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졸업’, 낭만에서 현실로

by 낮달2018 2022. 2. 27.
728x90

‘낭만’이 아닌 ‘고단한 현실’과의 대면

▲ 한 대학의 졸업식 풍경. 학생들은 낭만이 아닌 생생한 현실을 대면하여야 한다. ⓒ < 한국대학신문 > 자료사진

대학 졸업 시즌이다. 전국에서 50만여 명의 대학 졸업생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온다’. 그들 가운데 절반은 ‘백수’로 불리게 되는 미취업자라고 한다. 심각한 청년층 고용시장 상황 앞에 선 젊은이들의 표정은 어둡고 절박하다. 오죽하면 어떤 일간지는 ‘그들에게는 봄이 없다’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취업난’과 ‘대출금 상환’으로 돌아온 졸업

 

입도선매(立稻先賣), 졸업하기도 전에 제각기 기업에 ‘팔려 가던’ 70년대 호시절에 비기면 오늘의 젊은이들은 불운하기 짝이 없다. 70년대 중반에는 사범대 졸업자들조차 기업으로 몰려가 시골 사학에서는 쓸 만한 교사를 모셔오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던가.

 

80년대 초반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때도 그리 상황은 좋지 않았다. 4학년 2학기부터 학과 사무실에 사학의 교사 초빙이 줄을 이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옛이야기였다. 부지런하고 눈치 빠른 친구들은 이미 교원임용 순위 고사를 치르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새로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 나는 졸업반의 가을을 무심히 보냈다. 취업에 관한 한 아무 마련도 없던 나는 해가 바뀌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몇 군데 학교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신통한 소식이 없었다. 이게 장난이 아니라고 느끼던 시점,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서야 나는 한 사학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새 서른 해가 가깝다.

 

▲영화  < 졸업 >(1967) 의 포스터

대학 졸업은 단순히 ‘학생이 규정에 따라 소정의 교과 과정을 마침’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나 가정의 보호 아래 있던 젊은이가 ‘자기 몫의 삶의 현장’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절대 녹록지 않다.

 

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현실 사회가 아니라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 또는 입영을 택하는 건 이제 얼마간 일반화된 현상처럼 보인다. 그런 선택을 일러 현실 사회 진출을 미루는 일종의 ‘사회적 모라트리움(moratrium, 지불 유예)’이라고 이해하는 까닭도 비슷하다.

 

한때 대학 졸업은 그것 자체로 ‘낭만’적 삶의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졸업>(1967)은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와 ‘스카브로의 추억(Scarborough Fair)’ 따위의 노래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이 영화는 달콤한 청춘영화처럼 보이지만 불안한 미래를 앞둔 젊은이의 방황을 통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이다. 영화에서 ‘졸업’의 의미는 따로 새겨지지 않는 대신 주인공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을 끌고 탈출을 감행하는 장면이 영화사에 남았다.

 

‘낭만’ 아닌 ‘고단한 현실’과의 대면

 

그러나 2011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졸업’은 그 1960년대의 낭만과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의 ‘최우수 모던록’으로 뽑힌 노래, 혼성 4인조 그룹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은 바로 무겁고 어두운 현실을 담고 있다.

 

“‘졸업’은 모두가 겪고 있거나 이미 겪었을 상실의 시절을 노래한다. 기대했고 또 불안했던 미래, 투명했고 또 암담했던 나날들을 보다 강한 언어로 풀고 보다 극적인 선율로 구체화한다. 감성적인 밴드로 평가되지만 사실 현실적인 밴드라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고 정말로 ‘졸업’은 현실의 이야기가 됐다.”

     - 이민희 선정위원(<한겨레> 기사 중에서)

▲ 혼성 4 인조 그룹 '브로콜리 너마저'

굳이 선정위원의 심사평이 아니더라도 이 노래가 2011년의 강파른 현실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달 수는 없겠다. 그런데‘방황하는 청년들, 쫓기듯 떠나는 어학연수, 팔려 가는 서로, 이 미친 세상’을 그리고 있는 노래가 담고 있는 진실 앞에서 ‘권력의 방송’ <한국방송(KBS)>은 눈을 감아 버렸다.

 

한국방송이 이 노래를 ‘방송 부적격’으로 판정한 이유는 ‘선정적’이기 때문이란다. 선정적 표현으로 언급된 부분은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와 ‘우리들은 팔려 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를 나누네’ 등의 대목. KBS 가요심의위원회는 “짝짓기는 원래 동물의 교미 행위를 뜻하는 말로 인간의 성행위를 연상케 한다. 또 ‘팔려 가는’은 성매매 인신매매를 연상케 해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밝혔다고 뉴스는 전한다.

 

‘KBS 금지곡’이 된 노래에 담긴 ‘현실’

 

‘짝짓기’가 ‘인간의 섹스’를, ‘팔려 가는’이 ‘성매매’를 연상케 한다고? 공중파 방송만 틀면 드라마든 예능이든 넘치는 게 짝짓기가 아닌가. ‘성매매’는 이 도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새삼 그게 문제라고 눈을 부라린 KBS의 윤리 감각은 놀랍다. 오히려 십수 회나 반복되는 ‘이 미친 세상’이라는 부분이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건 아닐는지.

 

거듭 말하지만, 한국방송의 ‘방송 부적격’ 판정과 무관하게 이 노래에 담긴 현실 인식은 단단하다. 아르바이트와 빚으로 등록금을 내고 간신히 졸업한 대학. 그러나 곳곳에 지뢰다. 수십, 수백 통의 이력서를 쓰면서 지쳐가고 대출금 상환일은 쫓기듯 다가온다. 몸 하나 뉠 원룸 하나 얻는 일도 만만찮은 2011년의 현실을 브로콜리 너마저는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나직이 읊조리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 2월 초에 두 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않는다. 이 참담한 죽음의 현장에는 ‘복권’과 ‘학자금’ 대출 서류가 남겨졌다고 한다. 살인적인 대학 등록금이 꽃다운 젊은이들의 삶을 앗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하는 청년들의 절규는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반값 등록금’은 고사하고 대학마다 수천억의 적립금을 쌓아두면서도 등록금 인상은 매년 반복되는 세상에서 ‘졸업’은 축복의 새 출발이 되기에는 너무 힘겹고 무겁기만 하다.

 

 

2011. 2. 27.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