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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2025년, 다시 ‘몽양 여운형’

by 낮달2018 2025. 9. 14.

해방 공간의 빛나는 이름 여운형(1886~1947), ‘금기’를 넘어


이 글은 지난 3월에 펴낸 졸저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북피움)에서 실으려다가 빠진 초고다. 분량 문제로 부득이 뺄 수밖에 없었던 이는 몽양 여운형과 홍범도 장군이다. 기왕에 쓴 두 분의 약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자료로 다시 들여다본 생애는 또 다른 감동이 있다.
[관련 글 : 국내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 테러에 스러지다]

 

▲ 1933년에 나온 '현대철봉운동법'에 실린 스포츠맨 여운형의 사진.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1933년에 조선체육회장과 조선농구협회장을 지냈고, 1934년에는 조선축구협회, 서울육상경기연맹, 동양권투회 등의 회장과 스포츠 여성 구락부 고문을 역임한 이다. 해방 뒤에도 1947년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 한국위원장으로 활동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로까지 불리었다.

 

일찍이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학 팀과 친선경기를 펼쳤으며,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체육을 가르치던 1929년에는 축구부를 이끌고 싱가포르에 원정을 가기도 했을 만큼 그는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에다 ‘몸짱’ 여운형

그는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를 발굴한 후원자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원조’였다. 자신의 둘째 아들과 양정고보 동창이었던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기사를 발행하였다.

 

여운형은 철봉운동으로 근력을 키우는 ‘몸짱’이었으며 야구와 축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 만능 체육인이었다.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일경에게 체포될 때도 그는 야구장에서 매니저로 경기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스포츠가 대중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긴 그는 스포츠 보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26년 6월 15일, 중국 상하이 야구팀 코치로 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 마흔 살의 여운형은 전매특허인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179cm, 80kg의 체격에 풍채가 우람한 데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다. 거기에다 배우를 연상케 하는 차림새로 그가 거리를 활보하면 같은 남자들로부터도 찬탄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거구인데, 그는 그런 체격과 풍모를 죽을 때까지 잘 유지했다. <현대 철봉 운동법>(서상천·이규현, 한성도서, 1933)에 수록된 사진 속 몽양의 벗은 상반신은 ‘청년 여운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마흔일곱 살의 여운형은 기꺼이 웃통을 벗고 철봉운동으로 다져진 튼튼한 근육을 보여주었다. 그 당당한 파격이 죽음을 불사하고 분단으로 치닫는 역사와 맞서 싸웠던 몽양의 힘과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여운형은 “과거 우리 조상들은 건전한 체질의 소유자였으나 조선시대를 통해 문약으로 흘러버린 결과, 체질을 향상하는 데 힘쓰지 못했고, 식민지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다시 찬란한 공훈을 가지려면 먼저 체육적 재생을 하여야 하고, 건전한 체질을 찾아야 한다.”라는 신념 아래 체육 보급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데 힘쓴 것이다.

22살 여운형 상투를 자르고 집안 노비를 해방하다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4살 때(1900)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했지만, 엄격한 규율이 부당하다고 여겨 그만두고 1903년 통신원을 기르는 우무(郵務)학당(1900년 11월 대한제국이 한성에 설립한 관립 체신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졸업 한 달 앞두고 을사늑약이 체결(1905)되자 학교를 그만두었고 1907년 기독교도가 되어 양평군에 기독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고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여 연설에 나섰다.

 

이듬해인 1908년 22살의 여운형은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 상투를 자르고 집안의 노비를 해방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똑같다. 상전과 종으로 나누는 것은 어제까지 풍습일 뿐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뜻대로 살아가라.”

 

1913년에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했고,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 진링(金陵)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6년에 상하이 기독교 소학교를 설립했고, 1917년에는 상하이 인성학교를 세워 9년 동안 교장으로 활동했다.

▲ 1919년 9월 17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 촬영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세번 째가 여운형.

1918년 11월 여운형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를 상하이에서 만났고,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 등 6인을 중심으로 청년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다. 또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했고, 국내와 일본, 만주, 연해주 등지에 신한청년당 간부를 보내 현지의 독립지사들과 만나 민족 자결을 위한 시위와 투쟁에 나서기를 지원하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활동이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19년 11월 일본 정부는 여운형을 독립운동 대열에서 빠지게 하여 친일 자치주의자로 회유하고자 일본으로 초청했다. 하지만 34세의 식민지 청년 망명 독립운동가는 적진의 심장부 도쿄 제국 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창하는 뜨거운 연설과 회견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정연한 논리로 갈파하여 좌장의 갈채를 받았고 그의 연설문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실렸다.

 

사회주의와도 폭넓게 교류했으나, 유연한 민족주의자

▲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여운형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서 두 번째) ⓒ 몽양여운형아카이브

여운형은 나라 안팎에서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갔지만, 192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진영과도 폭넓은 교류를 시작했다. 그는 1920년에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했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과 트로츠키와도 만났다. 1925년에는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을 만나 중국 혁명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그를 쑨원에게 소개하는 등 국공합작에 도움을 주었고,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 현실이 중요하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아니라 ‘좌우가 함께하는 수탈 없는 사회’를 구상했다. 그가 사회주의 진영과 교류하면서도 기독교계와 자본가 그룹과도 대화를 멈추지 않은 이유였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의 몽양. 왼쪽 두 장의 사진은 1929년, 맨 오른쪽은 1930년의 사진이다.

1929년 7월에 여운형은 상하이 야구장에서 경기 관람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고,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어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7월 만기 4개월을 앞두고 가석방된 여운형은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치안유지법 : 일본 제국 말기에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법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총동원법 체제(1938~1945) 아래서 적용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반체제주의자로 분류된 것이다. 해방 후 폐지된 이 법은 1948년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이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8월 13일 자 신문에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인쇄 품질이 시원찮아 무사히 검열을 통과했으나 <동아일보>가 이를 따라 하여 8월 25일 자 신문에서 같은 사진을 실었다가 검열에 걸렸다. 이로 말미암아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한동안 복간되지 못했다.

광복을 내다보고 건국동맹을 만들어 해방 대비

▲ 1945년 8월, 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몽양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여운형은 1942년 다시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날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할 수 있었고, 전국 각지에 치안대를 운영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 자치 능력을 입증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보시오. 농민, 노동자들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 사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중략…)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 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 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 여운형, 조선인민당 창당 연설(1945년 11월) 중에서

 

그러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공간에서 몽양과 같은 중도파 세력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미군정의 기만책으로 말미암아 우파 중심의 입법기관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동안 좌우합작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는 절망했고, 1946년 12월 4일 이 모든 상황에 책임을 지고 은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박헌영과 대화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 몽양여운형아카이브
▲ 1947년 7월 1일,  미군정의 요청으로 귀국한 서재필을 영접한 김규식(맨 왼쪽)과 여운형. 18일 뒤 몽양은 테러로 스러졌다.

그러나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이 커지자, 여운형은 1947년 1월 말 공식적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3월에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들어가 5월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김규식·김창숙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 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열두 번째 정치 테러로 지다

1947년 7월 1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한영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미군정 체육부장이었던 여운형은 이 경기를 참관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며 차를 집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오후 1시께,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20대 청년 하나가 튀어나와 여운형에게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총알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그것은 중국(1929)에서의 두 차례를 포함하여 광복 이후 몽양이 당해야 했던 열두 번째 정치 테러였다. 빈번한 피습과 납치, 침실 폭파 등의 직접적인 공격뿐 아니라 협박 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그에게 가해졌던 테러는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 피살 당시에 몽양이 입고 지녔던 상의와 유품들. 몽양기념관 사진.

향년 62세. 스물한 살에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40여 년을 조국 독립에 바친 치열한 삶이었다. 해외 불령선인(不逞鮮人) 1호였던 백범 김구에 비겨지는 국내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접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1946년, 몽양을 비롯하여 김규식, 안재홍, 박헌영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태도를 바꾸자, ‘신탁통치는 식민 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라고 믿은 광신적 우익 세력들은 이들을 암살의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 1947년 5월, 환구단 앞의 여운형. 〈라이프〉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몽양은 이러한 위협에 대해서 초연했다. 그는 다섯 번째 테러를 당했을 때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자식들의 우려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할 정도였다.

 

1947년, 극우파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포착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는 여운형에게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몽양은 이를 간단히 거절했다. 그는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본명 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한지근(1927~?)은 공판 과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미성년자라 하여 소년원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배후는 우익 진영이고, 극우 테러 단체 ‘백의사(白衣社)’*가 현준혁과 송진우(1945), 여운형과 장덕수(1947) 등의 암살에 관여한 거로 추정할 뿐이다.

 

*백의사 : 1945년 월남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극우 반공 단체. ‘백의사’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반공 지하공작 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것이다.

사후의 ‘평가’들

▲ 1947년 7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8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영결식을 베푼다는 장의 결정을 전하는 기사다.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 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 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성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 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 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

     — 김규식, ‘여운형 서거 담화’(1947년 7월 22일)

 

“여운형은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민주사회주의자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다.”

    — 강원룡 목사

 

“자유주의자 여운형은 좌우의 양자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해서 투쟁했다. 때때로 그는 우유부단하다는 이유 때문에 미국인들이나 한국인들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욕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여운형은 자신을 질시하고 욕하는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한국인들을 잘 이해하고 사랑했다.

 

미국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 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 편이었다.”

     —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 미군정청 정보 담당자)

 

리처드 D. 로빈슨(Richard D. Robinson, 1921~2009) 해방된 한반도 미군정의 정보 담당자, 공식적인 ‘군사’(軍史)인 『주한 미군사』의 집필에 참여한 역사가였다. 그는 대부분이 ‘극비’ 문서로 분류된 미군의 공식적인 남조선 점령의 역사는 아주 편견에 가득 차 있고 또한 부정확하게 기술되었다며 자신이 기록한 2년간의 노트를 바탕으로 『미국의 배반』(원제는 Betrayal Of A Nation)을 썼다.

 

“선생의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여 선생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하지의 정치 고문,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

 

“나는 그가 강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는 기회주의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조선인들의 공통적 성격이었다. 과거에 그는 일본 정부나 총독부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총독부는 그에게 중직(重職)을 거듭 제공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이다.

     -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좌우합작은 좌초, 단독정부 수립의 외길로 간 정국, 결국 분단으로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고 흔들렸다.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좌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끝내 미소의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되었다. 결국,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결국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 안이 확정되면서 분단의 길로 나아가기에 이른 것이었다. 몽양 사후, 백범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북행을 통해 분단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마저 1949년 흉탄에 스러지고 말았다.

▲ 몽양 여운형의 장례는 1947년 8월 3일 최초의 인민장(국민장)으로 거행됐다.
▲ 몽양의 장례식에 운집한 군중들의 배웅을 받으며 장의 행렬이 지나고 있다.

갑작스러운 몽양의 죽음은 동포들에게 큰 충격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의 장례는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최초이자 최후인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약 60여만 명, 광복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 사람들이 슬픔에 동참하고자 입은 흰옷으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몽양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 부근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에게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해방 정국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지도자

▲ 2011년 양평군에서 몽양을 기리고자 설립한 몽양기념관. 여운형 선생의 유품과 업적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해방 공간에서 몽양은 가장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빼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초대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로, ‘최고의 혁명가’로 손꼽힌 인물이었다.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 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

 

몽양은 미군정뿐만 아니라, 박헌영 등 좌익 세력과 우익 한국민주당 세력으로부터 ‘기회주의 정치가’, ‘회색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여운형, 김규식의 의지로 추진되었던 좌우합작운동이 서 있는 통합이 감당해야 할 멍에가 아니었을지.

 

몽양은 오랫동안 금기의 이름으로 잊히어 왔었다. 그는 정작 미군정 측에서 명백히 부인하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면서 기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광복 60년 만에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몽양 여운형은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재일교포 역사학자(와세다대) 강덕상(1931~2021) 교수가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도 민족통합에 대한 그의 헌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2025. 9.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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