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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국내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 테러에 스러지다

by 낮달2018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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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열두 번째로 테러로 서거

▲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YMCA)에서 연설하는 여운형(1945년) ⓒ 몽양기념사업회(이하 같음)

1947년 오늘은 동대문운동장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한영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미 군정 체육부장이었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이 경기를 참관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며 차를 집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몽양, 열두 번째 테러에 스러지다

 

오후 1시께,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20대 청년 하나가 튀어나와 여운형에게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총알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그것은 중국(1929)에서의 두 차례를 포함하여 광복 이후 몽양이 당해야 했던 열두 번째 정치 테러였다. 빈번한 피습과 납치, 침실 폭파 등의 직접적인 공격뿐 아니라 협박 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그에게 가해졌던 테러는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향년 62세. 스물한 살에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40여 년을 조국 독립에 바친 치열한 삶이었다. 해외 불령선인(不逞鮮人) 1호였던 백범 김구에 비겨지는 국내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접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 1947년 5월, <라이프(LIFE)>지에 실린 여운형

몽양은 1944년 일찌감치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몽양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의 꿈을 현실화하는 데 전념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중략…]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 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 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 여운형, 조선인민당 창당 연설(1945년 11월) 중에서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공간에서 몽양과 같은 중도파 세력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몽양의 꿈, ‘통일 임시 정부’

 

좌우합작 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 와중에 마침내 몽양은 백주의 우익 테러에 희생된 것이었다.

▲ 도산 안창호 선생(가운데)의 말년에 고당 조만식(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1946년, 몽양을 비롯하여 김규식, 안재홍, 박헌영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자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라고 믿은 광신적 우익 세력들은 이들을 암살의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이러한 위협에 대해서 초연했다. 그는 다섯 번째 테러를 당했을 때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자식들의 우려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할 정도였다.

 

1947년, 극우파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포착한 미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는 여운형에게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몽양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 여운형이 피격되어 절명한 지점(혜화동 로터리 부근)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본명 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한지근(1927~?)은 공판 과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미성년자라 하여 소년원으로 송치되었다.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한 암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배후는 우익 진영이고, 극우 테러 단체 ‘백의사’(白衣社)가 현준혁과 송진우(1945), 여운형과 장덕수(1947) 등의 암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 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 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 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 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

   — 김규식, ‘여운형 서거 담화’(1947년 7월 22일)

 

“여운형은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민주사회주의자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다.”

      강원룡 목사

▲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주석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몽양.(왼쪽에서 두 번째)
▲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대표들과 함께 한 여운형. 1946년 5월 .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 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 편이었다.”

   —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 미 군정청 정보 담당자)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국, 소련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고 흔들린다. 제2차 미소공위는 좌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끝내 미소(美蘇)의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되었다. 결국,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좌우합작 운동의 실패와 분단

 

결국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면서 분단의 길로 나아가기에 이른 것이었다. 몽양 사후, 백범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북행을 통해 분단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마저 1949년 흉탄에 스러지고 말았다.[관련 글 : 백범 김구,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지다

▲ 여운형의 장례식에 참여한 60만여 명의 인파들. 흰옷으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
▲ 서울 우이동 솔밭공원 부근에 있는 여운형의 묘소. ⓒ 위키백과

갑작스러운 몽양의 죽음은 동포들에게 큰 충격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의 장례는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최초이자 최후인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약 60여만 명, 광복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 사람들이 슬픔에 동참하고자 입은 흰옷으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몽양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 부근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에게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다.

 

해방 공간에서 몽양은 가장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빼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초대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로, 최고의 혁명가로 손꼽힌 인물이었다.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

 

몽양은 미 군정뿐만 아니라, 박헌영 등 좌익세력과 우익 한국민주당 세력으로부터 ‘기회주의 정치가’, ‘회색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여운형, 김규식의 의지로 추진되었던 좌우합작운 동이 서 있는 통합이 감당해야 할 멍에가 아니었을지.

 

분단 역사와 싸웠던 ‘청년’ 여운형

 

▲ <현대철봉운동법>(1933)에 실린 여운형

몽양은 오랫동안 금기의 이름으로 잊히어 왔었다. 그는 정작 미 군정 측에서 명백히 부인하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면서 기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광복 60년 만에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몽양 여운형은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재일교포 역사학자(와세다대) 강덕상 교수가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도 민족통합에 대한 그의 이바지를 기리기 때문일 것이다.

 

7월 18일, 몽양 서거 69주년을 맞아 여운형이 우리 스포츠계에 남긴 업적을 재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회장 이부영)와 대한체육회, 경기도 양평군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몽양이 한국 스포츠계에서도 선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여운형은 1920년대 상하이 야구팀 코치로도 활동했다. 그는 만능의 스포츠맨이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다녀왔으며, 1920년대에는 상하이 야구팀 코치로 활약했고, 농구, 야구, 축구 등 스포츠에도 열광한 스포츠맨이었다. 독립운동 중에도 중국대학의 축구팀을 인솔하고 동남아를 순회하기도 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될 때 그는 야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중이었다.

 

<현대철봉운동법>(서상천·이규현, 한성도서, 1933)에 수록된 사진 속 몽양의 벗은 상반신은 ‘청년 여운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마흔일곱 살의 여운형은 기꺼이 웃통을 벗었다. 그 당당한 파격이 죽음을 불사하고 분단으로 치닫는 역사와 맞서 싸웠던 몽양의 힘과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2016. 7.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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