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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파리바게뜨) 불매운동, 혹은 ‘윤리적 소비’

by 낮달2018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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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그룹 계열 빵 제조공장 20대 여성 노동자 끼임 사망 사고

▲ 지난 17일 에스피씨(SPC) 본사 앞에서 열린 '제빵공장 청년노동자 사망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사진

지난 15일 새벽에 경기 평택에 있는 에스피씨(SPC)그룹 계열 빵 제조공장인 에스피엘(SPL) 평택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숨진 노동자는 입사한 지 2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며, 평소 가족을 부양해온 ‘착한 딸’이었다고 알려졌다.

 

SPC그룹 빵 공장의 20대 노동자 끼임 사망 사고 

 

사고와 함께 노동자가 숨진 당일 밤부터 회사에서 공장을 재가동하는 등 부실한 대처 등이 알려지면서 사회관계망(SNS)을 중심으로 에스피씨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임종린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 지회장의 단식투쟁 때에 이어 시민들의 두 번째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최근 시민 사회와 청년들의 연대는 첫 번째 연대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하게 번져가고 있다. 젊은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과 회사 쪽의 납득할 수 없는 대응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소비자운동으로 타오른 것이다. 시민 사회와 더불어 청년들이 함께 연대의 손을 맞잡게 한 것은 ‘생명보다 이윤’에 기울어진 자본에 대한 분노다.

 

누리꾼들은 각종 사회관계망(SNS)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에스피씨 계열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며 불매운동에 나서고 있다. 사고 당시 고인이 2인 1조로 일했다는 회사 쪽의 설명과는 달리, 혼자서 일하다 참변을 당했다는 증언도 새로 나오면서 불매운동도 뜨거워졌다.

 

에스피씨 그룹의 반노동적인 행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다. 2017년 노동자 불법파견 사실이 드러나 제빵기사 등 5천3백여 명을 직접 고용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시정명령을 받은 데 이어, 이듬해 노동자 처우 개선 등을 담은 사회적 합의안을 마련하고도 ‘자회사 직접 고용’ 외에는 합의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노동자에게 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승진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을 차별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도 노동위원회 판정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에 올 3월부터 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이 부당노동행위 중단과 사과 등을 요구하며 5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고, 시민들은 불매운동과 매장 앞 1인시위 등으로 힘을 보탰다.

 

그러나 에스피씨 그룹은 노조가 시민 사회와 함께 요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았고, 마침내 노동자의 희생까지 빚어졌다. 시민과 청년들은 “죽음으로 빚은 빵을 거부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끼임 사망 사고 계기로 대학가에도 ‘SPC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다.

▲ 20일 서울대 내 파리바게뜨 매장 앞에 붙은 대자보.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제공

서울대에는 에스피씨 브랜드인 ‘파리바게뜨’와 ‘파스쿠찌’ 매장이 있고, 에스피씨와 허영인 회장이 출연해 지은 ‘SPC농생명과학연구동’과 ‘허영인 세미나실’이 있다. 학생들은 “‘피 묻은 빵’ SPC가 학교 안에 있다니 부끄럽다”면서 불매운동과 함께 학생들의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지난 20일에는 위 매장과 세미나실 등에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소속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였다. 학생들은 “오직 이윤을 위해 비용 절감만을 추구해온 에스피씨 그룹의 ‘반사회적’ 태도는 최소한의 안전 설비와 인력 충원마저도 비용 절감의 대상으로 삼아오며 결국 청년 노동자의 생명까지 앗아갔다”라며 “에스피씨 그룹이 사망사건 재발 방지를 위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을 때까지 에스피씨 그룹 불매에 동참하자”라고 적었다.

 

지방에서 뉴스로 소식을 전해 듣고 있긴 하지만, 이 불매운동이 단발성으로 타오르다 말고 꺼질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그 분노가 단순히 숨진 노동자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그런 사고를 유발한 우리 사회의 노동 상황과 함께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비정한 기업 문화에 대한 비판적 공감과 분노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피 묻은 빵’

▲ SPC그룹의 주요 브랜드들.

에스피씨 그룹의 점유율은 동종 업계에서 압도적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식품산업 통계정보에 따르면 SPC 계열사 5곳 매출 비중 83.4%(SPC “통계 분류 체계상 오류…실제 비중은 40%대 불과”하다고 반박)에 이른다. 파리바게뜨 3425개, 배스킨라빈스 1446개, 던킨도너츠, 579개, 파스쿠찌 491개 등 그룹의 가맹점은 모두 6천 개가 넘는다.

 

그러나 그간의 반노동적 기업 경영에다 이번 사고로 파리바게뜨는 ‘피 묻은 빵’이라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수사를 얻었다. 이번 사고에서 노동자는 샌드위치 소스 배합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으니, 이 ‘피’는 단순히 비유에 그치지 않는 생생한 현실의 적시다.

 

잭 런던의 장편소설 <강철군화>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여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로 뒷날 자기 아내가 되는 애비스에게 “당신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가 피로 얼룩져 있다”라고 말한다. 말굽 편자 대장장이 출신의 노동자 어니스트가 애비스의 부친이 방직공장에 투자한 주주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였다. [관련 글 : 강철군화, 독점자본주의의 미래]

 

그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면사 공장에서 여섯 살,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매일 밤 열두 시간 교대로 부려 먹는 걸 일러 “공장의 배당금은 그 애들의 피에서 지급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피’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 죽어간 ‘노동자의 희생’을 가리킨 강력한 은유였다.

▲ 17일 SPC 본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SPC 로고에 사고 해결을 위한 요구안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고, 이윤 창출에만 골몰하는 반노동적 자본의 폐해는 ‘빵’뿐 아니라, 숱한 ‘피 묻은 상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이윤에 눈먼 자본은 기업의 확장과 부의 축적을 꾀하지만 그런 기업의 지속은 가능하지 않다. 이번 불매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연대가 경고하는 바가 그것이다.

 

‘윤리적 소비’와 ‘도덕적 시민’

 

우리 동네에도 딸애가 가끔 식빵을 사 오는 파리바게뜨 가게가 있다. 아마 유일하게 성업 중인 가게가 아닌가 하는데, 지난번과는 달리 아이는 아예 “영원히 거길 이용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며 최근 발을 끊었다.

 

‘불매운동’은 여러 층위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부도덕한 기업의 물건은 사지 않는다”는 ‘윤리적 소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재단에서 운영·판매하는 네팔산 ‘공정무역 커피’ 1호를 사 먹지만, 노조를 부정하며 노동자들에 대한 집요한 노무관리 방식으로 악명 높은 삼성의 상품을 사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 [관련 글 : 착한 커피혹은 더바디샵, 삼성물건 안 쓰고 살기]

 

SPC 불매운동이 언제까지 이어지고, 그것이 SPC그룹을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불매운동을 촉발한 분노는 우리를 눈먼 소비자가 아니라, 윤리적 방식으로 소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도덕적 시민으로 거듭나게 할 수는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야만’과 구별 짓게 하는 가장 소박한 방식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2022. 10.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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