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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필사용 시집, ‘큰언니’와 노년 세대에 건네는 ‘따뜻한 연대’

by 낮달2018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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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영라 엮음, <나는 오늘 시를 쓴다>(리아앤제시, 2024)

▲ 나는, 오늘 시를 쓴다, 리아앤제시, 2024, 16,900원

요즘 누가 시를 읽는가 싶지만, 뜻밖에 이른바 ‘엠제트(MZ)’ 세대가 아주 시와 거리가 멀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난해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전체 시집 판매 비중의 25%를 20대가 차지했고, 30대가 20.4%를 기록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고 나면, 은근히 젊은이들을 나무라고 싶었던 노년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요즘 것들’은 인스타그램에 필사 인증사진을 붙이는 등, 필사에도 동참하고 있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신문도 읽지 않으며, 유튜브의 짤막한 동영상만 즐긴다고 은근히 ‘라떼’(나 때) 버전을 시전하고 싶은 그 윗세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반전이다. [관련 기사 : 인스타에 필사 인증사진MZ세대에 부는 시집 열풍]

 

필사는 ‘베끼어 씀’이니 무어 대단한 일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시를 필사하는 건 여느 필사와는 다른 울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건 실용적이거나 사실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쨌든 그보다 더 윗길의 고등한 정신 영역과 이어지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필사, ‘신중년’에게도 권해보자

 

필사는 젊은이들만 하는 게 아니다. 육십 고개를 넘어도 감히 노년이라고 부르기 거시기한 시대지만, 깜빡깜빡 불빛처럼 점멸하다가 스러지곤 하는 기억을 붙들고 씨름하기도 그들이 감당해야 할 노화의 한 목록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시 필사 가이드’가 나왔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출판사 리아앤제시에서 낸, ‘하루 15분, 나를 만나는 순간’이라는 부제를 단 필사 시집 <나는, 오늘 시를 쓴다>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신중년을 위한 특별한 시 필사 가이드’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노년’ 대신 ‘신중년’이라고 쓴 것은, 어쨌든 출판사 측의 배려라고 여기고 넘어가자.

▲ 책은 왼쪽 짝수 쪽에 시를, 오른쪽 홀수 쪽에는 필사 란을 두었다.

그런데, 이 책이 기획되어 출판된 뒷이야기가 어쩐지 애잔하다. 엮은이 이영라는 책머리의 ‘필사 시집을 엮으며’에서 “누구에게나 바라보면 마음 한 켠이 아파오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족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자신의 모습을 잊고 살아왔”다면서 자기 큰언니를 떠올린다.

 

엮은이가 태어났을 때 열일곱 소녀였던 그 큰언니는 “나이 들어가며 자꾸만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해”했다. 동생은 “그를 위해 평소 낭독을 즐기던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 시집과 공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저녁마다 소리내어 읽으면서 공책에 옮겨 적어보고 여백에는 화나는 일, 속상한 일들도 적어보라고 했”다면서.

 

그리고 그는 큰언니가 “동생이 사준 시집이라고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저녁마다 식탁에 앉아 집중해서 열심히 시들을 필사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 시인의 좋은 시들을 묶어 필사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윤동주, 김소월, 이육사, 김영랑, 이상화, 정지용 시인 등 12명의 시인이 쓴 시 60여 편을 실은 필사 시집의 출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제안하는 ‘필사 시집’

▲ 시집의 속 표지.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바쁜 일상에서 “부모님께 깊은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방법을 제안하는 책”으로 소개한다. 이 책은 “시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사람들,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분들, 그리고 어렸을 때 외웠던 시가 있는 부모님에게 적합한 도서”라고 하면서 “하루 15분, 시를 필사하면서 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권한다. 또 “신중년을 위해 큰 글씨로 제작되어 시각적인 편안함을 제공”하니 더 이를 게 없다.

 

시집을 펴면 왼쪽 짝수 쪽은 시, 오른쪽 홀수 쪽에는 괘선이 인쇄된 필사 면이다. 공공누리 어문 부문에 따른 공공저작물을 이용한 시집이니 시인들은 모두 해방 전에 활동한 초기 시인들이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일별하는데, 소월의 시 ‘초혼’이 한눈에 들어온다.

 

초혼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쯤에 외운 시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서점에 가서 산 책이 ‘소월 시집’이었다. 그 시집에서 ‘진달래꽃’이나 ‘못 잊어’ 같은 시가 아니라, 격정을 분출하는 이 시가 열네 살짜리 중학생을 압도한 것이었다. 나는 그 시를 달달 외웠는데, 지금도 나는 그걸 빼먹지 않고 암송할 수 있다.

 

시효(時效)로 말하자면 중학교 때 외운 시가 가장 길다. 고등학교 때 외운 시도 몇 편 있는데, 그건 가끔 한 대목을 빼먹기도 하는 등 온전하지가 않다. 성장기 가운데 중학 시절이 아마 그중 정신이 초롱 같을 때여서일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는 우리 세대만 해도 중고등학교 때 시 한두 편을 외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워낙 누릴 만한 문화가 모자랐던 시대여서지만, 시편 암송하기도 그 시절 학생문화의 일부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건 이미 사람들이 잊어 가고 있는 ‘아날로그의 시대’의 자취로만 기억될 뿐이다.

 

필사로 얻는 건 ‘한갓진 추억’만이 아니다

 

이 시집을 선물 받은 ‘신중년’은 시집에서 재회하는 까마득한 과거, 10대나 20대, 청춘의 시기에 읽거나 외웠던 시를 새로 필사하면서 무엇을 환기하게 될까. 가난했지만, 메마르지 않았던 그 시대의 습기 같은 것, 그리고 그 갈피 속에 깃든 한갓진 추억일까.

 

모르긴 해도, 청춘의 시절에 읽은 시를 필사하면서 사람들은 단순히 추억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편에 서린 그리움과 아픔을 복기하면서 숱한 세월을 넘어온 자신과 우리의 현재를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필사하며 청춘의 시간을 떠올리는 어른을 바라보면서, 어른의 마음에 평화와 성찰의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고 여길 수 있다면, 당신의 선물은 최선, 최상의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2024. 10. 2. 낮달


지인을 통해 엮은이 이영라 님이 쓴 글 한 편을 받았다.

그가 큰언니를 생각하며 쓴 이 글은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오랜 세월과 삶의 연대로써 동기간의 사랑과 우애를 환기해 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글이다.

 

 

나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이영라

 

 

그녀의 이름은 이철수. 집안 돌림 글자도 아니면서 집집이 딸들의 이름에 ‘수’ 자를 붙여서 잠수, 기수, 판수……, 지금 보면 하나도 예쁘지도 않은, 학교 가면 놀림이나 받기 좋은 그런 이름 중의 하나를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아버지는 6·25 전쟁터로 나가시고 층층시하에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하는 엄마 밑에서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자랐습니다.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무사히 살아 돌아오시고 줄줄이 동생들이 태어나 늘 동생들을 업어 키우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엄마 아버지가 씨롱씨롱 타작을 하시면 동생을 등에 업고 문에 붙어 서서 바늘로 꼭꼭 찍어 가족들 이름을 썼습니다. 이종상, 이순덕, 이철수, 이희태…… 그것도 지루하면 방안에서 마당을 내다보고 앉아 타작 소리에 맞추어 문지방을 두드렸습니다.

 

바쁜 농사철이면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일을 거들며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에도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나중에는 학교 가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가려니 쌀 한 가마니가 없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근처에 중학교가 생겨 6살 아래 남동생이 입학할 나이가 되니 나이가 너무 많아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줄줄이 동생들은 태어나고 제가 태어났을 때 철수 언니 나이는 이미 17살이나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름을 고민하던 차에 언니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영나’라는 이름이 예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영나가 되어 11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한자 이름이 ‘길 영, 비단 라’라고 ‘영라’라고 바꿔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 이름은 ‘이영라’가 되었습니다. 이름에 특별한 뜻은 없지만 듣는 사람마다 그 시대에 그 이름은 참 특이하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제 이름을 지어준 이는 큰언니인 이철수입니다. 3남 3녀 6남매의 맏이이자 3남의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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