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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한동훈의 ‘길’과 루쉰(魯迅)의 ‘길’, 혹은 ‘희망’

by 낮달2018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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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포리즘  ‘길’과  한동훈의 ‘선택’ 사이

▲ 〈희망은 길이다 〉는 루쉰의 아포리즘을 모은 책이다. 예문서원(2003).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위기는 경험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과도하게 계산하고 몸을 사릴 때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본다.”

 

한동훈 전 장관의 ‘루쉰’ 인용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지명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낯익은 내용이라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국 작가 루쉰(魯迅, 1881~1936)이 쓴 글을 원용한 것이다. 본인이 찾았건, 주변의 도움을 받았건 간에 그건 아마도 준비한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난 토요일판 <한겨레>의 성한용 선임기자가 쓴, 한 전 장관의 인용이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성 기자는 루쉰이 쓴 ‘길’의 의미는 “한 전 장관의 말과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정치 경험 부족이 단점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루쉰의 소설 내용을 무리하게 가져다 인용한 것 같”다고 밝힌 것이다. [관련 기사 : 검사 출신 정알못한동훈에게도 벼락같은 행운?]

 

그제야 예의 글귀가 ‘루쉰의 아포리즘’을 모은 <희망은 길이다>(예문, 2003)이라는 단행본에서 읽은 것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아 서가를 뒤져서 간신히 누렇게 빛바랜 책을 찾았다. <희망은 길이다> 는 루쉰의 글에다 판화를 넣어 책을 엮은 이철수 화백이 소개한 대로 “루쉰 전집 속의 수많은 글에서 추려낸 짧고 명징한 글”이다. [관련 글 : 그래, ‘희망은 길이다]

▲ 루쉰은 중국의 신흥 목각판화 운동의 개척자였다고 한다.

‘아포리즘(aphorism)’은 “짧고 단순하면서도 진리를 드러내는 말. 격언, 잠언, 경구”를 가리킨다. 이 책은 편역자 이욱연이 “루쉰의 글들을 읽으며 밑줄을 쳐두었던 문장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희망은 길이다>는 편역자가 붙인 제목이고, 여기 실린 글들은 모두 같은 맥락의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길’은 길이되, 루쉰의 길은 희망’을 비유한 것

 

한 전 장관이 말한 ‘길’은 ‘자신이 겪지 않은 길’로, 그는 그것을 ‘선택한 결단’에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쉰이 말한 ‘길’은 본래적 의미의 길이 아니라, ‘희망’을 비유한 것이다. 루쉰의 첫 소설집 <외침[납함(咽喊)](1921)>에 실린 단편 ‘고향’에 나오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고향’, <외침[납함(咽喊)]>(1921), <희망은 길이다> 27쪽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희망’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마침내 자라고 이루어진다는 뜻이겠다. 위의 글은 위 책의 제1부 ‘희망은 길이다’에 실렸다. 맥락과 무관하게 여러 글에서 가려 뽑은 ‘길’에 관한 잠언 같은 글은 앞뒤로도 이어진다.

 

길이란 무엇이던가? 없던 곳을 밟고 지나감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던가. 가시덤불을 개척함이 아니던가. 길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다.

    - ‘생명지로(生命之路)’, <열풍(熱風)>(1919), <희망은 길이다> 20쪽

 

세상에 분투 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 ‘죽음을 슬퍼하며[상서(傷逝)]’, <방황(仿惶)>(1925), <희망은 길이다> 22쪽

 

루쉰의 저작은 근대 지식인으로서 20세기 초반 중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성찰한 문학적 결과물이다. 그의 비판과 통찰이 시대를 달리한 지금도 유의미한 것은 그의 “분노와 비판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통찰과 애정에 근거하기 때문”(이철수)이다.

▲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에 있는 루쉰의 동상.

분투로 열리는 ‘길’, 영원한 ‘희망’ 

 

그는 삶과 사랑, 희망을 말한다. 그는 ‘희망’이란 ‘길’과 같고, 인간의 노력과 싸움을 통해 열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한 시대에 한정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있는 한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루쉰은 절망에 맞선 싸움에도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분투 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길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다.”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

 

루쉰을 단순히 <광인일기>와 <아Q정전>(1921)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루쉰은 고 리영희(1929~2010) 선생이 “자신의 글쓰기 정신, 마음가짐의 스승”이라 추앙한 혁명가, 사상가다. 2018년 모두 20권에 이르는 <루쉰 전집>(그린비)을 완간한 옮긴이(이주노·유세종)들은 그를 “특정한 사고에 매몰되지 않고 사유 경계 헤쳐 나가는 집요함”, “부조리·절망에 맞선 반항인”으로 규정한다. [관련 기사 : 루쉰 사상에는 약자엔 약하고 강자엔 강한 정신이 깔려 있죠]

▲ 한 전 장관이 루쉰의 표현을 인용한 것은 맥락이 닿지 않고 부적절한 표현이다. 그가 가는 길은 처음이지만, 이미 만들어진 길일 뿐이다.

한동훈 전 장관은 대통령이 된 윤석열 전 검찰총장 휘하에 있다가 검사에서 국무위원이 되고, 다시 집권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루쉰이 말한 ‘길’을 굳이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선택과 출발’을 포장하는 표현으로 루쉰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 길은 ‘이미 나 있는 길 ’, 단지 ‘그 자신이 처음 걷는 길’일 뿐

 

‘스마트 이미지'로 알려진 한 전 정관이 루쉰의 글을 인용하는 게 멋있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국정과 집권당을 구하기 위한 그의 등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아바타’로 불리는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비대위원장 물망에 오를 때 이미  김건희 특검법은 ‘악법’이고, 김건희 여사 명품 수수 의혹은 “몰카 공작”이라고 규정하며 사실상 대통령 내외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지도. ‘길 아닌 길’도 아니다. 적지 않은 검찰 출신들이 그 길을 갔고, 그의 주군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바로 직전에 그 길을 갔지 않은가.

 

어쩌면 그 길은 숱한 정치검사들이 걸은 길로 윤이 반질반질 나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 자신이 처음 걸어보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맥락 없이 ‘생뚱맞은’ 일일 뿐이다. 

 

 

2023. 12.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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