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정권의 방송’으로 존재를 증명하다
한국방송(KBS)이 광복절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쓰인 오페라(푸치니의 <나비 부인>)와 이승만 미화 논란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뒤 분노한 시청자와 시민들의 항의로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사태에 분노한 시청자들의 청원은 8월 16일 오전까지 5천400건 이상 접수되었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본 사장이 사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79돌 광복절, KBS는 첫 방송과 끝 방송으로 ‘친일·매국’ 방송이 되었다
광복절을 부정하고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를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인사 참사에 대한 분노가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광복절에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와 일본 전통 복식인 ‘기모노’가 배경으로 나오는 오페라를 방송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KBS에 성난 시청자들의 ‘수신료 거부’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속전속결로 ‘수신료 분리 징수’를 시행하고자 한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전 정권 시절에 짜인 공영방송 체제가 자신들에게 비우호적(불공정한)인 방송을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한국방송과 문화방송(MBC)을 공격해 온 현 정부는 ‘수신료 분리 징수’라는 방식으로 한국방송에 보복하려 했다. 여소야대의 국회 구조상 법률을 바꾸는 게 어려우니 졸렬하게도 시행령을 고쳐서 수신료 수입에 타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한국방송을 흔들려 한 것이다.
이에 나는 2023년 8월 10일에 “‘수신료’ 분리 징수, ‘땡윤 뉴스’를 얻는 대신 ‘공영방송’을 잃는다”라는 글을 썼다. 최소한 수신료 수입이 끊긴 공영방송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재난방송 등 공공서비스가 대폭 줄어들고, 재원 구조도 광고에 의존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수신료 수입의 격감으로 광고 확보와 시청률 경쟁에 내몰리게 되는 것은 상업방송과 차별화된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내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공지한 수신료 분리 고지를 신청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 외에도 수신료가 ‘TV를 가진 전기 사용자가 내야 할 의무’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수신료를 내지 않을 방법이 따로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지적한 바 있다. [관련 글 : ‘수신료’ 분리 징수, ‘땡윤 뉴스’를 얻는 대신 ‘공영방송’을 잃는다]
한국방송은 수신료 수입으로 운영하는 방송사인데 당장 경영진을 바꿀 수 없으니 정권은 수신료에 타격을 가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인데, 이는 그야말로 ‘자해적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임기가 끝난 공영방송 이사진을 정권의 입맛대로 바꾸면, ‘국민의 방송’ 대신 ‘정권의 방송’을 만드는 건 그간 역사로 봐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전 정권에서 임명한 이사들의 임기 만료를 기다리지 못하고 수신료로 방송을 흔드는 것은 그야말로 근시안적 행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KBS 새 사장으로 박민이 임명되면서 우려된 문제는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KBS를 ‘접수’한 박민 사장은 전광석화같이 뉴스 진행자와 시사 프로그램 패널 등을 갈아 치우고, 시사 프로그램도 일거에 폐지했다. 시청자들은 망가져 가는 공영방송 KBS의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관련 글 : 망가져 가는 공영방송 <KBS>, 반복되는 ‘퇴행의 데자뷔’](2024.1.5.)
2024년 들면서 경영진과 간부들이 바뀐 KBS의 시청·청취율은 급전직하 내리막길로 꼬라박기 시작했다. KBS라디오의 유튜브 채널 조회수는 천만 대에서 백만 대로 떨어지면서 이른바 ‘폭망’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국민의 방송’ KBS는 ‘땡윤 방송’, ‘박민의 방송’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은 공영방송을 장악한 ‘사장의 성공’이었지만, ‘공영방송의 처절한 실패’였다. [관련 글 : KBS 사장의 ‘성공’, 혹은 망가진 ‘공영방송’](2024.2.18.)
박민의 KBS는 그 이유도, 앞으로의 계획도, 회사 내부자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가의 보도처럼 빼든 ‘수신료 분리 징수’도 어물쩍하게 거두어들였다. 신년 대통령 특별 대담 방송 뒤에 후폭풍은 드세어져 마침내 KBS는 ‘대통령실 TV’로,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는 ‘대통령 비서’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채상병 청문회도 중계하지 않은 KBS, 마침내 수신료 거부에 맞딱뜨리다
그간 박민의 KBS가 보여준 모습은 그가 취임하면서 약속한 ‘자기 혁신’도 ‘국민의 신뢰’와는 무관한 ‘땡윤 방송’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였다. 보수 친여 매체로 알려진 종편 채널까지도 중계한 ‘채상병 청문회’조차 방송하지 않은 유일한 방송 KBS는 이번 광복절 방송에서 그간 쌓아온 시청자들 분노를 임계치까지 끌어올려 버렸다.
“기미가요에 수신료 내라고?”
“매국노엔 10원 한 장 못 줘.”
“내선일체를 꿈꾸는 듯한 매국노들에게 십 원 한 장 줄 수 없다.”
“왜 수신료를 내고 친일 방송 봐야 하나.”
“매국 방송 만들라고 수신료 내는 게 아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오른 게시물은 그간 망가지는 방송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청자들의 분노가 날것으로 묻어나고 있다. 수신료 거부는 그러한 분노한 정서가 행동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다. 시청자들이 ‘매국 방송’, ‘친일 방송’, ‘매국노’ 따위의 낱말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 [관련 영상 뉴스 : ‘기미가요 KBS’ 거센 후폭풍…박민 사과에도 “물러나라” (2024.08.16./MBC뉴스) / “기미가요에 수신료 내라고?”…“매국노엔 10원 한 장 못 줘” (2024.08.17./MBC뉴스)]]
한 커뮤니티에서는 KBS가 대부분 가져가는 TV 수신료 납부 대신, EBS에만 수신료를 내는 방법에 대한 글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매월 세대당 2,500원씩 내는 EBS에는 ‘19만 개의 프리미엄 콘텐츠’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구독 서비스’가 있는데 이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2,500원 중 한전이 가져가는 징수 수수료169원(7%)을 빼면 KBS가 2,261원(90%), EBS 70원(3%)으로 나뉘는데, 현실적으로 70원을 매월 EBS에 내는 방법은 있을 수 없으니 구독 서비스 같은 방식으로 EBS를 돕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EBS 구독 서비스 바로가기]
아무리 밉고 싫어도 방송법에 규정된 의무금인 수신료를 아주 안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은 언젠가 가산금까지 덧붙여서 수신료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난 시청자들은 그걸 거부하자고 뜻을 모으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공영방송으로서 있을 수 없는 망발을 저지른 KBS를 응징하겠다는 시민의 의지다. 시민들은 더는 KBS가 공정, 불편부당, 신뢰 따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광복절 특집 KBS <9시 뉴스>를 두고도 KBS기자협회의 내부 비판이 이어졌다. “광복절 당일 <9시 뉴스>는 별도의 기념식이 열린 이유를 거의 담지 못했고, 일제 침탈 역사에 대한 언급이 빠진 대통령 경축사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기자협회는 “대신 <9시 뉴스>를 가득 채운 건 ‘한강의 기적’과 ‘경제성장’이었다”며, “한강 변천사와 광복절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고 남북한 국력 비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오페라 방영 이후 시청자 항의가 빗발치자 결국 사과를 했지만, 그날 마감 방송은 논란을 부른 이승만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은 예정대로 방영됐다. 이에 시청자들의 비난이 이어지면서 언론·시민사회 단체 등은 물론 KBS 구성원들도, 박민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3년만 참으면 된다 : 3년은커녕 3달도 너무 길다’ 사이
KBS는 박민 사장 이후 경영진과 간부진이 바뀌었다는 사실 외에 달라지지 않았다. 정권은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바꾸고 간부진을 갈면 자신의 의도대로 방송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직도 시청자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방송으로 여겨지지만, 정권에 미운털이 잔뜩 박힌 MBC 역시, 정권이 ‘접수’하는 건 시간문제다. 이 데자뷔로부터 우리 방송 수용자들은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3년만’ 참으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3년’은 참고 기다리기엔 ‘너무 길다’라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져 간다. 야권과 시민사회의 합의로 제정한 방송4법은 다시 대통령 거부권에 막혀서 국회로 돌아왔다. 이 법도 그간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에 막혀 폐기될 수밖에 없었던 법률안과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할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연되는 방송 장악, 언론 장악 논란이 더는 되풀이되지 않아도 되는 날을 언제가 될 것인가. 그걸 위해서 시청자들이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 있을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유튜브 채널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2024. 8.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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