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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조락(凋落), 가을의 끝

by 낮달2018 2025. 12. 7.

[사진] 시들어 떨어지는 계절, 가을의 끝에서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단풍도 끝물이다. 이웃 아파트 울타리의 벚나무 고목에 몇 남지 않은 나뭇잎이 곱다.
▲ 우리 아파트 울타리의 산딸나무 잎사귀 단풍이 꽤 오래 가고 있다. 아직도 노란 잎도 많은데 말이다.
▲ 동네 중학교 뒤쪽의 메타세쿼이아도 단풍이 들었다.

가을을 규정하는 표현은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게 ‘수확’과 ‘결실’, ‘풍요의 계절’이고, ‘독서’나 ‘등화가친의 계절’이라는 표현도 흔히 쓰인다. ‘천고마비’니, ‘고독’과 ‘사색의 계절’도 빠지지 않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각적, 기후적인 가을의 특징과 연관된 표현이다.

 

수확과 결실, 풍요 같은 낱말이 봄에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 곡식과 과일의 한살이와 이어지는 표현이라면 그 반대편에 있는 표현이 ‘조락의 계절’이다. 조락(凋落)은 ‘시들 조(凋), 떨어질 락(落)’ 자를 써서 잎사귀가 떨어져 낙엽이 되는 상황을 그리는 표현이다.

▲ '조락'은 수확이나 풍작 같은 낱말과 겉과 속을 이루는 어휘다.

수확과 풍요로운 결실은 추수, 수확으로 이어지면서 대풍을 선사한 들판은 비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채우는 시간은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이다. 한가위의 만월, 그 완벽한 원형은 완성과 충만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곧 비워져야 한다는 운명의 예시이기도 하다. <토지>의 도입부에서 박경리 작가는 한가위를 비애와 체념의 묵시하는 축제라고 말한 이유다. [관련 글 : 한가위, 슬픈 풍요]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靑孀)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 박경리, 『토지』 제1부 제1편 ‘어둠의 발소리’ 중에서

 

조락은 가을이라는 계절과 그 과정의 본질을 드러낸다.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곡물이나 과일이 결실한 후, 성장을 멈추고 겨울을 나기 위해 옷을 벗는 과정이니 말이다. 마지막 잎사귀와 열매를 간신히 단 채 나목으로 옮아가고 있는 나무들, 땅바닥에 쌓인 낙엽과 떨어져 썩어가는 열매들이 연출하는 풍경은 스산하면서도 묘한 울림을 선사해 준다.

▲ '난동'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따뜻한 늦가을의 기온에 속은 개나리가 꽃을 피웠다. 동네 중학교 울타리에서 꽃을 피운 개나리.
▲ 동네 초등학교 가는 길의 목련도 따뜻한 날씨에 홀려서 새로 꽃눈을 만들었다.
▲ 만추에도 장미가 더러 피지만, 이 녀석은 작은 봉오리도 여러 개를 거느리고 있다. 초등학교 울타리의 장미.
▲ 내년 봄이나 되어야 꽃을 피우는 겹꽃 동백꽃도 벌써 꽃눈을 틔우고 있다. 바닷가에 달리 내륙의 동백꽃은 3월이 지나야 핀다.
▲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감 하나. 그것도 새가 쪼아먹었는지 반쪽이다.
▲ 동네 전자공장 앞에 서 있는 명자나무에 열매 하나가 달려 있다. 오른쪽에는 여기에도 꽃눈을 틔웠다.
▲ 가마실로 가는 길섶에서 만난 청미래덩굴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이미 쪼그러드는 놈도 있다. 경상도에선 '망개'라고 한다.
▲ 동네 텃밭에 심은 맨드리마기 바야흐로 말라 죽어가고 있다.
▲ 동네 어느 카페 화단에서 개미취가 마지막 남은 꽃을 피우고 있다.
▲ 중학교 앞 산어귀에 심어진 무궁화꽃이 말라가고 있다.
▲ 가마실 가는 길의 조그만 개울 가에 피어난 갈대가 하얗게 익어가고 있다.
▲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울라리의 대추나무 아래 떨어진 대추가 썩고 있다.
▲ 가지에 매달린 채 마침내 바스러지고 있는 단풍잎. 나무 밑에는 떨어진 잎사귀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 중학교 뒤 가정집의 산수유 열매가 얼었다가 녹고 있다. 꽃눈도 틔웠다.
▲ 산수유 열매도 쪼그라들고 있는 가운데, 따뜻한 기온에 현혹된 꽃눈을 여럿 틔우고 있다.

한동안 따뜻했던 날씨가 급변하며 며칠간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다. 11월에도 여전히 온난한 날씨에 동네 중학교 울타리의 개나리가 꽃을 피우고, 초등학교 가는 길의 목련과, 산수유도 꽃눈이 생겨났다. 11월까지 꽃을 피우는 장미들도 더러 눈에 띈다. 열매들은 추위에 얼면서 쭈글쭈글해지고, 화사한 빛깔을 자랑하던 단풍잎도 바스러져 떨어지기 직전이다. [관련 글 : 202211, 만추의 장미]

 

두어 차례에 걸쳐 동네 산책길을 돌면서 찍은 사진들 가운데서 이 가을의 끝을 보여주는 이미지 몇을 골랐다. 12월도 어느새 중순으로 치닫고 있고, 동지도 보름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2025년도 세밑에 접어들고 있다. 비록 스산한 조락과 가을의 막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지만, 그게 몇 달 후에 올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만추를 넘어선 조락의 가을 이미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2025. 1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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