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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치기, 7·80년대 농촌 부녀자들의 쏠쏠한 벌이였다

by 낮달2018 202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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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지시로 ‘특허 포기’한 발명자 유족의 손배소 승소가 소환한 7·80년대

▲ 1975년 8월, 경북 김천시 감문면 송북동 산골 마을의 처녀들이 한데 모여서 홀치기를 하다가 찍은 사진. ⓒ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어제 날짜 <한겨레>에서 읽은 기사 하나로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잠깐 회한에 젖었다. 법원이 박정희 정권 당시 정부의 불법 구금과 강요로 염색 기술 특허권을 포기해야 했던 발명가 유족에게 국가가 7억 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뉴스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지시로 홀치기특허 포기법원 유족에 이자까지 23억 배상하라]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재판장 이세라)는 특수염색 기법인 ‘홀치기’를 발명한 고 신 아무개 씨의 자녀 2명에게 국가가 총 7억 3천만 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는데, 이들이 받을 돈은 모두 23억 6천여만 원이다.

 

기사가 일깨운 70년대의  ‘홀치기’

 

신씨는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한 기업을 상대로 손배소송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홀치기 수출조합 쪽의 민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이의 해결을 지시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신씨를 연행하여 불법감금과 폭행으로 회유하자 신씨는 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신씨는 2015년 사망했고, 유족이 과거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여 작년 2월에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뒤 속개된 재판에서 이 같은 판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박정희 독재 17년(1962~1979)의 상처와 고통은 그의 죽은 지 반세기가 가까워지는데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관련 기사 : 염색 특허 포기하라남산 끌고 간 중앙정보부박정희 지시였다]

 

▲ 홀치기 틀. 다른 말로 오비틀, 비단틀이라고도 불렀다.

일본에서 학교를 나와 1960년대부터 홀치기 가공업에 종사한 신씨가 발명한 특허 ‘홀치기’는 특수염색 기법이다. ‘홀치기’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물들일 천을 물감에 담그기 전에 어떤 부분을 홀치거나 묶어서 그 부분은 물감이 배어들지 못하게 하여 물들이는 방법”이라고 풀이하는 염색법이다.

 

홀치기는 비단 천에 빽빽하게 인쇄된 연회색 점을 농촌의 부녀자들이 ‘홀치기 틀’, 또는 ‘비단 틀’이라는 이름의 도구로 홀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홀치기로 완성된 천은 염색하면 홀친 부분만 염색이 되지 않아서 매우 아름다운 무늬가 염색되는 것이었다.

 

이 비단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기모노의 허리 부분에서 옷을 여며주고, 장식하는 띠인 오비(帯, おび)로도 만들어졌던 듯하다. 홀치기로 쏠쏠하게 벌 수 있었던 시골 부녀자들이 홀치기 틀을 달리 ‘오비틀’이라고 부른 것은 그래서였다.

▲ 홀치기 염색으로 만든 옷감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홀치기 틀은 몇 안 되지만, 매우 눈에 익은 모습이다. 깔고 앉을 수 있는 긴 나무판에 직각으로 세운 각목의 끝에 앞으로 늘어뜨린 낚싯바늘 모양의 바늘이 고정된 형태다. 이 틀을 들고 농촌의 처녀들, 부인네들은 이웃의 안방이나 마루에 모여 앉아 담소하면서 저마다 홀치기에 열중했다. 이들의 대화가 끊어지면 방안에는 저마다 바쁜 손놀림에 달그락거리는 홀치기 소리만이 가득 차곤 했다.

 

 “천의 어떤 부분을 홀치거나 묶어서 그 부분은 물감이 배어들지 못하게 물들이는 방법”

 

돌아가신 어머니도 한동안 홀치기를 하셨는데, 마실 온 이웃 할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홀치기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홀치기는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시골에서는 그만한 벌이가 없었다. 그 당시 1마(91.44cm)를 완성하면 2만 5천 원을 벌었으니, 2마면 5만 원으로 그건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니 말이다.(경북기록문화연구원 자료)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은데, 고향에 홀치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970년대였던 듯하다. 혼기를 기다리는 처녀들이나 농한기의 부인네들이 무리 지어 이 부업에 매달린 것은 시집갈 때 살림 밑천을 마련하거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 홀치기 틀. 맨 아래 나무판은 깔고 앉는 용도였다.

베이비붐세대인 나는 1960년대의 마지막 해에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우리 동기 130여 명 가운데 반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감했다. 3년 후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들은 그 가운데 반수도 채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동기들 가운데, 여자아이들은 대구의 섬유공장 노동자가 된 아이들을 빼면 모두 집안 살림을 돕거나 홀치기 같은 부업에 매달려야 했다. 1960년대는 가히 절대빈곤의 시대였으니, 우리 동무들 가운데 점심을 싸 오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유소년 시절의 배를 곯았던 동무들은 꽁보리밥에 질려 성년이 되어서는 보리밥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관련 글 : 44, 초등학교 동기회 이야기]

 

그 시절 우리는 명절이나 방학에 모여 밤을 새우며 놀기도 했다. 남녀 구분 없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부르고,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그때의 동무들은 이제 칠순이 되었거나 앞두었으며 몇몇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수명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때, 여자들이 즐겨 입었던 월남치마 차림으로 홀치기틀을 들고 마실 오던 여자 동무들을 생각하며 나는 잠깐 회한에 젖었다. 1980년대 들면서 홀치기는 시나브로 사라졌고 여자 동무들은 하나둘 시집을 갔으며, 우리는 어느새 칠순에 이르렀다.  지나간 시간이란 모두에게 회한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새삼 곱씹으며 달력을 물끄러미쳐다본다.  

 

 

2024. 8.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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