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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김알렉산드라 - 노동자의 벗,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볼셰비키 혁명가

by 낮달2018 2025. 11. 25.

[그 청춘의 초상] 김알렉산드라(1885~1918),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볼셰비키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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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김알렉산드라는 스탄케비치와 결혼했다.(1905, 연해주)

신랑은 어깨가 널찍한 러시아 남자로 콧수염을 길렀고,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맸다.  스무 살 신부는 한국인 특유의 오목조목한 얼굴, ‘귀염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상이지만, 꾹 다문 입술 주변에 서린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만만찮은 고집이나 결기가 풍긴다고 여기는 건 그가 혁명가라는 사실에서 오는 선입견일지 모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를 나와 당시 영안평의 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신부 김알렉산드라는 부친의 친구이자 자신의 후견인이기도 한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그의 이름이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가 된 것은 바로 이 결혼 때문이다. 김알렉산드라는 1908년 아들 슬라브를 낳은 직후 남편과 이혼했다.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투쟁과 김알렉산드라 

▲ 1999년 국외 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운동 80주년을 맞이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26A에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국내와 중국(만주 포함) 위주로 독립운동을 배운 세대에게 연해주와 같은 러시아(소련) 쪽의 독립투쟁은 낯설고, 쉬 그 모습이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 전후의 이른바 볼셰비키와 연관된 활동은 학습된 레드 콤플렉스가 그 실상을 제대로 보는 걸 방해한다. 특히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가 공동의 적인 일본과 맞선 조선에 대해 일관된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고, 불이익을 준 트라우마가 있기도 한 탓이다.

 러시아령 연해주(沿海州)는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체결한 베이징 조약에 따라 러시아에 할양한 땅이다. 연해주 지역은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의 폐정과 자연재해 등으로 생존의 절망적 상황에 내몰린 함경도 주민 일부가 두만강을 넘어 들어가 삶의 터전을 개척하게 된 땅이기도 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연해주 한인 2세로, 러시아제국 우수리스크의 한인 마을, 우리 동포들이 ‘추풍 영안평’, 또는 ‘추풍 대전자’라 부른 시넬리니코보에서 농민 출신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러시아식 이름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함북 경흥 출신의 빈민 김두서는 중국 훈춘에서 소작농으로, 러시아에서는 막노동꾼으로 생계를 이어오면서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1891년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간선인 동청철도* 공사 현장에 통역사로 강제 징집됐다. 6년 전에 태어난 김알렉산드라도 아버지를 따라 공사 현장에서 살았다. 당연히 연해주의 한인 노동자가 공사에 대거 동원됐는데, 김알렉산드라는 착취당하는 한인 노동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동청(東淸)철도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만저우리(만주리)와 쑤이펀허(수분하), 그리고 다롄(大連)을 잇는 철도 노선


 당시 러시아 이주 조선인 노동자의 목숨은 “러시아제국 군대의 말(馬)보다도 하찮”아서 일하다 다쳐도 병원은커녕 숨지면 광야에 아무렇게나 묻히는 신세였다. 이런 상황을 보고 들으며 자란 김알렉산드라는 모순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내면화하였을 것이다. 

 1902년 17살 때 아버지를 여읜 김알렉산드라는 부친의 폴란드인 친구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진학했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영안평*의 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05년 후견인이었던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영안평(永安坪)’은 한인들이 시넬리니코보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다. 마을 주변의 수이푼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 하고 넓어 한인들은 그런 뜻의 한자어를 붙인 것이다. ‘연해주(沿海州)도 마찬가지, 러시아어로 프리모리예     (Приморье), ‘바다에 접한 땅’이라는 뜻이어서 한인들은 이를 의역(意譯)하여 연해주라고 썼다. 

한인사회의 국권 회복 운동과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 김알렉산드라

▲ 김알렉산드라가 일하던 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인민위원회 건물. 지금은 의류 매장으로 쓰이고 있다. ⓒ 한국일보 사진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수적으로, 지역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한인사회의 역량도 커져 을사늑약(1905) 이후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자들이 모여들 때, 연해주에는 이미 국권 회복 운동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인 집단 거주지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자치단체, 독립운동 단체 등이 생겨나면서 연해주의 주도(州都) 블라디보스토크는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은 1906년부터 본격화되어 최재형·이범윤·홍범도·안중근 등의 연해주 의병 운동*(1907~08), 교육·언론 등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 성명회(聲鳴會)* 선언(1910), 권업회* 활동, 대한광복군정부*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김알렉산드라는 노동자가 된 한인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는 망명자들을 도왔다. 

 

*안중근은 1907년 8월 망명한 이후 연해주에서 2년간 의병으로 활동했다. 그는 최고 지휘관인 전제익(1861~? 2016 애국장) 아래에서 중간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이 거느리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 7일 연해주 포시에트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공하기도 했다.

 

*성명회는 1910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 일제의 한국 강점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명회는 일본과 각국 정부에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명의의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작성하여 발송했다.

 

*권업회(勸業會)는1911년 6월에 설립되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존속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 자치단체다. 분열되어 있던 한인 정치 세력을 망라하고 러시아 관료들의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지역 한인 대표기관으로 인정받았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를 모체로 191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범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 군정부(軍政府). 조직의 주도자는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전쟁 포로와 한인 등을 강제 동원, 우랄 지역 페름(Perm) 군수공장을 가동해 전쟁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페름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인 2023년, 러시아 다연장로켓 무기공장 대폭발 사고가 일어난 러시아 중부 도시다. 당시 페름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인간적인 노동강도 등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페름으로 간 김알렉산드라는 1914년 말부터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하는 러시아 우랄산맥 벌목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김알렉산드라는 1917년 초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한인 최초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그는 곧 우랄산맥 벌목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소송대리인으로 노동자의 임금 착취 등을 고발하며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이들 조선인 노동자 32명은 학교가 폐쇄 위기에 빠지자, 페름의 산악지대에서 육체노동으로 학교를 재개할 자금 모으려고 온 지린성 왕청현 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 생도 출신이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들이 왜 육체노동에 뛰어들었는가를 알고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 그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대표자로서 노사 교섭을 벌이고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들과 함께 우랄 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동휘가 1915년, 지린성 왕청현 나자구에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한 무관학교.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으로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한때 나석주도 여기서 훈련을 받았다. 

 김알렉산드라의 승리는 레닌 측근에게까지 알려졌다. “당의 지원도 없이 노동자를 해방한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혁명가요.” 그렇게 신임을 얻은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사회민주당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1918년 1월,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뒤에 하바롭스크에 왔다가 독일 간첩 혐의로 수감된 이동휘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동휘는 10월 혁명 뒤에 석방되었다. 

1918년 이동휘 등과 한인사회당 창립 

▲ 1918년 이동휘와 함께 '반일반제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채택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한 사회주의자들.

1918년 5월에는 이동휘, 류동열, 김립, 오성묵 등과 함께 ‘반일반제(反日反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채택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러시아에선 ‘한인 사회주의자동맹’)을 창립하였다. 위원장에 이동휘가 선임됐고, 류동열이 군사부장, 김립이 선전부장 등을 맡았다. 이들은 조국 독립을 준비하고자 한인 무장 부대를 조직했고, ‘보문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국 역사와 지리서 등 교과서와 기관지 『자유종』을 펴냈다. 일본군이 연해주에 출병했을 때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사업을 전개하면서 일본군 병사들에게 알리는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하고 그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이 생겨나면서 러시아 주변과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적백 내전’이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론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백위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적위군) 사이의 내전이었지만, 실제로 레닌 주도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과 혁명을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에 맞선 백군과 백군을 후원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었다. 

 한인사회당은 내전이 격화하면서 내전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일본이 러시아 혁명군을 제압하고자 대규모 병력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하면서 전세도 불리해졌다. 하바롭스크의 한인사회당 인사 중 이동휘(1995·대통령장) 등은 내전 참여에 반대했고, 김알렉산드라와 류동열(1989· 대통령장) 등은 일본군과 러시아 정부군(백위군)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 것이다. 

▲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우쪼스절벽에서 바라본 아무르강(중국명 흑룡강) (2018년) ⓒ 독립기념관

 한인사회당이 조직한 100여 명의 적위대는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군에 편입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우수리 전투에 참여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한인 적위대원들은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1918년 8월 말 하바롭스크의 볼셰비키들이 빨치산 체제로 전환을 결정하고 아무르주로 이동하던 중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아무르강(흑룡강)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우수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백군에 넘겨져 

하바롭스크로 압송된 한인사회당 간부 가운데 유동열, 이인섭, 김립 등은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해 풀려났지만, 김알렉산드라는 재판에 넘겨졌다. 백위군 장교가 김알렉산드라를 심문하면서 “너는 조선인이면서 왜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는가?”라고 묻자, 김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결국 김알렉산드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재판장은 “당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러시아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죄를 뉘우치면 석방하겠다”라고 제안하지만, 그는 이를 간단히 거부했다. 그는 “적위군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한 수백 명의 조선인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1918년 9월 25일,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유역 우초스 절벽에 섰다. 사형 집행관들은 포로들의 눈을 흰 수건으로 싸매고서 강변 바위 위에 세운 뒤 총살하고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넣었다. 이윽고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싸맨 수건을 벗어 던졌다. 그는 사형 집행관들이 세웠던 자리에서 열세 걸음을 걸어가 바위 위에 우뚝 섰다. 군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선의 후진들은 들으시오. 내가 금방 걸어 나간 열세 걸음은 조선의 13도이다. 그 발자국마다 우리 당 수령이신 V. I. 레닌에게서 받은 공산주의의 꽃씨를 심으시오. 그 꽃을 두 손에 쥐고 조국을 해방하고 온 세상에 자랑하시오. 동시에 그 꽃을 온 세상 피압박 민족에게 전해주시오. 공산주의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이인섭*의 회고록에서 

 

*이인섭(1888~1982) : 1907년 이전 국내에서는 의병 활동, 191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 2017년 우랄노동자동맹 회장, 1918년 3월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러시아혁명 50주년에는 적기 훈장을 받은 혁명가.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한인사회당과 김알렉산드라에 관한 여러 기록들은 모두 이인섭의 자서전, 저술과 회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된 장소(2002년) ⓒ 독립기념관

 총살형이 집행되어 김알렉산드라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아무르강의 검푸른 물결이 그를 삼켜버렸다. 한국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였고, 노동자들의 벗이었으며, 조선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는 그렇게 서른셋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 뒤에 하바롭스크 시민들은 김알렉산드라의 넋을 기려 아무르강 유역에서 오랫동안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서른셋에 진 혁명가에 바쳐진 헌사

▲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 있던 건물 외벽에 걸린 ‘그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는 내용의 기념 팻말.

1905년 첫 결혼 무렵에 찍은 거로 보이는 사진 속에서 갓 스무 살, 앳되지만, 당찬 모습의 신부 김알렉산드라는 두 아들을 남기고 혁명을 위해 죽었다. 다시 백 년이 지났지만, 그는 하바롭스크 극동인민위원회 사무실과 자신의 집무실이 있던 건물에 붙은 안내판의 짤막한 문구로 기억된다.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

 김알렉산드라를 잃은 뒤,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쇠잔해 갔다. 당 내부 노선이 갈리면서 양분된 조직은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고, 이는 1921년 6월 러시아 극동 공화국(아무르주) ‘스보보드니(Svobodny,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졌다. 이후 양분된 조직의 통합이 실패하면서 사실상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소멸의 과정을 밟았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소련은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키려 했다. 그러자 일제는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소련은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무장 해제 명령을 내렸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던 독립군이 이에 불응하자 적군(赤軍)이 독립군을 공격하여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었다.

광복 후에도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분단 뒤, 남에서는 군사 독재의 기반이었던 반공주의 여파로, 북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정책 등으로 말미암아 남북의 독립운동사에서 배제됐다. 민주화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함께한 이동휘에게는 1995년에, 김알렉산드라에게는 사후 91년이 지난 2009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이유다. 김알렉산드라는 정철훈의 소설로, 김금숙의 그래픽 노블(만화형 소설)로 21세기의 한국 동포를 만나고 있다. 

 고국의 독자들에게 여느 고려인 독립운동가와 다르지 않을지 몰라도, 불꽃처럼 피었다 스러진 이 여성 혁명가,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는 한인사회당 기관지 ‘자유종’의 주필을 지낸 한글학자 계봉우(1995·독립장)의 시방도 뜨거운 헌사로 남아 있다. 

 

*‘시베리아의 딸’은 정철훈 작가의 원작 『소설 김알렉산드라』(2009)를 바탕으로, 김금숙 작가가 강렬하고도 우아한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시킨 책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2020)에서 따 왔다.

“혁명 사상으론 대한 여자의 향도관(嚮導官), 
사회주의로는 대한 여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로는 대한 여자의 고문관, 
해방경쟁으로는 대한 여자의 사표자(師表者)”

 

2025. 11. 24. 낮달

 

참고문헌

· 강지원,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총살된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의 자취를 찾아서, 독립신문(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5호, 2023.9.

· 최윤아, 낯선 혁명가 김알렉산드라, 얼굴을 얻다, 한겨레신문, 2020.04.17.

· 정성희, 노동자 세상과 조선 독립의 횃불, 김 알렉산드라, 매일노동뉴스, 2019.4.8.

· 임경석, 러시아 벌목장, 막일하는 사관생도들, <한겨레21> (2021.09.01.)

· 반병률,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스탄케비치)의 생애와 활동 - 조선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의 약전」, 『윤병석 교수 화갑 기념 한국 근대사 논총』, 윤병석 교수 화갑 기념 한국 근대사 논총 간행위원회, 지식산업사, 1990.

· 박환, 「한인사회당 지도자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사』, 탐구당, 1995.

· [한인사회당 100년] ② 눈 덮인 아무르강은 속절없이 흐르고, 연합뉴스, 2018.01.29.

· 이현영, 1910년대 사회운동과 김알렉산드라,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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