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의 재현, 구미 임은동 만세운동
지난 4월 8일, 구미시 임은동 소재 왕산초등학교 강당과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일원에서 소리극 ‘왕산 허위 선생’과 100년 전의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열렸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한 달여 후인 4월 8일에 구미 임은동 동산에서 벌어진 야간 만세운동을 꼭 100년 만에 재현한 것이다.
이날 왕산초등학교 강당에서 베풀어진 영남민요연구회 구미지회의 소리극 ‘왕산 허위 선생’은 왕산의 주요 행적을 연극으로 재현하면서 사이에 토속민요를 연창하는 방식의 공연이었다. 이 행사는 영남민요연구회의 제11회 ‘구미아리랑제’를 겸한 행사였다.
왕산초등학교 강당에 들어설 때만 해도, 관객이 얼마나 올지 등에 대해서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는데 행사 시작 전에 금방 강당이 차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참여가 많았고, 지역 주민들도 적지 않게 참석했다.
한 시간 남짓 공연한 소리극도 수준 이상이었다. 왕산의 행적을 재현한 이들은 연극배우들, 그리고 사이 사이에 영남민요연구회 회원들의 토속민요가 연창 되었는데, 이질적이지 않을까 염려했던 연극과 민요의 조화는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공연이 끝나자 민요연구회 풍물의 선도로 “다시 그날의 함성으로” 펼침막을 앞세우고 참가자들은 500m 거리의 왕산허위선생기념관으로 태극기와 엘이디 등을 흔들며 행진했다. 왕산기념관 앞마당에 마련된 연단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베푸는 4·8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이어졌다.
4·8 임은동 만세운동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임은동의 강용준(姜龍浚)·유시동(劉時東)이 의거를 계획한 후, 1919년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 주민을 규합하여 임은동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개한 만세운동이다.
이 소식을 듣고 4월 9일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이미 종적을 감추었기에 한 사람도 붙잡히지 않았다. 일본 군인과 경찰은 4월 15일, 다시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붙잡아 갔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련 재판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당연히 이들 가운데 아무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구미 지역에서 3·1운동 공적으로 서훈을 받은 이가 33분인데 이들은 모두 진평동과 해평면 출신이다. (구미 지역 독립유공자 현황 참조)
행사는 어린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돌아가며 낭독하고,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독립군가를 부르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행사는 구미 지역 독립유공자 57분의 이름을 사회자가 선창하고 참가자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는 행사에서 절정에 달했다.
행사는 만세 삼창을 끝으로 밤 9시를 넘겨서 끝났다. 행사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당초 이 행사는 구미지회(지회장 전병택)가 기획했으나 구미시와의 협의가 순조롭지 못해서 결국 구미시는 낮에, 민문연 행사는 밤에 치러진 것이었다.
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들의 후원과 성금으로 이루어진 행사였기에 오히려 뜻깊었던 행사였다. 첫 행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다지면서 치러질 2020년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다.
2019. 4.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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