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세상을 움직이는 세 가지 ‘엘(L)’ 자 - 사랑, 자유, 노동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1992)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세 가지 ‘엘(L)’ 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각각 ’사랑(Love), ‘자유(Liberty)’, ‘노동(Labor)’이다. 앞의 ‘사랑’과 ‘자유’가 마음의 영역과 가깝다면 ‘노동’은 몸과 이웃한 영역이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형식의 활동이다.
노동을 ‘정신’과 ‘육체’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건 일종의 관행처럼 보인다. 몸의 근력을 소비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게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구분에 익숙하다. 노동은 눈에 보이는 상품 생산을 위한 활동일 뿐이라는 생각을 잘 넘지 못하는 것이다.
‘노동’이라고 하면 내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신 고 이소선 여사의 연설이 떠오른다. 1990년대의 어느 해 노동절 집회에서였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운집한 대회에서 이소선 여사는 똑 부러지게 노동이 세상을 만들고 지탱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다.
“여러분, 여기 어떻게 왔어요?”
“기차 타고요!”
“버스요!”
“비행기요!”
“그거 모두 누가 만든 거지요?”
“노동자요!”
세상을 움직이지만 ‘노동’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국내 유수의 철강회사 기업 이미지 광고 카피는 ‘쇠[철(鐵)]’가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고 ‘세상의 베이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세상의 베이스(base)가 되’어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다. ‘세상의 베이스가 되’어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쇠를 만드는 것이 노동인 것이다.
‘노동’은 ‘일’이고 ‘노동자’는 ‘일하는 사람’이다. 노동이란 낱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는 ‘일’하면서 삶과 세상을, 그 역사를 만들어 왔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늘 내 출근을 ‘일하러 가는 것’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아내는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묻지만, 어머니께선 “일 안 가냐?”고 묻고 하셨다.
아내는 내 교육노동을 특정해 말했지만, 어머니는 만국 공통,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낱말 ‘일’로 내 노동을 꿰뚫어 보았던 셈이다. 우리는 ‘일해서 벌고’ 그걸로 살아간다. 최근 펴낸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그랬단다. ‘일’은 ‘물려받는 방법을 제외하면 돈을 소유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은, 일하는 사람의 구실은 대체로 기억되지 않는다. 일(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사물 앞에서 사람들은 땀 흘려 그걸 만든 사람을 기억하기보다는 그것을 발주한 자본과 권력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노동과 노동자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 방식에 질문을 던진 사람은 독일의 사회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이다. 그는 시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을 통해 역사 속에 스러져 간 노동과 노동자를 사람들 기억의 수면으로 떠올린다. 그는 ‘독서하는’ 노동자다. 독서는 자기 삶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책을 읽으면서 노동자는 묻는다.
7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Thebe)’를 건설한 이는 누구인가. 그는 책에서 왕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바윗덩어리를 운반한 이들, 그러나 잊힌 사람을 떠올린다. 바빌론과 만리장성, 개선문과 비잔티움, 그리고 아틀란티스까지 인간의 역사가 세워 올린 제국(帝國)과 도시,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건축물 따위를 생각한다.
그는 책을 읽으며 인도를 정복한 알렉산더를, 갈리아를 무찌른 시저를,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리드리히 2세를, 침몰하는 스페인 함대 앞에서 흘리는 펠리페 왕의 눈물을 생각한다.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기리지만 그 승리는 그만의 것이었는가를 묻는다.
승리로 점철된 역사, 그 승리자들의 연회를 위해 요리를 만든 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위해 사람들이 치른 희생과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에는 ‘그만큼 많은 의문’이 존재하는 것. 그 의문에 답을 해나가는 것, 그것이 노동자가 비로소 삶의 세상의 주인으로서 서는 첫걸음이었으리라.
7·30 재보선 투표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정치인들은 몸을 낮추어 표를 구하지만, 권력과 지위를 얻고 난 다음에 그 표의 주인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의 열망과 희생 위에 찾아진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는 몇몇의 공로로만 기록되고 잊힌다.
노동, 시공을 넘어 세상을 바꾸어 간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족들은 보름이 넘는 단식 끝에 쓰러지고 있고, 아직도 열 명의 실종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권력은 휴가를 떠났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를 다르게 세상을 바꾸겠다던 약속은 헛된 맹세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도 자신들에 의해서 역사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역사가 갈피마다 명멸했던 숱한 왕과 장군, 영웅들로 기억되듯 자신들의 결단이 세상을 바꿔 간다고 믿는 이들의 착시 말이다. 갈피마다 뒤바뀐 역사의 이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무명의 시민들, 그들의 노동과 땀, 투쟁이 있다는 걸 그들은 자주 잊고 있다.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일과 노동은 세상을 바꾸는 실마리가 된다. 그것이 닿는 순간, 무엇이든 가공되고 변형되고 창조된다. 노동으로 세상은 존재하고, 움직이며, 발전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사랑’과 ‘자유’와 함께 ‘노동’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는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2014. 7.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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