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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제3의 길, 대공주의(大公主義)의 실천으로 펼친 민족운동

by 낮달2018 2026.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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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1878~1938), 그는 온건한 개량주의자가 아니라 ‘독립전쟁’을 기획한 혁명가였다

 

안창호가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02년 10월,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그는 미국인 가정의 하우스보이 일을 하면서 현지의 공립소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다. 교육학을 공부하여 조국으로 돌아가 교육사업을 펴겠다는 그의 처음 뜻은 현지 한인들의 생활 때문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인삼 상인과 유학생 등 2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인삼 상인들은 1899년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인삼을 팔기 위해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온 이들이었고, 유학생들은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이후 도미한 사람들이었다. 상인들은 행상 구역과 판매가격 경쟁으로 서로 다투었고, 유학생들과는 계층적 대립으로 알력이 심했다.

 

한인 사이 갈등과 대립을 넘고자 만든 조직 친목회와 공립협회

▲ 공립협회 창립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뒷줄 왼쪽부터 임준기, 정재관.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고 친목을 꾀하며 경제적인 도움도 줄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한 상황에서 안창호는 1903년 이대위, 박영순 등 9명의 발기로 ‘친목회’를 결성했다. 그는 동포들의 단합에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노동 주선에 힘썼다.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왔다가 계약기간이 끝나고 대책도 없이 본토로 들어오는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하면서 그는 학업에 대한 뜻을 접은 것이다. 노동 주선은 물론 맨손으로 할 수 없다. 사무실과 전화, 인력 등 적잖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활동을 지켜본 한 미국인의 도움을 받아 노동주선소를 열 수 있었다.

 

친목회는 1904년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공립협회’를 결성했지만, 이는 친목회의 연장일 뿐, 제대로 된 조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리버사이드 공립협회는 한인들의 취업을 알선하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데 주력했다. 한인들이 늘어나자, 야학을 개설하고 영어, 성경, 역사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LA 도심에서 80㎞ 떨어진 소도시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에는 1905년 안창호가 미국에 세운 최초의 한인촌인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가 있다. 코리아타운의 효시로 당시 ‘도산 공화국’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약 100명이 함께 거주했던 곳으로 20여 채의 가옥이 판자촌을 형성했다고 한다.

 

러일전쟁(1905) 이후 일제가 한국의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자 1905년 4월 안창호와 송석준, 정재관, 임준기, 이강, 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 공립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를 통합, 발전시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한 공립협회를 설립하였다.

 

스물여덟에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당시 미국 교민 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하여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된 안창호는 1907년 귀국할 때까지 2년이 채 되지 않는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 건물의 회관을 보유하고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해 미국 본토에 있던 대동보국회, 공제회, 동맹신흥회 등 4개 단체 중에서 미주 한인사회를 선도했다.

 

*<공립신보>는 1905년 11월 22일 창간된 순 국문판 신문으로 공립협회의 기관지. 사장은 안창호, 주필은 송석준(1990·애국장).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장인환·전명운 의거로 피살된 스티븐스(Stevens,D.W.) 사건을 크게 보도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했다. 미국 본토 이외 지역의 배포를 위하여 하와이에 4개소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1개 소의 보급소를 두었다. 본국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32개 보급소를 통하여 국내 독자들에게 배포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로로 길쭉한 타원형의 사진은 공립협회 창립 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앞줄 맨 오른쪽의 안창호는 스물여덟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반듯한 이마는 장년의 초상에서도 확인되는 모습이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모습은 대개 1920년대 사진, 콧수염을 기른, 근엄하고 완벽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기억된다.

 

중고교 도덕이나 역사, 또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안창호의 모습도 저 중년의 모습이다. 그런데, 스물여덟, 안창호는 중년의 모습에서 근엄함을 빼고 반듯한 이미지만 남은 푸릇한 인상이다. 앳되어 보이지만, 사소한 규칙 하나도 어기지 않을 듯한 모범생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02년 10월부터 1907년 1월까지 4년여 처음 미국에 머물던 20대 후반의 첫 체류 시기에 그는 민족운동가로서뿐 아니라 빼어난 ‘조직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항(桑港) 친목회와 리버사이드 공립협회에 이은 공립협회의 창립은 그가 독립운동가로서 타고난 조직 능력을 지닌 일꾼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등 그가 머물며 활동한 한인사회마다 조직을 갖추고, 통일을 지향해 나갔다. 항일운동과 함께 최초의 정치 운동 기관을 표방한 공립협회의 창립으로 그는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안창호는 여기서 이강(1962·독립장)과 정재관(1990·애국장), 임준기(2016·애족장)와 같은 평생 동지를 만났다. 그뿐 아니라, 공립협회의 설립으로 민족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본 동지들이 안창호가 본격적인 항일 민족운동의 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뒷날 리버사이드의 한인 거주지를 방문한 강명화*가 이곳을 ‘안도산 공화국’이라고 예찬했던 게 절대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이 같은 성취는 안창호가 어디서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조직해 내는 활동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했다.

 

*강명화(1868~1933, 2012·애족장)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초기 이민자로 그의 집안은 본인, 아들, 사위 등 총 8명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낸 미주 지역 최대 독립운동 명문가다.

▲ 1925년 당시 미국에 머물던 김마리아와 차경신이 상하이에서 돌아온 안창호를 환영하며 찍은 거로 추정되는 사진.

 또 한 장의 사진은 1925년 당시 미국에 머물던 김마리아(1891~1944)와 차경신(1892~1978)이 상하이에서 돌아온 안창호를 환영하며 찍은 거로 추정된다. 당시 김마리아는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미국으로 와 미주리주 파크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차경신은 그 전해에 미국으로 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 주일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약하고 있을 때다. 김마리아와 차경신은 각각 서른넷, 서른셋이고, 안창호는 마흔일곱, 이제 중년티가 역력하지만, 여전히 그는 단정한 모습이다. 상하이에서 김마리아의 중매를 서려고 애썼던 안창호니 김마리아나 차경신에게 그는 의지할 수 있는 동포요, 선배 독립운동가였을 것이다.

 

구세학당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에서 19세 청년 ‘계몽 인사’로 등단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아호인 ‘도산(島山)’은 고향인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한학을 배우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밀러학당, 통칭 언드우드학당)에 입학, 3년간 수학하며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서구 문물과 만나게 되었다.

 

1897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 조직을 맡았다.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청년 웅변가로 명성을 알리면서 열아홉 청년 도산은 계몽 인사로 등단했다.

 

도산은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나,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 운동을 펼쳤다.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와 탄포리교회를 세웠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4년여 머물며 공립협회를 설립한 안창호는 을사늑약 체결(1905) 소식을 듣고 이듬해 1906년에 귀국했고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1907)했다. ‘신민’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을 시행하는 자유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독립협회의 목표가 입헌군주국이었음을 비기면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었다. 비밀 결사였지만, 1910년께 회원이 약 800명에 이르렀으니, 이는 당시의 웬만한 애국 계몽 운동가들을 거의 망라한 숫자였다.

▲ 1899년에 도산이 평남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세운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의 교사와 학생들.
▲ 신민회가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벌인 평양 대성학교와 학생들. ⓒ 도산안창호기념관

신민회는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 구국운동, 각종 계몽 강연, 기관지로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를 활용하는 잡지·서적 출판 운동, 평양자기(磁器)회사, 안악의 엽연초 공장 설립 등의 민족 산업 진흥 운동과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까지 등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민족주의 및 기독교계 항일 세력을 통제하고자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105인 사건의 와중에 조직이 드러나면서 일제는 신민회를 해산하였다.

 

안창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1909)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체포되었다가 1910년 4월 중국인 소금 상선을 타고 중국의 웨이하이로 탈출하였다. 칭다오(靑島)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치면서 현지 망명자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논란 끝에 만주의 길림성 밀산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1911년 안창호는 다시 북만주로 건너가 밀산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웠지만, 비용 확보 등이 여의치 못하여 계획을 바꾸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공립협회, 국민회 거쳐 ‘대한인국민회’로 개편 미주 최대의 통일조직이 되다

 

한편, 안창호가 설립했던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미국 본토와 하와이 한인 단체를 통합하여 ‘국민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1910년 5월에는 국민회가 북미 대동보국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미주 최대의 한인 통일조직이었다. 1911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일에 전념했고,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안창호는 경제적 실력과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1912년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과 1913년 5월 흥사단을 창립했다. 국내의 청년학우회(1909)를 계승하는 단체를 구상해 온 안창호는 무실역행, 충의 용감, 건전 인격, 단결훈련, 국민 개업(皆業) 등을 목표로 한 동맹 수련단체인 흥사단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 191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거행된 흥사단 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도산 안창호 선생

안창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다. 1923년, 임시정부 내부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상하이에서 각지의 국민 대표들이 모인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정을 유지하면서 효과적으로 개편·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난항을 거듭하다 끝내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하이를 떠나거나 독립운동을 포기하기도 하였지만, 안창호는 대독립당운동*과 이상촌 건설 운동에 매진하면서 독립운동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는 임정 경제후원회를 만들어 재정 위기에 빠진 정부를 후원했으며, 각지에 한국 유일독립당 준비회를 만들어 지역별 독립운동 단체를 유일당 체제로 통일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대독립당은 민족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조직된 촉성회(재촉하여 빨리 이루어지게 하는 모임) 중 하나다. 민족유일당은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전개된 정당 형태의 민족운동 총지도기관 결성 운동으로, 이념이 다른 민족운동 단체들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고자 한 민족 협동전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한 가운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은 1929년에 끝내 실패했다. 그 뒤, 안창호는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종래의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결성한다는 목표로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 - 안창호의 ‘대공주의’

 

‘개인은 민족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그 천직을 다 한다’라는 사상인 대공주의는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로 대변된다. 그것은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걸림돌이었던 고질적인 사상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 사상과 노선 갈등으로 말미암은 극한 대립을 융화시키고자 제시한 ‘제3의 길’이었다.

 

1932년, 안창호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계획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해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그는 일본의 배후 소탕 과정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실제 김구의 무장투쟁 노선에 반대했던 그는 훙커우 의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의거 후 백범이 거사가 자신의 지휘 아래 치러진 사실을 밝혔지만, 도산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산은 1935년 가석방으로 출옥하여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였다.

▲ 1932년 7월4일 경기도 형사과에서 촬영한 도산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 1935년 보석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석방된 도산이 몽양 여운형(왼쪽)과 조만식과 함께 찍은 사진.

1937년 6월, 도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흥사단*의 자매단체였던 수양동우회는 그 무렵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고자 했다. 수양동우회를 대상으로 표적 수사를 벌인 이유는 그것을 무기 삼아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 단체.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선 8도를 대표한 발기인 25명으로 조직한 흥사단(Young Korean Academy, 興士團)은 일제강점기 실력 양성 운동에 의한 항일운동 단체다.

 

일제가 의도한 대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랬고 중심인물이었던 이광수와 주요한은 이후 극렬한 친일 행적을 서슴지 않았다. 1937년 해산되면서 수양동우회는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 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냈다.

 

도산은 수감 중 병이 깊어지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대성학교와 이상촌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에 전 재산을 쓴 도산은 가난했고 그의 병원비는 윤치호와 김성수, 이광수 등이 댔다. 그러나 이미 병세가 손쓰지 못할 만큼 위중해졌던 도산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파란 많았던 우국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60. [관련 글 : 민족의 선각자도산 안창호 서거]

 

도덕적 인간이 ‘사상과 실천’으로 펼친 민족운동

 

안창호는 널리 알려진 대로 스스로 힘을 키워야만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한 실력 양성론자였다. 그의 실력양성론에 감화받은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등은 그러나 뒷날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그것은 실력양성론이 독립을 단계적으로 실현하자는 논지여서 훨씬 타협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창호는 당파적 이익이나 사익보다 사회적 공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 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 평등, 교육 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다.

 

독립운동 노선이 개량적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존재하지만, 북한에서도 안창호가 ‘상급의 애국열사’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그의 일관된 삶과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지도자였다.

 

안창호가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야 한다면서 민족 혁신은 자아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 혁신은 바로 인격 혁신이라 본 것도 같은 논지에서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안창호는 자아 혁신은 곧 자기 개조로 연결되며, 자기 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 ‘행동’이니 무실과 역행 없이는 자기 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기반은 도덕과 윤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창한 사상에 걸맞게 자신의 사상을 삶 속에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재현했다. 관점에 따라 지나치게 도덕군자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는데도 그가 일반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이유다. 그는 무엇보다도 겸허한 사람이었다. 명석한 데다 타고난 언변과 통솔력, 용기와 덕성을 지닌 인격자였지만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앞에 나서서 내로라하지 않았고 뒤에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이였다.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동시에 그는 ‘개량주의자’, ‘조선 독립 불가론자’, ‘자치론자’ 등 독립운동에 파벌을 조장하고 민족개량주의를 기른 인물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실제로 그의 노선을 따랐던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의 인물들이 대부분 1930년대 중반 이후 노골적인 친일 부역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안창호 자신은 언제나 중립적 입장에서 평형을 유지하려 했고, 파벌을 조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추종자들이 변절했는데도 비난이 그에게 오지 않은 것은 그가 항심(恒心)을 잃지 않는 실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정직하고 도덕적이었다. 조부의 뜻에 따라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그 아내와 일생을 같이했고 어떤 경우에도 절제를 잃지 않았다.


안창호의 장례식은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그는 망우리에 묻혔다. 총독부는 소요 사태를 막는다는 구실로 헌병을 보내 장지로의 출입을 통제 감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1973년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안창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가 살았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그의 이름을 딴 나들목(2002)과 우체국(2004)이 각각 세워져 그의 삶을 기리고 있다. 한국과 중국, 연해주, 그리고 미주를 넘나들며 남긴 안창호의 자취는 한 도덕적 인간이 사상과 실천으로 펼쳐낸 민족운동의 얼개를 뒷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 도산안창호기념관은 도산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기 위해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강남구 신사동에 설립하였다.

 

2025.03. 낮달

 

참고문헌

· 박만규, 대공주의를 주창한 대한민국 디자이너 안창호, 서울흥사단, 2011.

· 독립기념관 전시부, 한국 독립운동의 스승 안창호, 독립기념관 제374호(2019년 4월), 독립기념관, 2019.

· 이명화, 안창호 : 대공주의를 지향한 민족 통합지도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2010년 2호), 일조각, 2010.

· 반병률, 대한국민의회의 민족운동과 안창호, 도산사상 연구 5(1998.12.), 도산사상연구회, 1998.

· 도산 안창호, 생애와 업적, 흥사단 누리집

· 생애와 활동, 온라인기념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 누리집

· 이현주, 도산과 초기 미주 한인 단체, 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2008년 12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기념관, 2008.

·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공훈전자사료관,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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