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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세밑, ‘빈자일등(貧者一燈)’을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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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사람들이 이웃에 내미는 따뜻한 손

▲ '연등'은 불을 밝힌다는 의미로, 석가모니 생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불교 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온 공양의 한 방법이었다.

불교 문학을 대표하는 3대 비유경(譬喩經) 가운데 거룩한 현자와 어리석은 범부를 대비하여 현명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교훈을 일깨우는 〈현우경(賢愚經)〉이 있다. 타인을 위한 가난한 여인의 보시(布施)를 다룬 ‘빈자일등(貧者一燈)’은 거기 실린 이야기다. 

 

‘빈자일등(貧者一燈)’,  <현우경(賢愚經)>에 실린 이야기

 

가난한 여인 ‘난타’는 석가세존이 온다는 소식에 구걸해 얻은 돈 두 닢으로 기름을 사서 등불 하나를 밝힌다. 밤이 지나 다른 등불은 모두 꺼졌으나 그 등불만은 홀로 타고 있었다. 이에 목련존자가 그 불을 끄려 하였으나, 불꽃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석가세존은 “일체중생을 모두 건지려는 큰마음을 낸 사람이 보시한 것”이므로 끌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불교를 떠나도 이 이야기는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이 베푸는 선행이 더욱 값지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2023년도 사흘밖에 남지 않은 세밑에 ‘빈자일등’의 뜻이 새삼 깨우쳐지는 소식 몇 개를 듣고 새삼 저무는 해를 돌아본다.

 

빈 병 모아 판 돈에 용돈 보태 30만 원 기부한 안동의 여든다섯 할머니

▲ 아이들 일기장 공책에 쓴 할머니의 편지.

첫 소식은 도내 안동에 사는 여든다섯 할머니 얘기다. 지난 5일 안동시 옥동에 사는 이필희(85) 할머니는 손수 쓴 손 편지와 지난 1년 동안 쓰레기장에서 빈 병을 주워다 팔아 마련한 30만 원을 들고 옥동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고 한다.

 

“내 나이 팔십다섰(섯) 마주막(마지막) 인생을 살면서도 조훈(좋은) 일 한 번도 못 해보고, 남에(의) 옷 만날 어더(얻어) 입고 살아 완는대(왔는데), 나도 이재(이제) 인생길 마주막에 조훈 일 한 번 하는 개(게) 원이라.”

 

서툰 맞춤법으로 써 내려간 편지를 읽는데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는 가난해서 늘 남의 옷을 얻어 입으며 살아와 좋은 일도 한 번도 못 했다고 고백하면서, ‘인생길 마지막에 좋은 일’을 한 번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그는 30만 원을 모았다.

 

글쎄, 그이의 삶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 30만 원은 써야 할 때도 마음을 다잡고 안 쓰고 모아서 이룬 돈일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은 그 액면가의 10배, 100배로도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할머니는 써야 할 돈도 안 쓰고 모으면서 이웃에게 그것을 대가 없이 주면서 얻을 기쁨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해도, 어떠한 다른 동기도 담겨 있지 않은, 맑고 따뜻한 마음일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니 쓰래(레)기장에 빈 병을 모아 필면(팔면) 돈이 댈(될) 것 같타(같아) 일월부터 운동 삼아 쓰래기장에 다니면 빈 병을 모아 파란는개(팔았는데) 십 원도 안 쓰고 12월 7가지(12월7일까지) 모운 개(게) 15만 원, 내 아이들 용돈 조금 주는 거 았계쓰고(아껴쓰고) 15만 원 보터(보태) 30만 원(을 모았다)”

 

“작은 돈이지만 내 인생에 첨이고 마주막으로 불으한(불우한) 어리니(어린이)한태(한테) 써 보고 십(싶)습니다.”

 

옥동은 내가 1997년부터 14년 동안 살았던 태화동 윗동네다. 거기 사신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할머니께서 건강하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시기를 빈다. [관련 기사 : 내 나이 팔십다섰, 빈 병 모아 십원도 안 쓰고” 30만원 기부]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헤아리는 개미마을의 ‘어려운 사람들’

▲ 대표적 달동네 개미마을은 저소득층과 노인층이 많은데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연탄, 등유로 난방하며 겨울을 난다. ⓒ 방방콕콕

개미마을은 인왕산 등산로변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저소득층과 노인층이 많은데 도시가스가 연결돼 있지 않아 연탄과 등유로 난방하며 겨울을 난다. 2018년 기름값이 급등하자, 많은 집이 기름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교체했고 그때부터 주민센터나 복지단체에서 연탄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마을에서는 ‘우리도 받기만 하지 말고 내자.’ 어려울 때 받았던 마음에 보답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하는 사람만 기부했는데 난방비가 올라 어려울 때 외부에서 연탄 지원을 해주자 고마운 마음에 더 많은 분이 기부에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해엔 전년도보다 12만5000원이 는 183만2000원이 모였다. 올해는 12월 24일 현재 모금액은 2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100여 가구의 개미마을(홍제3동 23·24통) 주민들은 이렇게 모은 돈을 매년 ‘희망 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성금으로 주민센터에 전달한다.

 

‘희망 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성금은 서울시와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모금하는데 지역 안의 어려운 이웃을 지역에서 돕자는 취지로 매년 겨울 서울 시내 각 ‘통’ 별로 성금을 모은다. 개미마을은 매년 모금액 상위권을 차지하는 동네라고 했다. [관련 기사 : 추위에 떨어 본 사람은 안다개미마을의 따뜻한 기부]

▲ 연탄불.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구로 우리를 성찰케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기부에 더 열성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와 실제에서 입증된 바 있다. 이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친사회적이다. 물론 동정심도 더 많다. 이에 비해 부유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하고 이기적이며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더 잘 안다 

 

부자 등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립적·이기적 성향을 보이지만, 배움이 짧은 사람일수록 ‘공감 정확도’가 더 높았다. 저학력자가 고학력자보다 오히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읽어냈다. 이는 모두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심리학자인 대커 켈트너(Dacher Keltner) 교수의 연구 결과다.

 

개미마을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잘 안다고 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이들이 모은 200만 원은 세밑에 재벌그룹이 내는 수십, 수백억 원에 비길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십시일반 정성으로 모은 성금은 부자들이 낸 거액의 성금보다 더 값지고, 아름답다.

 

서민들은 힘들지만 ‘살아지는’ 세월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이들의 지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태도가 언제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새해를 앞두고 가난한 이웃들이 밝혀서 내미는 따뜻한 ‘빈자일등’을 다시 생각해 본다.

 

 

2023. 12.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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