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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의열단원 김익상의 조선총독부·후앙푸탄 의거

by 낮달2018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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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 투탄  /  1922년 3월 28일, 후앙푸탄 의거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김익상 의사는 두 차례에 걸친 의거의 주역이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 09. 12.)

1921년 9월 12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10시 20분께, 전기수리공 차림의 젊은이가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나타났다. 전기 시설을 수리하러 온 것처럼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온 청년은 2층으로 올라가 비서과에 폭탄을 던진 다음, 회계과장실에도 폭탄을 던져 넣었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 올라왔다. 청년은 대담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상이 이튿날, <동아일보>가 ‘총독부에 폭발탄!’이라는 제목으로 특종 보도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는 다음 해(1922) 3월 말이 되어서야 밝혀졌는데,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에게 폭탄을 던지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김익상(金益相, 1895~1941) 의사였다.

 

뒷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익상은 조선 총독의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그곳은 애석하게도 비서였고, 설상가상으로 폭탄마저도 불발했다. 뒤이어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터졌지만,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 1921년 9월 13일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가 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보도.

실제로 다친 사람 하나 없는 거사였지만, 이 사건은 최고의 식민 통치 기구인 총독부가 대낮에 뚫린 사건으로 일제를 긴장시켰다. 그의 거사는, 일제가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펴 식민 통치 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 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수그러지고 있다는 선전이 허황된 사실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대낮에 뚫린 최고 식민 통치 기구인 총독부

 

총독부에 유유히 잠입해 폭탄을 던지고 사라져 이듬해에야 신원이 밝혀진 김익상은 경기도 고양 공덕리(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 출신이다. 어려서 삼호보성소학교에 다녔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져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평양과 서울 등지에서 철공소 공원과 전기수리공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1919년 광성연초회사로 직장을 옮긴 뒤 1921년에 중국 펑톈(奉天)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을 받았다. 비행사의 꿈을 지니고 있던 그는 중국으로 건너간 뒤, 비행학교에 들어가고자 광둥(廣東)으로 갔지만, 당시 광둥의 호법 정부는 북벌에 바빠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아서 꿈을 접고 베이징으로 갔다.

▲ 김익상 의사의 인물카드
▲ 1919년 조직된 의열단은 국내에서 1920년대에 여러 차례 의열투쟁을 벌였다.

김익상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고, 이는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1919년 11월 중국에서 조직된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의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1920.9.)와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1920.12.)가 각각 거행된 바 있었다. [관련 글 :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출범]

 

의열단원 김익상, 두 번째 임무를 받다

 

의열단 가입 후 김익상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하였다. 곧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베이징을 떠나 동월 이튿날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에 그가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총독부에 들어가서 거사를 벌인 것은 앞서 밝힌 대로다. 김익상은 거사 뒤 피신하여 일인 요리점으로 갔다가 다시 철공으로 변장하여 기차를 타고 평양에 가서 며칠 체류하다가 9월 17일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 서울 남산 왜성대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청사. 김익상의 의거는 여기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사진 엽서 ⓒ 서울역사박물관
▲ 1922년 4월 1일 동아일보 기사. 상하이 후앙푸탄 의거 이후에 한해 전의 사건이 밝혀졌다.

상하이 후앙푸탄 의거(1922년 3월 28일)

1922년 3월 말, 김익상은 일본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거사에 그는 이종암(1896~1930, 62독립장), 오성륜(1898~1947) 등과 함께 3인조로 투입되었다.

 

거사는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해 후앙푸탄(黃浦灘) 부두에서 하선하면 곧바로 오성륜이 첫 저격을 맡기로 했다. 만일 실패할 때는 김익상이 뒤를 맡아 그를 사살하고, 김익상마저 실패하게 되면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이종암이 폭탄을 던져 그를 폭사시킨다는 계획이었다.

 

3월 28일, 오후 3시 예정대로 배가 후앙푸탄 하구(河口) 공공 조계(租界) 부두에 닿았고 다나카 기이치가 하선했다. 3시 30분, 첫 저격을 맡은 오성륜이 곧바로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실탄은 다나카 기이치에게 다가간 한 미국인 여성의 등에 총이 맞았고, 이 여성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당황한 다나카가 우왕좌왕 허둥대며 급히 자동차에 타려 할 때 2번째 저격을 맡은 김익상이 역시 권총을 발사했으나, 탄환은 다나카 기이치의 모자를 꿰뚫는 데 그쳤다. 이에 세 번째 저격을 맡은 이종암이 군중 속을 헤치고 나와 다나카가 탄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이마저 바로 터지지 않아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 넣어 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 상하이 후앙푸탄 부두. 이 부두에서 하선하던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가 의열단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거사 실패와 김익상의 체포

 

이때 이종암은 즉시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 체포를 면했으나, 도주하면서 권총을 들고 있던 오성륜은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김익상은 도주하던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게 붙잡혔다.

 

김익상이 체포되면서 그 전해에 그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고, 그는 오성륜과 함께 일본영사관 소재 감옥에 갇혔다. 1922년 5월 19일 상하이에서 이른바 ‘절도,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 건조물 파괴, 살인미수 및 상해치사’ 등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나가사키재판소에서의 공판에 부쳐졌다.

 

같은 해 9월 오성륜은 감옥 문을 부수고 탈옥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익상은 탈옥에 실패하여 결국 일본 나가사키로 이감되었다. 첫 공판은 1922년 6월 30일에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열렸는데, 김익상은 당당한 모습으로 출정해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을 말함)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다나카 대장이 상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백50 명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 윗 두목 가는 자를 암살할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 일이라.”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입구 쪽의 김익상 의사 의거터 표지

죽음의 이유도 무덤도 남기지 않은 쓸쓸한 죽음

 

같은 해 11월 6일 나가사키 공소원에서의 1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어 1923년에 있었던 상고심에서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익상은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서는 21년간 복역한 뒤, 1943년 만기 출소하였는데,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쉰 살의 초로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기술하고 있어 혼란스럽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귀향 뒤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된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디지털 동작문화대전>에서는 사망 연도가 다른 두 사람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1941년 8월 노량진에서 일본인 고등경찰과 노상에서 결투하다가 한강철교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다는 조카 김기복의 증언과 1942년 용산경찰서에 연행 중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는 독립운동 지사 이강훈의 증언이 그것이다.

 

세상을 떠난 해도, 무덤도 남기지 않은 김익상 의사는 국립서울현충원 무후(無後) 선열 제단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962년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한 생애를 온전히 조국에 바친 독립운동가에게 수여된 유일한 표지가 되었다.

 

 

2023. 12. 15.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디지털 동작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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