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50년 3월 20일, 재독작가 이미륵 타계
1950년 3월 20일, 독일 뮌헨 근교 그래펠핑(Gräfelfing)에서 망명 한국인 작가 이미륵(李彌勒, 1899~1950)이 위암으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51세.
그는 독일인 친구와 제자, 그리고 양어머니 자일러(Seyler)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통제를 맞고서 “애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만세’를 낮은 목소리로 불러 좌중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다음 임종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독일이, 독일인이 사랑한 한국인이었다. 그가 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만큼 독일인이 아끼는 책이 되었다. 떠난 지 70년이 가깝지만, 이미륵과 그의 문학은 여전히 독일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독일인이 사랑한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본명은 의경(儀景)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당시 조혼 풍습대로 혼인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안중근의 사촌 형 안봉근의 권유로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이미륵이 1920년 5월,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분도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한 달 뒤, 대구지방법원은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륵은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1921~1923)하였고, 1925년 뮌헨 대학 동물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피압박 민족 결의대회에 참가했다. 이미륵은 대회에서 베를린대학의 이극로(1893~1978), 파리대학의 김법린(1899∼1964)과 함께 결의문 ‘한국의 문제’를 작성하여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로 옮긴 뒤 작은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였다.
1928년 이미륵은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는 역사상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물학자로 사는 대신 이후 문필가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동물학을 포기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1년 이미륵은 독일 문예지 <디 다메(Die Dame)>에 ‘하늘의 천사’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이미륵은 1945년까지 여러 지면에 한국의 이야기와 논평, 단편 ‘수암과 미륵’,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발표했다.
초판·재판 매진, 독일 중고교 교과서 수록
그가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한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파이퍼 출판사에서 나온 초판은 물론, 1950년에 나온 재판도 매진되었다. 작품에 대한 100여 개의 서평은 모두 찬사 일색이었다. [관련 글 :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이 책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아직껏 없었던 좋은 보고서다. 여러 나라에서도 갖고 싶어 할 보고서다.”
- constanze
“이 책이 우리로 하여금 즐겨 읽게 하는 것은 이국적인 주변이 아니라 책 속에서 한 인간이 인간 사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berliner hete
“이 책의 초 개인적인 문제는 동양과 구라파의 접촉에 있다. (……) 그의 고상하고 고결한 문체 속에는 동서양의 접촉을 수행하려는 저자의 은밀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소설이다. 격렬한 점이 없이 조용히 흐르는 산문이다. 이 사랑스러운 책에 내포되어 있는 불변성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균일성은 위안을 준다. 비록 슬픔이 어떤 사람의 영혼에서도 없어질 수 없을지라도.”
- wihelen. stein hause
“이미륵 씨는 어머님을 추모함으로써 그의 소년 시대의 기록을 바쳤다. 초판은 1946년 파이퍼 출판사의 전후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이 제2판은 이 추억의 저자 이미륵 씨에게 바친다. 우리들이 만났던 가장 순수하고도 섬세한 사람이었던―.
(……) <압록강은 흐른다> 신판에 있어서 우리들은 민족이나 인종차별 없이 인생의 최고의 정직과 선량이라는 것을 자신이 세계의 탁류 중에서 시범한 인간과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방인인 그가 우리들에게 외계와의 이해에 있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것을 더욱더 깊이 파고 또 깊이 실천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 piper verleg 후기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이 쓴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이었다. 그의 소년 시절부터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를 회고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으로 평가받았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독일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미륵은 1948년부터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외래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어와 동아시아 문학, 그리고 동양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로 뮌헨대학교의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귄터 데본 교수 등은 독일의 주요 동양학자가 되었다.
반나치 평화주의자 이미륵
이미륵은 열렬한 반 나치스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처형된 뮌헨대 후버 총장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일화는 그가 매우 속 깊은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나치가 한참 득세하고 있던 시대에 그가 스웨덴에 여행 갔었다. 같은 기차간에 탄 어떤 독일 사람이 이미륵 씨를 붙들고 맹렬히 히틀러 찬양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다 듣고 앉았던 그는 얘기가 끝나자 물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누구입니까?”
그 말에 그 독일 사람은 그를 마치 무슨 진기한 동물을 바라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니, 지도자 히틀러를 모른단 말입니까? 그분의 위업은…….”하고 또 약 반 시간 웅변을 한 후에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히틀러 이름도 모르다니!” 하고 물었다. 그는 “독일에서 왔습니다!”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하여 그를 죽음과 같은 침묵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 전혜린 “이미륵 씨의 무덤을 찾아서”(목마른 계절) 중에서
전혜린의 글에 따르면 이미륵은 어떤 나치 축제일에도 나치의 깃발을 달지 않았고, 오레온 광장에 있는 나치 전몰용사 제단 앞을 지날 때도 의무였던 경례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 당시로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전혜린은 자신의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미륵의 지인들이 모두 그가 ‘조용한 사람’이었고 ‘독특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회고했다고 전한다. 또 그녀는 ‘이미륵이 살고 생각한 것’은 ‘유리알처럼 맑고 조화에 찬 고전의 세계’라고 말했다.
이미륵은 뮌헨 교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95년 그래펠핑 신묘지 공원에 이장됐다. 그의 부음에 바쳐진 추모는 그가 삼십여 년 동안 이국에 머물면서 그가 말없이 보여준 인격과 영혼의 향기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찬사였다.
“이미륵은 서예가이자 의학도이고, 한학자이고, 작가이고 철학자였으며, 특히 그의 온화한 선비정신과 넘치는 인간미는 주위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소박한 서민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 제자 볼프강 바우어(뮌헨대학교 동양학부 교수)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의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미륵과 이의경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데다가 국내 유족과 연락이 되지 않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던 훈장증은 17년 만인 2007년에야 유족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가 잊지 못한 '꽈리의 고향'
내 서가에 있는 <압록강은 흐른다>는 1979년 범우사에서 발행한 중판(重版), 세로쓰기 본이다. 내년이면 40년이 되는 이 낡은 책,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는다.
“언젠가 우편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집에서 어떤 부인이 나와서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나의 소년 시대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 여자는 한 가지 꺾어서 나에게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 나는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 <압록강은 흐른다>(전혜린 역, 범우사, 1979) 중에서
2018. 3. 19. 낮달
· <위키백과>
· 박상미, 독일이 사랑한 한국인, 이미륵과 ‘압록강’을 걷다(<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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