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단풍과 김광균의 ‘추일 서정(秋日抒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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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의 이웃 아파트 울타리의 벚나무는 잎이 좋다. 품종에 따라서 다른 듯한데, 가을이 깊어지면 이내 잎이 지거나 우중충해지는 여는 벚나무 잎과 달리 이 벚나무 잎은 단풍이 들 때까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뿐더러 단풍도 꽤 곱게 드는 품종이다. 그 잎을 찍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관련 글 : 2022년 가을 풍경(2)]
올해는 2022년과 달리 산책길이 짧아져서 주변의 논밭이나 풍경을 찍을 새가 없었다. 오가며 벚나무 잎사귀가 물드는 기미를 살펴보고 있다가 최근 며칠간 그 사진을 찍었다. 단풍은 곱다, 아름답다는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곧 무언가 쓸쓸해지는 정서로 이어진다.
단풍도 떨어지면 낙엽이다. 노랗고 빨간 옷으로 갈아입은 채 마지막을 불태우고, 잎사귀들은 떨어져 보도에 수북이 쌓인다. 일교차가 커지면서 사람들은 지난 겨울옷을 하나씩 꺼내면서 오는 겨울을 불안하게 내다보는 때가 되었다. 굳이 ‘조락(凋落)’을 말하지 않더라도 수확의 계절이면서 상실의 계절, 채움과 비움이 이어지는 시기가 만추인 것이다.

김광균(1914~1993) 시인의 ‘추일 서정’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다. 김광균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언덕’이었다. 심심한 저녁 언덕에 올라 나발을 불며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회상하는 내용의 이 시는 김광균 시 특유의 회화적 요소가 짙은 작품이었다. ‘나팔’ 대신 ‘나발’이란 시어를 쓴 게 언짢았지만, 열네 살 중1한테는 시에 드러난 소년의 모습이 매우 강렬한 공감으로 다가왔었다.
김광균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중3 때 한림출판사 판 <한국의 명시>라는 장정판(하드커버)에서 그의 시 ‘와사등’과 ‘설야’를 읽으면서다.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른바 ‘주지주의’ 사조의 명제는 ‘시는 회화다’였는데, 그의 시편들은 한편의 그림을 떠올려주는 울림을 가진 시들이었다.
‘와사등’이 가스등이라는 도회적 소재와 함께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와 같은 시구가 드러내는 애상적 정서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설야’에서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은 감각적 시구에 취했었다. 그러나 고교에 진학하여서는 회화시라고 불리는 ‘외인촌’이나 ‘데생’ 같은 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추일 서정’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다. 한국 현대시 관련 단원에 그 시의 일부가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으면 ‘가을날 서정’이었겠지만, 1940년에 발표한 이 시의 제목이 ‘추일 서정’인 게 아쉽지 않았었다. 낙엽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도룬 시의 가을하늘’로 비유한 표현도 좋았다. 그리고 소멸해 가는 계절, 가을의 쓸쓸하고 허망한 시간의 추이를 담담한 스케치처럼 제시했다.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는 시를 지배하는 정서인 고독을 행위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담담히 그의 시상을 따르던 독자들도 시적 자아에 동화되어 마음속에 돌팔매 하나를 준비하게 되지 않던가.






오가며 아파트 울타리를 빨갛게 물들이던 벚나무 단풍의 안부를 지켜보면서 이제 스러져 가는 계절을 작별하려고 한다. 릴케가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고 한 때가 오고 있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저물것이다. 삶의 대차대조표와는 무관하게 세월은 흐르고 흐른다.
2025. 1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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