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영웅 흉상’ 이전 논란, 홍범도 철거, 백선엽 띄우는 육사의 고무줄 ‘정체성’
독립전쟁 영웅 흉상 철거 문제로 육군사관학교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18년에 육사 종합강의동인 충무관 앞에 세운 독립전쟁 영웅인 홍범도(봉오동 전투), 김좌진·이범석(청산리)·지청천(대전자령 전투)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현 위치에서 다른 장소로 이전한다고 하면서다.
석연찮은 이유로 촉발된 독립전쟁 영웅 흉상 이전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의 정체성과 독립투사로서의 예우를 동시에 고려해 육사 외 독립운동 업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이전”하는데, 이전 장소는 독립기념관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육사는 지청천·김좌진·이범석 장군, 이회영 선생 흉상은 “육사 교정 내 적절한 장소로 이전”한다고 한다. [관련 글 : 육군사관학교는 왜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철거’하려 할까]
충무관 안에 설치된 박승환(1869~1907) 참령[관련 글 : ‘한일신협약’, 입법·행정권에다 비밀 각서로 ‘군대 해산’ 등까지 담았다] 흉상도 마찬가지로 교정 내 적절한 장소로 이전하겠다고 했다. 지청천 장군 등의 흉상은 육사 내 육군박물관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육사는 “기념물 재정비는 육사 졸업생과 육사 교직원 등의 의견을 들어 육사의 설립 목적과 교육목표에 부합되게 육군사관학교장 책임하에 추진한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정작 육군사관학교는 이 논의에 관해서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국방부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면서 관련 논의가 어정쩡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비록 상명하복의 수직적 질서로 유지되는 군이지만, 육군의 정예 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육사가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가 슬그머니 정부 여당의 방침에 편승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 것은 유감이다.
결과적으로 육사는 두루뭉술하게 “육사 졸업생과 육사 교직원 등의 의견을 들어 육사의 설립 목적과 교육목표에 부합되게” 이 문제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논란의 핵심을 바라보면서 미심쩍은 것은 ‘육사의 설립 목적’과 ‘교육목표’가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육군사관학교는 공사나 해사와 마찬가지로 정예의 육군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4년제 군사학교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이 학교는 입학하기가 명문대만큼이나 어렵고, 이 학교 졸업자들 가운데 육군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 같은 군 최고위 지휘관이 나오니, 육사의 명망은 다른 장교 양성기관에 비길 바가 아니다.
군 간부 양성기관 육사의 위상
33개월 동안 의무 복무하고 43년 전에 전역한 육군 병장은 현재의 군 사정에 밝지 못하다. 사병이야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만, 장교라면 이야기는 더 달라진다. 내가 아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꼽아봐도 떠오르는 인물이 거의 없다.
1977년에 입대하여 당시 인천에 있는 공수특전여단 대대 본부 인사과 행정서기병으로 근무할 때다. 지대 팀원으로 전입했다가 첫 휴가를 다녀와서 행정병으로 뽑혀 대대로 전환 배치됐다. 당시 인사과 사무실에는 A3 크기의 ‘장교 명부’가 있었는데, 거기엔 대대장 이하 소속 장교들의 인적 사항과 임관 관련 사항이 가지런히 기재되어 있었다.
대대장은 간부후보생 출신이었고, 3사와 학군(ROTC) 출신, 등 여러 가지 경로로 장교로 임관한 이들이 빽빽했는데, 새로 전입하는 소위들 가운데 육사 출신이 전혀 없었다. 선임하사에게 물었더니, 그는 나중에 별을 달지도 모르는 육사 출신은 전방 소총 소대장부터 차근차근 밟게 되므로, 공수부대에는 초임 소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건 말하자면, 일선 부대에서도 육사의 존재 가치를 달리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 전입하는 육사 출신 장교는 소대장을 거치고 들어오는 중위가 고작이었다. 육사 출신은 4학년 때 공수 교육을 받았으므로 다른 장교들처럼 공수 교육대를 거치지 않고 전입했다. 재학 중에 공수 훈련을 받는 것도 아마 앞서와 같은 의미일 거였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내가 복무 중에 만난 우리 대대의 육사 출신 장교는 그 중위가 다였다. 그는 1년도 채우지 않고 다른 부대로 전출했다. 희소가치만으로 육사 출신 장교는 병사들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는 얘기다. 그건 상식적인 수준에서 육사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성싶다.
초대 교장부터 일본군 출신
육군 참모총장이 1대(1948)부터 21대(1979)까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육군사관학교의 교장 역시 상황은 비슷했던 것 같다. 초대 교장(경비사관학교)은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포병 대위 출신으로 군번 1번을 받은 이형근이었다. 2대 원용덕은 만주군 군의관 출신, 3대 정일권도 만주군 출신이고, 4대 송호성부터 5대 건너뛰어 6대 최덕신, 7대 김홍일, 8대 이준식, 9대 안춘생까지 5명이 중국군을 거친 광복군 출신이다.
연합군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광복군으로 싸우다가 조국으로 귀환해 새로이 창군 과정에 참여한 광복군의 입지가 막강한 선후배 인맥의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미치지 못했을 거였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광복군에 대한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친일 청산이 단호하게 이루어졌다면, 국군의 뿌리는 광복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게 친일 기득권 세력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육사는 이 논란에 대해 지난 8월 31일,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정체성을 고려해 학교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육사에서 말하는 ‘육사의 정체성’은 뭘까. 육사 총동창회는 “육사는 6‧25전쟁, 각종 대침투작전 등에서 1475명의 선배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라는 입장문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육사 출신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한 마디로 ‘조국 수호 반공 전사’ 양성이 육사의 본질적 기능이자 정체성”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관련 기사 : 해방 뒤 10년 육군총장 모두 친일…‘육사 뿌리’가 광복군 거부]
<한겨레>는 위 기사에서 육사의 뿌리가 광복군이라는 사실을 거부한다고 보았다. 2011년 1월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육사에서 기념행사를 하려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육사는 “신흥무관학교가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란 점은 인정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낮다”라며 협조를 거절한 것은 상징적이다.
육사의 뿌리를 ‘광복군’ 아닌 ‘국방경비대(국군경비사관학교)’라고 우기는 속내
육사 출신으로 군 요직을 역임하고 전역 뒤에는 외교관과 장관, 정치인과 공기업 사장 등으로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은 국군과 육사의 모태가 미군정이 만든 국방경비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해방 전 독립전쟁에서 일제에 협력해 온 창군 초기의 군 수뇌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최선의 논리다. 일제와 연이 없는 뒷세대들은 선배들의 정체성을 반성 없이 계승하는 식으로 그 기득권의 성채를 지켜온 셈이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한 헌법 전문에 따라 우리 군의 정체성을 독립군, 광복군까지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2018년에 육사 안에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이 설치됐다. 이 흉상들은 “ 국군과 육사의 뿌리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아닌 독립군, 광복군, 신흥무관학교라는 상징”(위 기사)인 것이다.
군 기득권의 뒤틀린 ‘역사 인식’, 친일 부역 전력은 육사의 ‘정체성’에 맞나?
2023년 8월에 돌출적으로 제기된 “흉상 철거 방침은 국군과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자르려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 전쟁”이다. 이미 추앙해온 ‘육사의 아버지’(밴 플리트)와 ‘군의 아버지’(이응준)가 있으므로 ‘소련 공산당원 홍범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최근 육사의 흉상 철거 문제를 맡은 이가 박근혜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뉴라이트 육사 교수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국방부의 발표가 왔다갔다 하면서 석연치 않았던 이 흉상 논란은 최근 슬슬 안개가 걷히고 있는 듯하다. 홍범도 장군 대신 백선엽 흉상으로 교체할 거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하던 국방부 장관의 어조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육사 누리집에는 지난 5년 간 보이지 않던 30회 분량의 백선엽 장군 관련 웹툰이 다시 게재되고 있다.
백선엽은 이미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동상으로 우뚝 섰다. 지척에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동상도 세워졌다. 이미 보수진영의 시간표는 계획표대로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국방부 장관은 야당 의원의 질문에 백선엽 흉상설치 계획이 없다고 답했지만, 이미 육사에는 10대영웅 동상 설치 계획이 입안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관련 글 : 왜 백선엽과 한미 대통령은 6·25 격전지 ‘다부동’에서 다시 만났나]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던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만 미화하는 속내는 공산당 입당 이력 때문에 육사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고 보는 홍범도의 사례와는 잣대가 다르다. 막말로 독립운동 협력 차원에서의 ‘공산당 입당’은 육사의 정체성에 맞지 않지만, 일제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전력은 ‘공산당 침략’을 막은 공으로 지우면 정체성에 합당한가 말이다.
육사의 정체성이 ‘반공 전사 육성’이란 군 일부 주장은 냉전 상황이 자신들의 친일 논란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 ‘전가의 보도’일 수 있다. 북의 위협과 위기를 강조할수록 군의 존재 가치는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육사 누리집은 교육 목적을 “국가 방위에 헌신할 수 있는 육군의 정예 장교 육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육사의 교육 목적을 굳이 주적 따위의 개념을 명시하지 않고 포괄적인 의미의 ‘국가 방위’로 밝히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특정한 시대가 아니라, 국가 제도와 기관으로서 존재하는 육군사관학교의 존재는 적이 누구이든 국가 방위의 주체라는 의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에서 육사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아쉽다. 군을 정치에 끌어들인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의 정예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육군사관학교가 명백한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호국의 간성’으로 언제쯤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2023. 9.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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