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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베란다의 꽃들

by 낮달2018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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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 뒤편 펜스를 휘감은 나팔꽃
▲  오죽 ,  나팔꽃 ,  메리골드 ,  분꽃 ( 시계 방향으로 )

주변에 꽃을 가꾸는 이가 있으면 저절로 그 향을 그윽하게 누릴 수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식으로 표현하면 ‘근화자향(近花者香)’인 셈이다. 지난해에 같이 전입한 동과의 동료 교사는 쉬는 시간 틈틈이 땅을 일구어 온 교정을 꽃밭으로 꾸며 놓았다. 나팔꽃, 분꽃, 옥잠화, 좀무늬비비추, 메리골드……. 무언가 허전하다 싶은 공간마다 수더분하게 자란 꽃으로 교정은 편안하고 밝아 보인다.

 

게다가 같이 2학년을 맡은 동료 여교사는 조그마한 화분마다 꽃을 길러서 창문 쪽 베란다 담 위에 죽 늘어놓았다. 워낙 무심한 위인이어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는데, 2학기 들면서 무심코 바라보았던 화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채송화 .  이렇게 화사한 자태를 가진 꽃인지는 미처 몰랐다 .

 

눈에 익은 꽃이라곤 채송화뿐이다. 그런데 어럽쇼, 채송화가 이렇게 자태가 아름다운 꽃이었던가. 늘 화단이나 담 밑에 오종종하게 피어 있던 꽃이어서 무심코 보아 넘겼던 건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채송화는 화사할 뿐만 아니라 그 꽃술의 정교함이 놀랍기 그지없다.

 

한 화분에서 피어나는 꽃이 무려 세 가짓빛이다. 화사한 빨간빛이 있는가 하면, 밝은 노란빛, 그리고 주황빛 꽃이 피는 채송화는 통통하게 살찐 원기둥 형의 붉은색 줄기와 잎과 어울려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꽃은 낮에 햇볕을 받을 때만 피고 오후에는 시든다고 하는데, 어떤 날은 꽃을 피우지 않고 건너뛸 때도 있는 듯하다.

 

어쩐지 오동통한 줄기와 말 이빨을 닮은 잎이 눈에 익다 싶었다. 백과사전을 검색해 보니 ‘쇠비름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이란다. 잠깐 어리둥절해진다. “관상용으로 전국적으로 재배되며, 한방에서 종창, 각기 등의 치료에 사용하고 살충제로 쓴다.”라고 하는데 정작 그 화사한 자태와 향에 견주면 어울리지 않는 ‘쓸모’가 아닌가 싶다.

 

▲  마삭줄
▲ 엔젤가랑코에는 백업 과정에서 사라졌고, 이건 이름을 모르겠다.
▲  오색기린초와 거미줄바위솔

담 위에 얹힌 묘한 잎의 화초는 ‘마삭줄’이라 한다. 글쎄, 이놈도 눈에 익은 것이긴 한데, 이름이 마삭줄인 건 처음 알았다. 산록의 숲속에 나고, 바위나 나무에 기어오르는 상록 덩굴나무라 한다. 꽃은 어떻게 피는지 모르겠으나 잎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둥글고 도톰한 잎이, 마치 단풍 든 것처럼 어떤 놈은 빛이 바랜 듯, 또 어떤 놈은 화사하고 짙은 분홍빛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마치 약탕기처럼 생긴 나지막한 옹기화분에 철철 넘치는 듯한 이 덩굴풀은 절묘한 각도로 긴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다.

 

담 위에 나란히 일렬종대로 서 있는 화분 속의 꽃 이름을 하나씩 배운다. 엔젤가랑코에, 오색기린초, 거미줄바위솔…….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마음에 담아서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한 저 낯선 이름을 새겨둘 공간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빈 시간이면 베란다에 나와 화분의 꽃들을 하나씩 눈여겨 둘러본다. 오늘 채송화는 언제쯤 꽃을 피울까. 오늘 피는 꽃은 무슨 빛깔일까……. 서둘러 찾아온 가을을 깨닫지만, 교정의 정적 속에 들려오는 건 매미 소리다. 우리는 소슬한 바람 속에 문득 무성했던 지난여름을 추억하면서 시방 성큼 다가선 가을 앞에 무심히 서 있다.

 

 

 

2008. 8.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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