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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평민 의병장 김백선 군율로 처형되다

by 낮달2018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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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1896년 3월 27일-평민 의병장 김백선 군율로 처형

▲ 제천시 의병광장에 세운 한말 의병장 김백선의 동상. 두피디아 사진
▲ 청운면 갈운2리 하갈마을과 이웃한 갈운1리 아실 마을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김백선의 묘소.

1896년 3월 27일, 호좌의진(湖左義陣, 호좌는 충남)의 선봉장 김백선(1849~1896) 장군이 군기 문란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3월 16일, 그는 가흥(可興:영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했다.

 

본진에 돌아온 김백선은 중군장(中軍長) 안승우(1865~1896)에게 칼을 뽑아 들고 요청한 원군을 보내지 않은 데 항의하였다. 그러나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호좌의진의 대장 유인석(1842~1915)은 대로했다.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자를 군령위반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

 

산포수(山砲手)들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했던 호좌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은 동료 의병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 처형되었다. 제천의병의 실질적인 전투력이었던 김백선은 자신이 이끈 산포수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일부 자료에서 참수형이라고 하지만 총살형이었다) 향년 47세.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현 양평) 출신의 평민이다.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나 기개와 용력(勇力)은 비상하였다. 본명은 도제(道濟), 원래 산포수 출신이다. 갑오 농민봉기(1894) 때, 불량한 무리가 약탈을 자행하자 당시 지평 감역(監役) 맹영재와 함께 산포수들을 모아 이들을 소탕하여 그 공적으로 절충장군의 첩지를 받았다.

 

상민 출신의 포수로서는 정3품 절충장군이 된 것은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다. 그가 상민 출신으로 의병 지휘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신분의 변화 덕분이었다.

▲ 을미사변 이후 곳곳에서 봉기한 의병이 을미의병이다. 초기 의병의 모습.
▲ 1906년~1907년 사이의 의병. 촬영자는 영국 <데일리메일>의 종군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 (Frederick A. Mackenzie).

이듬해(1895) 겨울, 명성황후가 참혹하게 시해된 을미사변이 터졌다. 비분강개한 김백선은 지평 현감으로 있던 맹영재를 찾아가 창의(倡義)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산포수 출신의 평면의병장 김백선

 

“이런 흉변을 당한 때에 나라의 신민 된 자라면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관아에 앉아 인부(印符)를 차고 있는 신하로서 위로는 군부(君父)가 욕보는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게 된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동비(東匪 : 동학교도를 빙자한 무뢰배)를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그대에게 무슨 영화가 되겠느냐?”

 

김백선은 지니고 있던 총을 부숴 관아 마당에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유생 이춘영(1869~1896)이 찾아와 의거를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김백선은 지평 관아에 소속된 포군(砲軍, 산포수로 구성된 부대) 400여 명을 모아 시국을 규탄하고 호소하니 모두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에 세워진 지평의병 발상지 표석.
▲ 양평군 지평면에 있는, 지평의병과 한국전쟁 중 지평리 전투를 기리는 기념관. ⓒ 위키백과

이춘영과 함께 김백선은 1896년 1월 이들 산포수를 거느리고 이웃 지방인 강원도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擧義)했다. 맹영재의 방해를 피해 원주에서 거병한 이들을 ‘지평의병’이라 부른다. 이춘영과 같이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안승우와 평민들이 합류하여 의병의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지평의병은 원주 관아를 점령한 데 이어 제천으로 진격했다. 1896년 2월 7일, 영월에 머물고 있을 때 의암 유인석을 대장으로 옹립하면서 포수 중심의 지평의병과 유생 중심의 제천의병이 연합한 의병부대, 호좌의진이 탄생했다. 의진은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前軍將) 안승우(뒤에 중군장), 선봉장 김백선으로 구성됐다.

2월 11일, 제천에 입성한 호좌의진은 단양과 청풍을 거쳐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했다. 충주성 함락의 수훈 갑은 산포수로 구성된 선봉 부대를 지휘해 그날 새벽, 동문을 넘어 들어가 싸워서 성문을 연 김백선이었다. 의진은 충주 관찰사를 처단했지만, 2월 23일 수안보 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을 잃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의진은 3월 5일 결국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퇴각해야 했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3월 18일부터 이틀간 의진 선봉장 김백선은 가흥(경북 영주)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진지 점령을 진행하던 중 중과부적으로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서 기지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으로서는 점령을 눈앞에 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전투의 실패가 아쉬웠겠지만, 중군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는 안승우의 해명도 부득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을 뽑아 항명한 김백선에 대한 응징이 불가피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상민 신분을 지적하면서 처형을 불사한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적병이 앞에 있고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비록 보통 군사라도 될 수 있는 대로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여야 할 터인데, 더구나 호걸스럽기 백선 같고 용맹하기 백선 같은 사람이랴. 그의 죄라는 것이 일시 분을 참지 못한 것뿐인데 개과천선하도록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어찌도 그렇게 아낌없이 죽이고 말 것이랴.

그중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병권(兵權)이 빼앗길 것을 시기함인가. 평민에게 욕본 것을 분하게 여겨서인가. 원래 의거라는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해서이다. 가흥 싸움에 백선이 안승우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안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서 백선이 패배하고 의병들도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서 그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리니 제천의 패전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 송상도(1871~1946), 『기려수필(騎驢隨筆)』 중에서

 

김백선 처형은 유생의 사상적 한계 노정, 유생과 포군 간 불화 초래

김백선 처형은 당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천민 간의 신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또한 지도부 양반 유생들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결국 평민이자 포군 영수인 김백선이 처형된 후 제천의진 지도부인 양반 유생과 병사인 포군 간에는 불화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의 처형은 의병 진영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포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호좌의진의 맹장 절충장군 김백선이 처형되자 그를 따르던 지평의 포수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참여했던 포수들마저 군진(軍陣)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 양평군 양동면에 있는 양평 의병묘역의 을미의병 추모비 . 의병장 묘소를 모아 성역화 작업 중이다. 국가보훈처 사진
▲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에 있는 을미의병기념비. 국가보훈처 사진

산포수들이 이탈해 버린 의진은 연전연패했다. 포수들은 이른바 ‘산포계(山砲契)’를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조직력도 대단했고, 화승총에 비겨 성능이 월등한 엽총을 가지고 있어 의진의 실질적 전투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천의병은 5월 25일 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서행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후 의병은 단양·충주·원주·영월·춘천·양구 그리고 안변·영흥·맹산·덕천·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회인현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에게는 1968년 대통령 표창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되었다. 대장 유인석에게 2등급의 대통령장이,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각각 독립장(3등급)이 추서된 것에 비기면 훈격이 인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백선이 군율 위반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말이다.

 

김백선의 묘는 생가가 있던 청운면 갈운2리 하갈마을과 이웃한 갈운1리 아실 마을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데 2008년 양평군에서 묘역을 정비하였다. 김백선의 묘소 바로 옆에는 전장을 누빌 때 타던 애마인 천비마의 무덤이 있다. 한편 양평군에서는 의병장들의 묘소를 모은 의병묘역을 조성하여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2018. 3. 26. 낮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⑤ 산포수 부대 이끈 절충장군 김백선

· 양평의병(13) 의병장 김백선⑤

· 권대웅, 을미의병기 의병부대 내부의 갈등 요인(국사편찬위원회)

· 제천의병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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