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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실’, 사고파는 게 아니라 ‘기부’입니다

by 낮달2018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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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들어온 ‘크리스마스실’과 항결핵 운동

▲ 대한결핵협회의 크리스마스씰 쇼핑몰에서 내가 고르고 "기부"한 모빌과 에폭 마그넷 .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의 계절이 돌아왔다. 크리스마스실(결핵협회 누리집에도 '씰'로 표기하고 있지만 '실'로 써야 옳다)이라면 옛날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는 크리스마스실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 중·고 시절에는 아이들 모두가 골고루 크리스마스실을 몇 장씩 받고 대금을 나누어 낸 것 같다. 강매(?)의 반발을 무마하는 방식이었던 셈인데 그걸 불만스러워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크리스마스실은 우표를 대신해 쓰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그걸 카드나 연하장에 장식처럼 붙여서 썼다. 겉봉 우표 옆이나 봉투 뒷면 풀 붙이는 자리 중앙에다 마치 봉인처럼 붙였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실이 결핵과 관련 있다는 것, 그게 편지에다 붙이는 것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다.

 

덴마크의 우체국장이 창안한 크리스마스실

 

▲1904년에 나온 세계 최초의 실(왼쪽) 우리나라 최초 실(1932)

크리스마스실을 우편물에다 붙이는 것은 기원에 비추어보면 제대로 쓰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 결핵이 만연해 있을 때 연말마다 쌓이는 엄청난 우편물에 동전 한 닢짜리 크리스마스실을 붙이면 그 대금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많은 어린이가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고민했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우체국장 아이날 홀벨(Einal Holboell)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연말이면 쌓이는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동전 한 닢짜리 '실'을 우편물에 붙여 보내도록 하면 그 동전을 모아 결핵 기금을 마련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904년 12월 10일에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고, 이 운동은 이웃 나라로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양권에서는 1910년에 필리핀이 처음으로, 1925년에는 일본에서 실이 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실이 발행된 것은 1932년 일제 치하에서다.

 

캐나다의 선교 의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크리스마스실 운동을 펴면서 한국인들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모든 사람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하여 결핵 퇴치사업의 기금을 모으고자 했다. 이후 1940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실'이 발행되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셔우드가 간첩 누명을 쓰고 강제 추방되면서 '실' 발행도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에는 과거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동이 되어 '한국 복십자회'에서 실을 다시 발행하였다. 1952년에는 '한국 기독의사회'에서 실을 발행하였으나 크리스마스실 운동이 범국민적인 성금 운동이 된 것은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다.

 

이후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해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지만,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운동이 정체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등의 보급으로 연말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발송량이 급격하게 줄면서 크리스마스실을 통한 모금 운동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핵 발생률·사망률 OECD 1위

 

결핵은 사회·경제적 수준이나 보건의료 서비스가 미흡한 나라에서 많이 발생하는 질환이어서 흔히 '후진국형 질병'으로 분류된다. 우리나라의 신규 결핵 환자 수는 2018년 현재 인구 10만 명당 65명이 넘는다. 일본(10만 명당 15명)의 4.3배 수준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1명)보다는 5.9배가 넘으니 OECD 국가 가운데 1위를 면하지 못한다.

▲ 2017 년 세계 결핵 관련 현황 ⓒ 세계 결핵 보고서, 2018(WHO)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 결핵 보고서 2018'(아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결핵 환자 수는 3만3796명, 인구 10만 명당 환자 비율은 65.9명이고, 신환자는 2만6433명, 사망자는 1800명으로 하루 평균 72.4명의 결핵 환자가 새로 발생하고 4.9명이 사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는 10만 명 당 결핵 발생률이 70명, 사망률이 5명으로 OECD 35개 회원국 중 1위다. OECD 평균 10만 명당 결핵 발생률 11.1명, 사망률 0.9명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이다.

 

올 3월,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2018년 결핵 환자 신고현황'에 따르면 결핵 신규환자는 2011년 최고치(3만 9557명) 이후 7년 연속 감소하는 추세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결핵 발생률은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2017년 기준 10만 명당 5명이니, 셔우드가 1928년 해주에 결핵 요양원을 설립, 가난한 환자를 돌보던 때의 한 해 결핵 사망자 수 5만 명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 수치도 OECD 평균(0.9명)보다 5배가 넘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결핵은 한때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내 어릴 적 단짝 친구의 삼촌도 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멀지 않은 친척 가운데서도 이른바 '폐병'으로 세상을 버린 이가 적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해방 전에 죽은 시인·작가 가운데서 결핵으로 세상을 마감한 이도 만만찮을 것이다. 시인 이상과 작가 김유정을 데려간 질병도 결핵이었다.

▲ 크리스마스실 쇼핑몰에서 기부를 기다리고 있는, 제주도와 해녀 문화를 담은 그린 실. 왼쪽부터 마그네틱, 모빌, 머그 컵.
▲ 결핵협회가 쇼핑몰에 공개하고 있는 2018 년 기부금 모금액과 사용 현황 .

30년이 다 돼가는 오래된 일이지만 나도 한때 결핵을 앓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결핵의 발병을 확인하고 약 1년 가까이 투약 치료를 한 것이다. 그때 결핵을 앓았던 흔적이 지금도 방사선 사진을 찍으면 희미하게 흉터로 남아 있다. 결핵이 내게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예방주사를 맞고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도 없는데 결핵은 줄지 않는다. 전문의들은 그 이유를 '약이 안 듣는 결핵, 항생제에 저항력을 기른 새로운 내성 결핵' 때문이라고 본다. 글쎄, 매년 죽어가는 이들이 모두 그런 내성 결핵 환자이기 때문일까.

 

흔히들 '잘 먹고 푹 쉬면' 낫는 병이라는 결핵 사망자가 줄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 수월해서 그렇지, 없는 사람들이 '잘 먹고 푹 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노숙자들이 쉽게 결핵에 걸리는 것은 환경 탓도 있지만 그들의 삶이 가진 한계 때문인 것이다.

 

항결핵 운동의 상징, 크리스마스실 운동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항(抗)결핵 운동의 상징이다. 결핵예방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 모금의 목적은 '결핵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국민에게 알리고 결핵 퇴치사업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세상의 변화가 모금의 걸림돌이다.

 

대한결핵협회도 이 시대 흐름에 부응하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표 모양은 전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어가지만, 스티커 형태로 제작하고, 전자파차단 소재를 사용한 그린 실(Green Seal)을 발행하였다. 국민의 호응을 얻고자 김연아와 뽀로로, 프로야구 등 디자인 소재도 다양화했다.

▲ '세계평화의 섬 제주도와 해녀 문화'를 주제로 한 2019년 크리스마스실. 10장 1세트에 3천원을 기부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실, 사고파는 게 아니라 '기부하는' 거다

 

2019년도 크리스마스실은 "세계평화의 섬 제주도와 해녀 문화"가 주제다. 3천 원을 기부하는 기존 실 외에도 그린 실이 매우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실 쇼핑몰( https://loveseal.knta.or.kr/)에 가면 제주도와 해녀 문화를 담은 마그네틱, 일러스트 엽서, 머그 컵, 모빌, 핀 버튼, 키링 등 다양한 크리스마스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거기서 마그네틱과 모빌 하나를 골라 '기부'했다. 10년 전 쓴 글을 보면, 그때 크리스마스실 모금 목표액이 70억 원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난해 모금액은 29억 원이었다. 10년 새 모금액이 반 토막이 된 이유와 올 기부금 목표액을 결핵협회 담당자는 담담하게 알려주었다.

 

"크리스마스실은 기부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걸 사고파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반의 인식이 존재하고 있지요… 올 모금 목표액은 30억입니다."

 

그렇다. 실마다 '크리스마스씰은 기부'라는 글귀가 쓰인 이유다. 올 목표액을 채우려면 300원짜리 우표 모양 크리스마스실을 1천만 장을 '기부받아야' 한다. 단순 셈으로는 우리 국민 다섯 중 한 사람만 기부해도 되겠지만, 모금액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 아닌가. 어려울 때일수록 나눔을 잊지 않는 국민이 마음을 모아주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2019. 12. 13. 낮달

 

 

크리스마스실을 아시나요

1932년에 들어온 ‘크리스마스실’과 항결핵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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