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8년 3월 16일 – 미군, 베트남 미라이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
전쟁은 병사들이 수행하지만, 민간인들이 희생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한 사실이 민간인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가해 사실을 면책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쟁 중 민간인 희생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병사들이 자행하는 민간인 학살이다. 특히 베트남전쟁에서는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이 사건에서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한 이도 있었고,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 학살의 가해자는 미군 26명이었으나 한 명의 장교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것이 저 유명한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구정 대공세기간 동안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아래 해방전선)의 공격은 격렬했고 미라이를 비롯한 꽝응아이의 손미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미군은 대대적 반격으로 빼앗긴 지역의 수복해 가고 있었다.
347∼504명이 희생된 ‘묻지 마 학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미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년도인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파견된 미 육군 23보병 사단 11여단 20보병 연대 1대대 찰리(C) 중대는 그해 3월 부비트랩으로 중대원 5명을 잃었다. 이 부대도 구정 공세로 빼앗긴 지역에 대한 수복 작전에 투입되었다.
수복 대상에는 손미의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전 당시 미군은 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 ‘빨갱이pinko 마을’ 정도의 의미)이란 암호명으로 불렀다. 그 이름만으로 이미 병사들은 대상 마을에 대한 적의로 충만했을지도 모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휘관들은 이 작전이 아군의 피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오란 K 헨더슨 대령은 ‘확 쓸어버리라’고 지시하였고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3월 15일, 전투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찰리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중대원들에게 작전 개요를 설명하면서 오전 7시까지 해방전선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후일 메디나는 이 작전 계획이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을 비롯한 병사들은 여성이나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손미 지역의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3월 16일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찰리 중대는 공격용 헬리콥터와 함께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해방전선과 그 동조자는 도주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가옥 수색 과정에서 남아 있는 주민들을 모두 끌어냈다.
곧이어 자동화기를 난사하는 ‘묻지 마 학살’이 시작되었다. 1소대는 70~80명을,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마을에서 60~70명을 학살하였다. 3소대는 도망가는 주민들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하였다. 작전 완료 후 도착한 증원 부대가 인접 미케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름으로써 두 마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00에서 500명 사이였다. 이후 이틀간에 걸쳐 두 대대는 작전 지역의 가옥과 우물을 파괴하였다.
“그는 45구경으로 아기를 쐈지만 빗나갔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는 서너 발자국 더 다가가 다시 총을 쐈지만, 또 빗나갔다. 우리가 다시 웃어대자 그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 ‘미라이 학살 예비 조사 보고서’, 미 국회도서관
“몇몇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한 여성은 아이를 한쪽 팔로 안고 달렸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 종군 사진기자 로날드 L 헤브레일
“거긴 완전히 피범벅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헬리콥터 조종사, 암흑의 미라이, tru TV
<위키백과> 중에서
현장에 인간 도살자가 된 병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야만의 학살을 방조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의인이 있었다. 정찰비행 중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한 미군 헬리콥터 OH-23기의 조종사는 살아 있는 민간인 구출을 시작한 것이었다.
단 한 명의 의인, 헬기 조종사 톰슨 준위
그는 비행 중 노인, 여성, 아동 등 비무장 민간인의 시신을 보았지만, 그들이 저항한 흔적을 찾지 못했고 한 여성이 사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헬기 조종사는 착륙하여 자신의 헬리콥터에 부상자와 시체를 가능한 한 실어 옮기겠다고 말하고 작전 부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1소대장 켈리 소위는 이를 거부했다.
분노한 조종사는 소대원들이 구조를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리고 아군과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다. 그는 아이들 중심으로 서너 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료들은 부상자를 후송하는 과정에서 시체들 속에서 살아 있는 4살짜리 아이도 구해냈다. 그가 휴 톰슨 주니어( Hugh Thompson Jr) 준위였다.
미군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미라이 학살은 이듬해(1969)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사진이 잡지 <라이프(Life)>를 통해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폭로되었다.
미군이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 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한 결과 상급 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하라는 명령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 처벌을 받은 건 현장 지휘관이었던 1소대장 윌리엄 켈리(William Calley) 소위뿐이었다. 상급 부대의 명령이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윌리엄 켈리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그를 가택 연금으로 감형했고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학살의 책임을 지고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 셈이었다.
미라이 학살에서 유일한 ‘인간’으로 찰리 중대와 마찰을 빚으면서도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휴 톰슨 주니어(1943~2006) 준위와 그의 동료 2명은 1998년에 군인 훈장(Soldier's Medal)을 받았다. 훈장으로 기려지긴 했으나 그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30년이 지나서였다.
이 사건으로 베트남전쟁의 명분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급속히 확산하였다. 68운동에 뒤이은 미라이 학살로 말미암아 미국은 이후 베트남전쟁에서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하여 1973년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베트남에서 완전철수했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남의 일이 아니다
가해자였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적지 않았다. 1999년 한국은 민간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과 공동으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실위원회’를 공동 설립하고 조사에 들어갔고 미국 정부에 전달된 100여 종의 보고서와 20장의 사진을 통해 총 3건의 진실을 찾아내었다.
2000년 구수정 박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약 80여 건, 희생자는 9천여 명이라고 집계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관련 기사 : 베트콩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원수의 사과와 유감 표명도 이어졌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국빈 방문 중 베트남 국민에게 공식사과했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호찌민 묘지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같은 해 시민사회에서는 모금 활동을 벌여 베트남 퐁티에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2013년 9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각각 베트남 국빈 방문 중에 호찌민 묘소에 참배하고 헌화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트남에 대한 사과와 관련해 참전 전우회 등 참전 유공 단체와 유공자 등의 반발이 여전히 거센 상황에서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소녀상과 베트남 피에타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상징물, ‘베트남 피에타’가 베트남과 국내에 설치된다고 한다. 베트남 피에타는 정식 이름이 ‘엄마와 무명 아가상’(베트남어 제목은 ‘마지막 자장가’)인데 이 조각은 2011년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구상한 것이다. [관련 기사 : 소녀상 친구, 베트남 피에타]
베트남 피에타는 대지의 여신 위에서 학살된 아가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와 손을 움켜쥔 소녀(평화의 소녀상)와 그것은 피해자로서의 고통과 상처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그것은 또 ‘위안부’ 할머니들과 베트남 희생자들의 따뜻한 연대가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6. 3. 15. 낮달
**피에타(Pietà)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의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하며 조각 작품으로 표현된다.
지난 2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재판부는 베트남전 피해자 응우옌티탄(63)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3천만 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를 판결했다.
1968년 2월 당시 8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은 한국군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 마을에서 민간인 70여 명을 사살해 가족을 잃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며 2020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한 최초의 판결로, 사건이 일어난 지 55년 만에 내려진 한국 법원의 응답이었다. [관련 기사 : 응우옌티탄, 마침내 진실 앞에 “탕 러이(이겼다)”를 외쳤다]
이에 관해 한국 정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우리 장병에 의한 학살 없었다”며 법원 판결을 부정했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등은 이 판결에 대해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저하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관련 기사 : 한국 정부, 베트남전 배상판결 ‘항소’…베트남 “진실 외면, 매우 유감”]
이는 역사적 진실이 이제야 수면 위로 간신히 드러난 것일 뿐, 전쟁 범죄에 관한 국제 규범을 따르는 진실 규명이 갈 길은 멀기만 하다.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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