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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기러기와 오리 못’에서 나무와 전각 그림자 담는 ‘월지(月池)’로

by 낮달2018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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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여행] ①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 20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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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궁과 월지는 '신라 조경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현재 동궁과 월지는 원래 모습의 일부에 그칠 뿐이다.  ⓒ 경주시
▲ 삼국사기는 문무왕 14년(674)에 연못인 '월지'를 조성하고 삼국통일 뒤 679년에 '동궁'이 지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경북매일신문

아내의 생일을 맞아 서울에서 아들애가 귀향했다. 현충일엔 집에서 쉬고 다음 날(7일) 오후에 집을 나서 경주로 향했다. 굳이 길을 서두르지 않은 것은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의 야경을 찾아가는 길이어서다. 경주는 올 1월에 동료들과 함께 찾은 동궁과 월지의 밤 풍경에 혹한 내가 추천한 여행지였다.

 

10년 만의 경주 여행

 

우리 가족은 2013년 8월에 포항에 다녀오다가 잠깐 계림과 첨성대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듬해 2월에는 아이들 외할머니를 모시고 역시 포항에 가서 회를 먹고 돌아오다가 동궁과 월지를 돌아보았다. 장모님은 이듬해인 2015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셨고, 그새 10년이 훌쩍 흘렀다.

 

오후 4시께 대릉원에 닿아 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의 고분군을 둘러보고 첨성대와 계림을 돌아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평일이라고 괜찮으리라고 여겼는데, 오산이었다. 대릉원은 말할 것도 없고, 첨성대 주변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 동궁과 월지의 북서쪽에 있는 제5건물터 복원 건물. 이 사진만 DSLR 카메라로 찍었다. 나머지는 모두 아이폰 사진이다.

임시 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승용차를 타고 동궁 쪽으로 3Km 남짓한 거리를 가는데, 좋이 30분이 걸렸다. 동궁과 월지에 들어가니 거긴 훨씬 더 붐비고 있었다. 여행은 주말에 다닌다는 건 이미 옛말이 됐다. 시간과 여유가 있는 이들은 굳이 평일과 주말을 가릴 필요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초등학교 때 들른 ‘안압지와 임해전

 

동궁과 월지를 처음 찾은 게 초등학교 4학년 때 6학년 언니들 따라간 수학여행으로 1966년이다. 경주를 거쳐 부산을 다녀오는 여정이었는데, 워낙 오래전이라, 내겐 불국사를 찾았던 기억만 희미하다. 당시에는 물론 ‘동궁과 월지’가 아니라 ‘임해전과 안압지’였다.

 

문무왕 14년(674)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연못인 ‘월지(月池)’가 조성되었고, 삼국통일 뒤 679년에 ‘동궁(東宮)’이 지어졌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인 월지는 남서쪽의 둘레는 직선이지만, 북동쪽은 구불구불한 곡선이라 어느 곳에서도 못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없다. 이 연못의 조경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동궁에 속한 중심 건물을 ‘임해전(臨海殿)’이라고 부른다.

▲ 월지 안의 섬에는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한다.
▲ 월지의 야경. 직선으로 된 연못 서쪽의 높다른 석축 위에 올라앉은, 연회가 열렸던 누각 건물들

동궁(東宮)은 법궁의 동편이 있는 궁으로, 주로 왕세자나 황태자가 거주하는 곳이다. ‘세자궁’이나 ‘태자궁’이라고도 하는데 경주 동궁은 신라의 동궁이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동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폐허의 연못에 노니는 기러기와 오리로 조선시대에 ‘안압지’로 불림

 

월지는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안(雁)]와 오리[압(鴨)] 떼가 있는 연못이라 하여 ‘안압지’라는 불리었다. 원래 신라시대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 있던 자리가 허물어져 폐허가 된 뒤, 옛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 떼가 날아들면서 이른바 ‘황성 옛터’가 된 셈이다.

 

1975년부터 2년간 시행된 발굴로 일제 강점기에 동해남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回廊) 터를 비롯하여 다섯 군데의 누각 터를 비롯해 건물지 31곳, 선착장이 드러났고 함께 3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보상화무늬(寶相華文:‘보상화’라는 가상의 식물을 새긴 무늬) 벽돌에는 ‘조로(調露:당나라 고종 때 연호) 2년(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월지에서 출토된 보상화무늬(보상화라는 가상의 식물을 새긴 무늬) 벽돌
▲ 야간 조명으로 드러나는 전각과 섬의 나무들이 연못에 비치는 환상적 풍경은 동궁과 월지를 야간 비경의 명소가 되었다.

이때의 발굴로 안압지에서 ‘月池(월지)’와 ‘東宮(동궁)’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신라시대에 이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안압지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된 것은 2011년에 이르러서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조경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현재 동궁과 월지는 원래 모습의 일부에 그칠 뿐이다. 현재까지 동궁과 월지에는 3동의 전각을 복원했는데, 이 복원도 잘못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원형의 모습을 반영하여 복원한 듯하지만, 월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630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신라 왕경 복원 사업의 하나로 동궁과 월지 복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네스코는 충분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 상태에서 무리한 복원을 추진하는 데 반대의견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 월지에서는 무려 3만 점에 이르는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 동궁과 월지 모형 복원도. 현재 동궁과 월지의 복원은 유네스코의 반대로 중지되어 있다.

한 시간 남짓 인파 사이로 동궁과 월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가지고 간 카메라 대신 휴대전화로 동궁과 월지를 촬영했다. 이소(ISO)를 1만 이상으로 올려도 외부 조명이 비치지 않는 대상을 흔들림 없이 촬영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 대신 올 4월에 바꾼 아이폰으로 월지의 야경을 담았다.

 

어둠 속에서 조명의 도움을 받아 떠오르는 전각과 섬, 그리고 나무들, 그리고 수면에 비친 그림자를 돌아보면서도 1천3백 년 전의 고대 국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돌아와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동궁과 월지가 더 정교하게 복원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물론 복원은 충분한 고증이 뒷받침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2024. 6.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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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주 문화관광 ‘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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