강화조약.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만저우리(만주리)와 쑤이펀허(수분하), 그리고 다롄을 잇는 철도 노선
안중근이 한 해 전 국내 진공 전투를 같이한 우덕순(1876~1950, 1962·독립장)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중도에 중국과의 접경 도시인 포그라니치니에서 동지의 아들 유동하(1892~1918, 1988·독립장)를 통역으로 동반하여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하얼빈에 닿자, 안중근은 열일곱 살 유동하에게 이토 저격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23일 세 사람은 사진을 찾아 의거 기념사진을 찍고 거사를 같이할 동지로 조도선(1879~?, 1962·독립장)을 맞아들였다. 이토 처단 계획은 2단계로 세워졌다. 1차로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 가장 가까운 남청 열차가 교차하는 정거장인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에서 대기하다가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역에 정지하면 기차에 뛰어올라 이토를 공격하고, 만약 이것이 실패하면 2차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그리고 ‘코레아 우라’
애당초 25일에 하얼빈에 도착하기로 했던 이토는 예정보다 하루 늦게 닿았다. 26일 오전 7시께 하얼빈역에 나간 안중근은 소년 유동하를 타일러 돌려보내고 단신으로 러시아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이토 일행을 기다렸다.
차이자거우의 거사 계획은 불발했다. 10월 24일 차이자거우에 우덕순, 조도선 두 동지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작별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것을 본 러시아 경비병은 이를 수상히 여겼다. 이에 경비병은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우덕순, 조도선 등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잠가버린 것이었다.

오전 9시에 특별 열차가 역 구내에 멈춰 섰고, 대기 중이던 코콥초프가 수행원과 함께 기내에 들어가 이토를 영접했다. 약 20분 뒤에 이토가 러시아 관원들의 호위 속에 각국 영사들이 늘어선 데로 걸어 나왔다.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안중근은 이토가 10여 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이토를 향해 발사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무도한 침략을 단죄하는 정의의 일격이었다.
첫 번째 탄환은 이토의 가슴을 명중했고, 두 번째 탄환도 그의 흉부를 맞혔다. 제3탄이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몰랐던 안중근은 뒤따르던 일본인들에게 네 발을 더 쏘았다. 이토를 수행한 하얼빈 일본 총영사와 궁내부 비서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이사 2명 등이 중경상을 입고 쓰러졌다.
* 존 브라우닝이 만든 권총 M1900은 역사상 최초의 자동권총으로 당시에 주로 쓰였던 리볼버(육혈포)에 비해 파괴력은 다소 약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손쉽게 여러 표적을 향해 연발 사격할 수 있었다. 반동도 리볼버보다 작아 한 손으로도 정확히 표적을 겨냥해 사격할 수 있다. 7발이 모두 명중한 것은 그의 사격 실력과 함께 총의 특성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이토가 쓰러진 걸 확인하고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 헌병 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때를 안중근은 9시 30분으로 기억했다.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20여 분 만에 절명했다.
체포된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쪽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름을 안응칠(安應七), 나이는 서른하나,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신분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수괴를 처단 응징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그날 밤, 일본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고, 우덕순·조도선·유동하 외 11명도 관련자로 체포·구금됐다.
* 대한 의군은 그가 우영장으로 이끈 동의회의 의병부대를 가리키는 듯하나 이와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 후, 안중근은 뤼순에서 한 달여 동안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고 일제는 그를 극형에 처하기로 했다. 일제는 강제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시기에 안중근 거사의 영향을 저어하여 외무대신이 ‘중형 징벌’ 방침을 전달하고, 뤼순의 고등법원장을 본국으로 불러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 개정을 다짐받기까지 했다.
안중근의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마나베 주조(眞鍋十藏) 재판장의 단독심리로 열렸다. 변호는 허락됐지만, 국내에서 모친 등이 보낸 한국인 변호사와 연해주에서 파견한 러시아, 영국 등 외국인 변호사는 모두 불허하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공판에서 범행 후 자살하려 했는가 하는 물음에 의거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유지에 있으며, 이토 하나 죽이고 자살한다는 건 생각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자신이 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하고 있으므로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재판소에서 재판받을 의무가 없음을 밝혔다.
* 안중근이 8연발 브라우닝 권총에서 1발을 남긴 이유를 자결용으로 해석했으나, 공판 과정에서 “이토가 이미 쓰러져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법정 투쟁

그는 이후 당당한 논리로 재판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한국 ‘보호’를 빙자하면서 병합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병탄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는 또 이토의 죄상을 ▲ 명성황후 살해 ▲ 1905년 을사늑약 강제 ▲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강제 ▲ 고종 퇴위 강제 ▲ 군대 해산 ▲ 의병 등 양민 살해 등 15개로 낱낱이 제시하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재판을 통해 일제의 침략 상황을 세상에 알렸고, 일제는 공판을 6회로 마감했다. 재판 이후 영국 신문 <더 그래픽>은 기사(1910.4.16.)에서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으며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보도했다.
1910년 2월 14일에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는 일제의 요구대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는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였다. 안중근은 고등법원으로 상고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친의 권고와 안중근의 결연한 의지였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1910년 3월 15일에 완성했지만, 1910년 3월에 쓰기 시작한 동양 평화 실현을 위한 논책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는 이 논책을 완성하려고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3월 25일로 예정된 사형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일제는 약속을 어기고 형의 집행에 들어갔다.
안중근이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목구장 뮈텔(Mutel, 1854~1933)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에게 사제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聖)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사형 선고, 안중근의 작별 인사
안중근은 순국 전에 가족에게 장남 분도를 사제로 기르라고 부탁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조선 가톨릭교회의 프랑스인 주교 뮈텔은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라고 하며 안중근의 종부성사마저 거부했다.* 뮈텔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때 무려 43년 동안 한국 가톨릭의 수장이었던 인물로 안중근의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하고,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는 사실을 일제에 밀고(1911년 1월11일 일기)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었다.
* 종부성사(終傅聖事)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행하는 성사로, 의식이 있을 때 신부를 청하여 종부성사를 받는데, 오늘날에는 명칭이 바뀌어 병자성사(病者聖事)라고 한다. 안중근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공식 복권된 것은 1993년이었다. 2010년에는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순국 100주년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러나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안중근을 면회한 뒤 고해성사(3.9.)와 종부성사(3.10.)를 집행한 이는 황해도에서 안중근과 함께 선교했던 황해도 신천 본당 주임 신부인 프랑스인 니콜라 조제프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한국명 홍석구, 1860~1936)이었다. 이에 뮈텔은 빌렘 신부에게 사제로 활동할 수 없게 ‘성사 집행 중지 처분’을 내려 문책했다.(뒤에 빌렘은 교황청 법원에 항소, ‘특별상황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3월 25일, 통감부의 요청으로 사형 집행이 연기됐다. 25일은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태어난 건원절이었고, 27일은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면회 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했고 장남 분도를 가톨릭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했다.
3월 26일은 토요일이었다. 그의 요청으로 고국의 어머니가 주문해 지은 명주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은 의연했다.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당신의 당부를 전하는 어머니의 전언은 애틋하지만 짤막했다. 신실한 천주교인으로 어머니는 아들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을 이해하고 있었고, 살아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 것이었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지금까지 전해져 온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는 실제로 없었고 짧은 전언만이 있었다. ‘너의 죽음이 조선인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다’, ‘항소해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수의를 지어 보내니 입고 가라’는 등의 편지 내용도 상당 부분 조작된 것이었음이 2023년 도진순 교수의 논문으로 밝혀졌다.
안중근도 마지막으로 만난 동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 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반장(返葬)’은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
1910년 3월 26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1909년 10월 26일)한 지 꼭 다섯 달 만이요,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10년 2월 14일)받은 지 한 달 열흘째였다. 안중근의 사형 집행 현장에 참석한 사람은 미조부치이(溝淵) 검찰관과 구리하라(栗原) 전옥(典獄, 교도소장)이었다. 오전 10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1분 후 재판 과정에서 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숨이 끊어졌다. 향년 32.
그가 순국한 뒤, 둘째 동생인 안정근이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일본 당국은 “유해는 다른 사형수와 동일하게 감옥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라며 요청을 거부했다.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간수가 감옥 뒷산에 매장하였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 투사들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백범은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삼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하면서 안중근의 ‘허묘(虛墓)’를 만들었다. 허묘는 바로 안 의사의 시신을 반드시 찾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백범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에 흉탄에 스러졌다.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의 의열(義烈)에 대한 기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세계로 타전되면서 각국에서 의거 경위에 대한 사실 보도와 아울러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논평기사가 상당 기간 이어졌다. 그중에 관계국인 한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에 각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륙침략에 공을 들여오던 일제는 이토의 피살 소식에 경악하였고, 일제와 한만 침략 정책을 협상하려던 러시아는 안중근과 우덕순 등 관련 인물을 체포하여 일제에 인도하였으나,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 쾌거를 매우 기꺼워하였다.

특히 한국과 중국 지도자와 문인 등은 안중근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격찬하면서 양국 항일 공동 전선의 계기로 삼으려 하였다. 다투어 이어진 안중근의 의열(義烈)을 기리는 시문은 중국 국가주석 위안스카이(袁世凱), 뒷날 신해혁명의 지도자로 떠오른 쑨원(孫文), 중국의 저명 학자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참여했고, 혁명가 장빙린(章炳麟)은 ‘안중근 비명(碑銘)’을 지어 그의 고향 해주에 세우려고까지 하였다.
저명인사의 찬사도 이어져 사상가, 혁명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도 아니요, 세계의 안중근’이라고 기렸고, 중국의 대표적 문인이자 아나키스트 바진(巴金)도 ‘안중근은 나의 젊은 날의 영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전의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레닌은 그의 저술 <제국주의에 대한 노트>에서 “일본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한국 민족의 용맹성과 이토 히로부미 살해 사건을 20세기 초반기의 중요한 대사건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중국에 망명한 유학자 김택영과 독립운동가 예관 신규식(1879~1922)은 시문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안중근 의거를 숭고한 의열로 기렸다. 그에 대한 기림은 그의 순국 뒤 국내는 물론, 중국과 연해주, 미주 등지에서 안중근 전기 간행으로 이어졌다. 서간도에서는 양명학자 이건승, 상하이에서는 역사학자 박은식, 연해주에서는 국학자 계봉우, 미주에서는 홍언이 각각 <안중근 전>을 펴낸 것이다.
2010년에는 안중근 연구자 윤병석 교수가 중국학자 예톈니(葉天倪)가 1914년경 상하이에서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80여 쪽 분량의 평전 <안중근 전>을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예텐니는 이 평전에서 안중근에게 ‘열사’나 ‘의민’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는 다른 애국지사들과의 구분이 힘들다며 ‘세계 위인’으로 칭하고 있다고 한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 크게 환영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친일파들의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고종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해야 하고 주범·공모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실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일본에 조문단을 파견하였고, 일진회에서 꾸린 ‘국민 사죄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국내의 민중뿐 아니라 나라 밖에서도 안중근 의거에 대한 기림과 전기 발간 등의 형태로 이어진 것은 안중근의 의거가 단순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일회적 저항에 그치지 않고, 나라 사랑을 바탕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고자 한 인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미완성 <동양평화론>과 일본에서의 추모
그가 남긴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은 ▲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을 영세중립 지대로 정하고 분쟁을 방지할 상설위원회 운영 ▲ 한·중·일 3개국이 재정 출자한 공동은행 설립과 공동화폐 발행 ▲ 동북아 공동 안보 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 창설 등을 다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오늘날 유럽 연합(EU)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등으로 그 의미를 새롭게 환기하고 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143일 동안 수감 중 자기 삶과 사상을 밝히는 <안응칠 역사>와 그리고 뛰어난 글씨로 56폭의 유묵(遺墨)을 남겼는데 대부분은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안중근의 유묵들은 모두 휘호 낙관 부분에 한자로 ‘경술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라 쓰고, 반드시 단지동맹 때 약지를 자른 왼손 장인(掌印)을 찍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옥중 유묵은 유명인의 글씨에 따르는 위작 시비가 없다. 또 유묵은 문구의 내용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순국 직전에 감옥의 간수로 있던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의 ‘爲國獻身(위국헌신) 軍人本分(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써주었다. 이 유묵 한 점은 치바 도시치(1885~1934)의 삶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엔 자기 나라의 위인으로 기려지는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을 증오하였으나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신념과 높은 인품에 감화되었다. 두 사람은 한국 독립 투사와 일본군, 사형수와 간수, 가톨릭과 불교라는 몇 가지 장벽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안 의사 유묵 26점은 보물로 지정
안중근의 죽음을 배웅한 치바는 전역한 뒤, 고향인 미야기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49살로 죽을 때까지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며 그 명복을 빌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안 의사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의 유족들은 그의 유언을 지켰고, 1979년 안 의사 탄신 백 주년에 맞춰 그동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해 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이 유묵은 현재 다른 유묵 25점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미야기현(宮城県) 구리하라시(栗原市)에 있는 사찰 다이린지(大林寺)는 치바 내외가 생전에 다니던 절이다. 다이린지의 묘지에는 치바 내외가 묻혀 있고 치바와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 경내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 새긴 안중근 의사 유묵비도 세워져 있다.
주지 사이토 타이겐(斉藤泰彦)은 생전에 치바를 통해 ‘안 의사의 인격과 동양 평화에 대한 이념’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매년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안 의사 추모 행사를 35년째 열고 있다. 또 해마다 안 의사가 처형당한 3월 26일이면 추모식에 참배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안중근이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1천 엔(円) 지폐의 도안 인물로 오른, 일본 근대화를 이루어낸 위인으로 기려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세기가 지나도록 그에 대한 추모는 이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인품과 신념에 대한 공감이 국적을 넘은 결과일 것이다.



안 의사 집안에서 모두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
안중근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아우 정근(1885~1949, 1987·독립장)과 공근(1889~1940, 1995·독립장) 11명의 독립 유공자를 냈다.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임정에서 일했으며, 그의 차녀 미생(1919~2008, 2022·건국포장)은 백범의 비서로 활동하다 백범의 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공근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을 지냈지만, 1940년 행방불명되었다. 실제 그의 집안에는 모두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2024년에 하얼빈 의거는 115주년을 맞았지만, 백범이 봉환하고자 했던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 삼 의사 묘역에 있는 안중근의 허묘는 언제쯤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2025. 0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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