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육사는 학교의 주체인 ‘생도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나
‘독립전쟁 영웅 흉상’ 이전 논란은 마무리 국면이다. 문제의 본질을 중심으로 여론이나 상식을 살핀 순리의 절차가 아니라, 여론에 떠밀리긴 했지만, 결국 욕을 먹으면서도 의도는 일부 관철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여론(국민)과 겨루기에서 승리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육사가 받아 안은 것은 모호한 정체성으로 말미암은 불명예일 뿐이다. [관련 글 : 육군사관학교는 왜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철거’하려 할까 / ‘역사 인식’의 아이러니, 친일 전력은 육사의 ‘정체성’에 맞나?]
이 논란 이후 지난 15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육군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자신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졸업증서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라며 ‘육사 명예 졸업증’을 반납했다. 2018년에 육사는 이들 독립운동가에게 “숭고한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은 군인 본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생도들에게 귀감이 됐다”라며 명예 졸업증을 수여했었다. [관련 기사 : 육사 명예졸업장 반납 또 반납…독립 영웅 후손들 “수치다”]
육사의 주체인 사관생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애당초 이 논란이 시작될 때부터 나는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의 대응보다 생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궁금했었다. 그러나 연일 쏟아지는 관련 보도 가운데 생도의 동향을 다룬 기사는 만날 수 없었다. 사관학교의 운영과 사관생도들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하지만, 생도들도 육사의 명예와 직접 관련된 논란에 관해서 아무 의견이 없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임관 전이지만 현행 법령상 사관생도는 엄연히 군인의 신분으로, 준사관의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생도들은 3금 제도에 따라 흡연을 할 수 없고(금연), 음주를 멀리해야 하며(금주), 혼인 및 성관계를 시도해서도 안 된다(금혼). 4년간 기숙사에서 병영에 준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성인으로서 자립적 인격을 갖춘 이들이다.
육사의 자치활동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학교의 공적 문제에 관해서 일정한 의견을 표명할 권리가 있음은 자명하다.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대학 생활과 견주어 보라. 군인의 신분이라, 일반 대학생처럼 제한 없는 자율성이 부여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육사의 2024학년도 학생모집 요강에 따르면 330명을 뽑는다고 하니, 4개 학년 학생 수는 아무리 줄여 잡아도 1천 명을 훌쩍 넘는다. 이들은 대한민국 육군의 초급장교로 임관하여 장차 육군의 정예 지휘관으로 성장할 자원들이다. 생도들에게 초중등 학생들도 누리는 자치활동이 없을 리는 없으니, 이번 논란과 관련하여 일정하게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행사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보름 넘게 이 논란이 이어지는 동안에 나는 육사 생도들의 의견 표명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학생 자치제도가 아예 없어 의견 표명이 봉쇄된 것인지, 의견의 표명이 초래할 불이익 때문에 모두 부득이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육사의 정체성과 사관생도들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사안 앞에서 생도들의 의견이 걸러지지 않은 것은 아쉽기 짝이 없다. 흔히 학생, 교사, 학부모를 교육의 3주체라고 한다. 대학에 준하는 사관학교이니 학부모는 빼더라도, 생도들은 교수들과 함께 가장 주요한 당사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을 의견을 묻지 않고 구경꾼으로 머물게 한 것은 학교가 아닌가 말이다.
육사는 생도의 의견을 제대로 묻지도 반영하지도 않았다
지난 9월 4일 국방부 브리핑의 질의응답에서 이 문제가 잠깐 제기되기는 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기자의 소임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 기자들은 질의로 국방부 대변인, 공보장교 등을 당혹에 빠뜨렸다.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에서 찾은 동영상에서 기자들은 ‘생도들의 의견’에 대해서 묻는다. [관련 동영상 : 홍범도 흉상 철거. 기자의 뼈있는 팩트 폭격에 순간 정적 “이미 작년 11월에 정해놓고…”]
기자 : 그 목요일 날 보도자료 육사에서 나온 발표문 보면은 이게 의견수렴을 했다고 나와요. 그런데 의견 수렴한 대상이 졸업생하고 교직원이에요. 교직원은 거의 8할이 육군 장교일 겁니다. 육사 나온. 그리고 졸업생은 다 육사 나온, 다 육사 선배들한테만 한 건데 생도들한테는 안 물어봤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외부 전문가나 학자나 그런 분들한테는 안 물어봤다는 얘기에요, 맞죠?
국방부 : 세부적 내용은 육사를 통해서 체크해 보겠습니다.
기자 : 제가 했어요. 생도들한테는 그렇게 물어봤대요. 오며 가면서, 교직원들이 오며 가면서 니들은 이거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물어봤어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가지고 생도 의견도 듣고 전문가 의견을 듣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뭐 11월에 이전계획을 확정했다지만 그래도 형식을 갖춰서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국방부 : …….
- <민중의 소리> 홍범도 흉상 철거. 기자의 뼈있는 팩트폭격에 순간 정적 “이미 작년 11월에 정해놓고…” 중에서
이 논란과 관련하여 생도들을 다룬 기사는 9월 12일 <한겨레>에 두 건이 실렸다. 하나는 ‘왜냐면’(25면)에 실린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나임윤경 교수의 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와 ‘똑똑! 한국 사회’(26면)에 실린 방혜린(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의 ‘육사의 부끄러운 뿌리 찾기’다.
나임윤경 교수의 글은 ‘왜냐면’의 성격상 자진해 ‘기고’한 글로 보인다. 아마, 나 교수는 최근에 벌어진 군의 이른바 ‘항명’ 사건과 ‘독립 영웅 흉상 철거’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육사 생도들에게 무언가를 말하여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군인정신’, 진실에 눈 뜨고 ‘출세’가 아니라 ‘역사와 함께하는 시대정신’ 이해하는 것
그는 육사 생도들이 “훈련하고 공부하는 그곳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선배 군인이자 교수까지도 거침없이 그 일에 가담하고 있”는 상황에서 “숨죽이듯 침묵해야 하는” 생도들의 심경을 전제한다. “비정상적 판단이라도 ‘상명하복’이 아니면 ‘항명수괴’라는 어불성설이 지배하는 군의 꽉 막힌 상황도 참담”하다면서도 그는 생도들에게 당부한다.
“위에서 하라는 것이면 무지와 거짓까지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이른바 ‘군인정신’은 아니길 바라봅니다. 명석하고 활기 넘칠 뿐 아니라 각별한 애국심으로 모인 그대들이 갈고 닦을 군인정신은 진실에 두 눈 끝까지 뜨고, 다만 당장의 자리와 출세가 아니라, 역사와 함께 담담히 흐를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그것과 호흡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몇 년 뒤면 지도자가 돼 수많은 사병 앞에 설 그대는 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육군사관생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 엘리트 등 ‘신의 아들’이 갖가지 ‘기술’로 빠져나간 징집을 보통 시민의 아들은 예외 없이 감당하며 ‘피 같은’ 청춘의 시간을 썼”으나 해병대 사병의 죽음과 군내 성·폭력 사건이 보여주듯 “군은 보통 시민의 딸과 아들을 귀히 여기지도, 최소한이나마 보살피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의 논란에서 보여준 현실을 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국민이 더 나은 삶을 포기하며 지불한 국방비 위에 세워졌음에도, 대한민국 군은 쿠데타, 군사독재, 군납비리, 군 성·폭력 등의 단어가 익숙할 만큼 ‘국민 배신’의 역사를 지속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군 당국은 자신을 떠받치는 국민을 독재로, 학살로, 각종 비리로, 폭력으로 배신해 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철 지난’ 이념으로, 구국 영웅에 대한 왜곡과 폄훼로 배신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생도로서의 현재와 군 지도자로서의 미래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뜻을 계승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의 결과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가슴에 큰 별 주렁주렁 매단 이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국민 향한 독재, 학살, 폭력, 그리고 심지어 ‘내 새끼’처럼 귀하다는 부하들을 가벼이 여긴 것에 대해 군 스스로가 치열하게 반성하고 성찰할 때만 가능해”진다고 강조한다.
그는 “위계 상 그대들의 맨 위에 있는 이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고, “군인으로서, 스승으로서 모범이 돼야 할 그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험하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군인정신’을 한국 사회는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고 말한다.
“다만 사랑하는 부하를 죽음으로 이끈 군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조직적이고 습관적인 은폐 시도에 저항하며 고군분투하는 해병대 전 수사단장의 소신 있는 발언과 의연함, 그리고 그의 ‘빨간 셔츠’ 입은 동료 군인들의 모습에서 미지의 군인정신을 상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관생도들이 “큰 별 가슴에 달고 국민에게 총부리 겨눴던 것도 모자라 날조된 역사 앞에 무릎 꿇은 ‘군인 아닌 군인’을 넘어” “참 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이 선배들로부터 군인정신의 어떤 면모를 배우고 다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마지막 문단은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을 고발한 사건과 관련해 학생들의 ‘공정 감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는 이 노교수의 진정성이 빛나는 부분이다. 그것은 육사가 권력과 코드를 맞추느라 포기한, 육사가 마땅히 견지해야 할 정체성과 역사의식의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부디 흉상의 영웅들과 그분들의 뜻을 받든 국민의 자부심으로 성장해주길 바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이 존재하는 이유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대들이 매일 숨 쉬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거기 그곳에 처음 모셨던 그대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손원일 제독을 자랑스러워하는 해군사관학교
해군 대위로 예편한 방혜린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는 경남 진해에 있는 낡고 오래된 시설의 해사를 초라하게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해사 생도에게 “육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부심의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해군과 해사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의 존재”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로 그 자신도 독립운동가로 1934년 임정 군자금 마련과 무장투쟁을 위해 평양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 제독은 “조선 해군을 창설하고자 중국 해군부에 들어가 훈련받았”고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1946년 해사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지냈던 이다.
“해사에서는 해군 창설과 손원일 제독에 대해 자세히 교육하고 기념한다. 해군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도들에게 체화시키기 위해서다. 학업과 품행이 우수한 생도에게는 ‘손원일상’이 수여된다. 손원일함은 장보고-Ⅱ 사업을 통해 건조된 잠수함의 선도함이 됐고, 이 잠수함 클래스에 안중근, 김좌진, 이범석, 유관순 그리고 홍범도함이 포함되어 있다. 해군의 발전과 위상을 대표하는 잠수함에 독립 영웅의 이름을 따 명함으로써 해군의 뿌리가 항일 독립투쟁에 있다는 자부심을 되새기는 것이다.”
위의 서술은 ‘육사의 혼란스러운 뿌리 찾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분명하게 환기한다. 문재인 정부 때 “신흥무관학교 등이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육사의 정신적 정통성의 연원”이라고 확인했으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는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한복판에 육사의 ‘흉상 이전계획’이 자리한 것이다.
방혜린 대위는 “지나온 역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지키는 일은 후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름 말고는 가족도 재산도 못 남기고 떠돌았으나 항일무장투쟁이 앞장섰던 독립투사보다, “공산당 때려잡기에 진심이었으나 같은 동포를 때려잡는 것에도 진심이었던 친일 군인 집단이 육사와 육군에 적절한 뿌리라고 판단했다면 이를 계속 고집했으면 될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육사가 “정권의 지시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뿌리가 흔들린다는 건 육군의 근간과 건군 이념에 대해 육군 역시 낯부끄러워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아킬레스건처럼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는 홍범도함 명칭 변경과 관련해 해군이 지금도 버티고 있다고 확인한다.
예비역 해군 장교의 조언, ‘뿌리의 힘이란 …’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명칭이 끝내 변경되더라도 해군엔 이를 반대한 역사가 남는다. 뿌리란 이런 힘을 가진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육사도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참에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제대로 내리길 바란다”라고 조언한다. 국군의 주력이라고 자부하는 정예 육사가 해사의 충고를 받는 게 마뜩잖을지는 모르지만, 육사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돌아보면서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느닷없이 이념전쟁을 일으켜 혼돈과 갈등을 초래한 현 정부의 스탠스와 무관하게 육사가, ‘참 군인정신’을 지향하는 육사 생도가 나임윤경 교수와 방혜린 활동가의 진언과 충고를 값진 채찍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많은 국민은 육사와 육사 생도가 이끌어 갈 정예 육군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3. 9.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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