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대 가수 위키 리(본명 이한필) 별세
어제저녁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가수 위키 리(Wicky Lee: 본명 이한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후,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로스앤젤레스 교포 방송에서 활동한 그는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그는 우리 세대와 친숙한 가수는 아니다. 우리는 단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몇 해 동안 그의 히트곡 ‘눈물을 감추고’를 즐겨 불렀을 뿐이니 그는 우리 앞 세대의 스타였다. 나는 80년대 초반에 스치듯 지나가며 보았던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지만, 전파매체가 대중화되기 이전이어서 나는 이름만 들었을 뿐, 그의 모습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디제이(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정윤희, 정소녀 등과 함께 <동아방송(TBC)> ‘쇼쇼쇼’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60년대에는 대중매체에 접근하기엔 우리가 아직 어렸었고, 70년대에는 수도권 이외엔 <동아방송>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았다.
각 매체에서 전하는 그의 이력을 뒤늦게 확인하면서 나는 그랬구나, 머리나 주억거릴 뿐이다. 경기고와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 리는 1960년 미8군의 쇼 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를 통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유주용·박형준 등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 클로버스’(네 잎 클로버)로 정식 데뷔했다. 1966년 미 8군 무대에서 ‘종이배’를 발표한 이후 ‘눈물을 감추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등의 히트곡을 냈다. 60년대 그의 인기는 특히 영남지방에서 아주 높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가수도 누군지 잘 모르면서 ‘눈물을 감추고’를 즐겨 불렀던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깨어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그의 노래를 잠깐 들었다. 음량을 낮추었는데도 전주가 계속되자, 아내가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이내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새벽부터 웬 노래유?”
“응, 이 노래 부른 가수 말이야. 세상을 떠났다네.”
“위키 리?”
“당신도 아네. 참 저 노래 무척 많이 불렀는데 말이야…….”
“나이가 꽤 되지요?”
“우리 나이로 여든이라네.”
“좀 더 살아도 될 텐데…….”
그 노래인가 싶어서 유튜브에서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을 찾아 들었더니, 역시 귀에 익은 노래다. 그게 역시 그의 노래였구나. 그런데 제목이 새삼스럽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류의 요즘 노래 가사에 비기면 가히 시적 여운이 풍기는 제목이 아닌가.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던가.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쓰라린 가슴에
고독이 넘쳐 넘쳐 내 야윈 가슴에 넘쳐흐른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외로움에 젖고 젖어 쓰라린 가슴에
슬픔이 넘쳐 넘쳐 내 야윈 가슴에 넘쳐흐른다.
그의 히트곡 ‘눈물을 감추고’를 듣는다. ‘저녁 한때의…’에 비기면 유치한 신파조다. 고독과 슬픔을 직설적으로 뇌까리는 전형적인 비탄조의 노래다. 그러나 그게 또한 꽤 오랫동안 우리 대중가요를 지배한 정서였지 않겠는가.
가수는 살아서 대중들 곁에서 노래로 대중을 위무해 준 사람이다. 이제 고인이 된 가수 위키 리의 명복을 빌고 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것은 대중의 몫일 수밖에 없다.
2015. 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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