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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최초로 재배된 곡물, 피[稷] 이야기

by 낮달2018 202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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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불량한 환경에 적응하는 힘이 강해 ‘구황작물’로 애용된 피, 이제는 천덕꾸러기 신세

▲ 볏논에서 더부살이로 자라고 있는 피. 왼쪽부터 9월 15일, 9월 15일, 9월 25일, 10월 2일에 각각 찍은 것이다.

거의 매일 아침 운동 삼아 걸어서 인근 마을을 다녀온다. 집을 나서 10분만 걸으면 만나는 들판 사이로 난 마을 길로 2km쯤 가면, 구미시 부곡동, 가마골에 이른다. 길은 벼가 익어가는 볏논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나는 가마골 어귀에서 돌아서 온다.

 

아침 운동길에 만나는 벼와 피

 

겨우내 비어 있었던 논은 써레질을 시작으로 모내기가 이어진 뒤, 나락이 패고 이삭이 나와 천천히 익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온 들판이 누렇게 익은 벼로 넘실댈 때 벼 베기가 이루어진 뒤, 볏짚을 저장하여 발효시키는 압축포장 사일리지가 군데군데 나타나면 비로소 벼농사는 끝을 맺는다.

 

벼가 패고 익어가면서 볏논 여기저기 불청객처럼 드러나는 게 잡초인 야생 ‘피’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들에 나가서 피를 뽑던 기억도 희미한데, 나는 그게 피라는 단박에 알아챘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볏논에 피는 늘어났다. 예전 같으면 벼의 영양분을 뺏는다고 어린이들의 손을 빌려서 그걸 뽑아냈지만, 일손이 모자라게 되면서 아예 손을 대는 걸 포기한 것이다.

▲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벼. (9월 15일)
▲ 볏논에 잔뜩 자라난 피.(9.15.)
▲ 볏논의 가장자리를 장악해 버린 피.(9.15.)

벼목 볏과의 피는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한해살이풀로,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전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피는 이 땅에서도 가장 먼저 재배된 곡물이었다. 채집과 사냥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던 선사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농경(農耕)을 시작하면서 자연을 이용하여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석기 농경 혁명’이다.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재배된 곡물 ‘피’, 벼농사 이전까지 주곡 노릇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주거지에서 피 또는 조로 보이는 탄화 곡물이, 봉산군 마산리 유적과 평양 남경 유적에서는 조가 출토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4000년으로 추정되니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는 신석기 중기부터 조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 회령읍 오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탄화된 피가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최소한 1세기 이전, 삼한시대로 보이는데, 그 이전까지는 피가 주곡으로 재배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피는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 말의 사료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벼가 피를 대체한 이후에는 빈민들의 식품 재료 이외에 사료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피는 불량한 환경에 적응하는 힘이 강하여서 주로 구황작물로 애용되었다. 피는 벼가 재배되기 힘든 산간지나 북부지방의 냉수답 또는 냉수가 들어오는 논의 입구나 샘 둘레에 재배됐다. 피는 성질이 강건하여 저온은 물론 생육 초기를 제외하고는 한발에도 강하며 과습(過濕)에도 지장을 받지 않고, 표고 1500m까지 재배할 수 있다.

▲ 벼와 함께 피도 익어간다. (9.18.)
▲ 벼는 이제 수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9.25.)

피에는 단백질·지방질·비타민 B1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영양가는 쌀과 보리에 뒤지지 않지만, 맛은 떨어진다. 또, 장기간 저장하여도 맛이 변하지 않고, 또 비타민 B1의 함량에 변화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쌀과의 혼식 이외에 떡·엿 등을 만들고 된장·간장·술의 원료가 된다. 또, 겨 부분에는 기름이 많으므로 착유용·사료용으로도 쓰인다. 줄기와 잎은 작물의 줄기 중에서도 가장 연해서 가축 사료에 알맞다.

 

오곡의 하나, 곡신(穀神)의 뜻도 지닌 ‘피’

 

흔히 뭇 곡물을 두루 가리키는 어휘인 ‘오곡(五穀)’은 고대 중국의 문헌에서 유래했는데, 초기에는 문헌마다 오곡의 종류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오곡은 시대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벼, 보리, 콩, 밀, 메밀, 기장, 피, 콩, 팥 등의 곡물 중에서 다섯 가지를 선택하여 오곡이라고 불렀다. 또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곡물을 통틀어 오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오곡의 하나로 이름을 올린 ‘피’를 가리키는 한자가 ‘직(稷)’이다. ‘직(稷)’은 논[田]에서 사람[人] 이 발을 벗고[夊] 곡식[禾]을 심고 있는 모습을 본떴다. ‘기장 직’ 또는 ‘피 직’으로 쓰는데, 고대 중국에서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천자나 제후는 ‘토지신’과 ‘곡신(穀神)’에게 제사지냈다. 이때 토지신은 ‘사(社)’, 곡신은 ‘직(稷)’이라 하여 “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로 ‘사직(社稷)’이란 어휘가 만들어졌다.

▲ 이제 벼는 벨 일만 남았다. (10.6.)
▲ 피도 벼와 함께 익어간다. (10.6.)
▲ 피도 벼와 함께 익어간다. (10.6.)
▲ 벼는 이제 수확을 앞두고 있다. (10.20.)

농업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잡초로 전락한 피

 

▲ 한때 괴산의 농산회사에서 판매한 피쌀

농업 기술의 발전과 함께, 벼가 주곡으로 자리 잡으면서 피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볏논에 벼가 자라면서 함께 자라기 시작한 ‘야생 피’는 갈데없이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 벼와 함께 자라며 영양분을 빼앗는 잡초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근년에 이 잡초 ‘야생 피’가 ‘황금 작물’로 변신했다는 소식이 있다. 충북농업기술원이 쌀에 부족한 영양을 피로 채울 수 있도록 야생 피의 단점을 보완해 알곡이 떨어지지 않고 수확량도 늘도록 개량한 신품종 ‘피’를 내놓은 게 2010년이다.

 

충북 괴산에서 전국 최초로 피를 재배하여 1만여 제곱미터에서 2톤을 수확했다. 잡곡 피는 현미보다 비타민 B1이 2배나 많고, 백미보다 칼슘과 인은 2배 이상, 철분은 3배 이상, 식이섬유는 4배 이상 많다. 여기에 단백질도 40%나 많아 쌀에서 부족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대안 곡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 : 잡초 야생 피’, 황금 작물로 변신]

 

해당 자치단체는 개량종 피를 재배하는 농업법인을 지원해 농가에 확대 보급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이 피 재배 등의 계획은 발전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 같다. 충북농업기술원에 문의해 보니, 상품화가 잘 안돼 현재 피를 재배하는 데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장점 많지만, 상품화 대중화 앞에서 주저앉은 피

 

농업기술원에서 알려주는 대로 충북 괴산의 잡곡 농산 회사에 확인해 보니, 누리집에는 ‘피쌀’ 상품을 소개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판로를 문제로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져서 더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험 재배 중 전북 부안에서 요청해 도움을 주었으나 현재 생산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 이미 벼베기가 끝난 논. 곤포(梱包 : 거적이나 새끼 따위로 짐을 꾸려 포장함. 또는 그 짐) 사일리지가 흩어져 있다. (10.20.)
▲ 수확을 끝내고 벼의 그루터기만 남은 논.(10.30.)

결국 피는 볏논에서 벼의 영양분을 빼앗는 잡초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일손이 귀한 농촌에서 볏논에서 자생하는 피는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때 처리되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한살이를 마치는 것이다. 농경을 시작한 인류에게 한때는 주곡으로 기능했던 피는 볏논에 더부살이하면서 시방, 과잉생산으로 45년 만에 최대 폭락의 위기에 처한 쌀(벼)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2022. 11.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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