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의 주제곡 정훈희의 ‘안개’
기억이 명확지 않지만, 가수 정훈희가 부른 대중가요 ‘안개’를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일 것이다. 부산 출신의 16살 소녀 정훈희가 ‘안개’로 데뷔한 1967년에 시골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게 ‘대중문화’는 멀고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중학에 들어가서 만난 노래 ‘안개’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시골 출신 아이는 대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도시의 생활 양식을 익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대중화되기 전이고, 라디오는 있었지만, 나는 거리 곳곳에 성업 중이던 ‘소리사’(전축 등 음향기기를 주로 팔던 전파상) 가게 밖에 내놓은 대형 스피커로 연주되던 노래로 대중가요를 접할 수 있었다.
‘안개’는 그렇게 내가 즐겨 부르는 유행가 목록에 들어왔다. 고작 <선데이 서울> 같은 황색 주간지 따위로 연예계 소식을 접하던 시절이다. 나는 ‘안개’가 영화 <안개>의 주제가였다는 사실도, 그 영화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각색한 작품이었다는 사실 따위도 전혀 몰랐다.
작가 김승옥의 단편들을 홀린 듯 읽기 시작한 것은 1972년에 고교 입학을 기다리던 중학교의 마지막 봄방학 때였다. ‘생명 연습’,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같은 작품이 실린 김승옥 단편집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헛갈리지만, 아마 그 무렵 만화방에서 빌린 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고교에 입학하여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문학적 분위기 같은 겉멋에 취해 있을 때에 김승옥은 소설 공부를 하던 친구들 사이엔 최고의 스타였다. 삼성출판사에서 낸 문고판으로 김승옥의 중편소설 <내가 훔친 여름>을 한 권씩 사서 읽던 때도 그해 여름이었다.
김승옥의 빛나는 단편 ‘무진기행’
그때 홀려서 읽었던 김승옥의 탁월한 단편들을 뒷날 문학 시간에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될 줄은 물론 나는 알지 못했다. 김승옥이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霧津)기행’은 “현실 속에 던져진 자기 존재의 파악”, 또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버리고 현실에 타협하는 현대인의 자기반성”을 다룬 작품이다.
그가 참신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창조한 새로운 시대는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하면서 무기력한 1950년대 전후 문학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그의 소설은 “1950년대 엄숙주의, 교훈적인 태도, 도덕적 상상력 등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는 점에서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기도 했다.
소설은 가상의 도시 무진(霧津 : ‘안개 나루’의 뜻, 실제 작가의 고향인 순천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의 유명한 ‘안개’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인간 내면의 혼돈과 우울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가운데 시작된다.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고향인 무진을 찾았다가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주인공 ‘나’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의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소설 전편에서 ‘안개’는 주인공을 현실과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는 소재로 불확실한 현실과 전망의 부재, 그로 인한 젊은 지식인들의 절망과 방황, 허무주의를 상징한다. 안개는 햇볕, 바람 등의 자연물과 함께 인간의 의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영화 <안개>와 그 주제가 ‘안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주인공이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인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정서를 단문으로 서술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이다.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흔치 않은 유명한 문장으로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이어지는 주인공의 정서다.
‘무진기행’은 1967년 김수용 감독이 원작자인 김승옥 작가가 각색한 <안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이 영화는 그 해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과 편집상을 받았다. 당시 톱스타 신성일과 신인 여배우 윤정희가 주연을, 당대 최고의 작곡가 이봉조가 음악을 맡았다. <안개>는 한국 최초의 모더니즘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걸작으로 평가된 작품이다.
이봉조는 ‘안개’를 가수 현미에게 부탁하려다가 부산에서 상경한 16살 소녀 정훈희를 만난 후, 마음을 바꾸어 그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소설 ‘무진기행’이 영화 <안개>와 노래 ‘안개’를 탄생시켰고, 최근 박찬욱 감독은 노래 ‘안개’를 듣다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정훈희의 ‘안개’를 즐겨 부르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다. 어느 날, 그걸 부르다가 거기 담긴 감성이 만만찮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이어지는 선율과 신파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가사(노래말을 만든 이가 가수 박일남의 부친인 MBC 라디오 박진현 PD라는 설과 김승옥 작가라는 설이 있다)의 마력 때문이다.
일흔 넘은 노년의 가수가 부르는 ‘안개’
정훈희는 매우 매력적인 음색을 가진 가수다. 감미롭다고 할 만한, 가늘지만 높지는 않은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나는 그녀의 히트곡 ‘안개’와 함께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번안곡 ‘마음은 집시’나 ‘스잔나’ 같은 그녀의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 ‘안개’는 지금도 가끔 노래방 같은 데 가면 좀 쓸쓸한 기분이 되어 부르기도 한다. [관련 글 : “꽃잎처럼 향기로운 입술”, 정훈희의 ‘마음은 집시’]
최근 유튜브에서 우연히 제43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의 축하공연으로 정훈희가 라포엠과 함께 부른 ‘안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안개’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오에스티(OST)로 들어갔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헤어질 결심>의 엔딩곡도, 한 지상파 방송에서 정훈희·송창식이 부른 ‘안개’도 유튜브를 통해 여러 차례 들었다.
부산 KBS에서 방송한 정훈희와 송유진이 부르는 ‘안개’도 들었다. 흑백 화면이 인상적인 이 방송에서 처음 만난 나는 가수 송유진의 애절한 목소리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듀엣 상대는 바꾸어도 한결같은 건 정훈희의 목소리다. 정훈희는 1951년생, 우리 나이로 일흔둘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반세기 전의 그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조명 아래 그는 짙게 화장하여도, 그 얼굴에서 드러나는 노화를 숨기지는 못한다. 그래도 나는 그의 노화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드는 나이와 무관하게 예전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게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의 노래는 고단한 삶과 고통스러운 좌절마저도 마냥 말랑말랑하게 바꾸어내는 오묘한 힘이 있다.
청룡상 시상식과 SBS와 KBS 방송 등 몇 개의 버전으로 노래하는 정훈희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만가만 안개를 따라 불렀다. 안개를 골라 부를, 노래방을 찾을 날은 언제쯤 될까를 헤아려 보지만, 그건 정말 예측하기 어렵다. 한때 술 마시고 나면 노래방은 정해진 순서이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에게 그런 순서 따위는 사라져 버린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2022. 12.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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