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에 대한 추억을 환기한 옛 ‘세시봉’의 구성원들
기타, 21세기 청춘의 감성을 흔들다
<한겨레> ‘ESC’의 커버 스토리로 ‘통기타, 다시 청춘의 감성을 흔들다’가 실린 것은 지난주다. 지난해 신드롬을 일으켰던 ‘슈퍼스타 케이 2’에서 장재인, 김지수가 메고 있었던 통기타가 요즘 ‘21세기 청춘’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기사다. 낙원상가에서 초보자들이 쓰는 저가의 기타가 동이 날 지경이며 주요 문화소비층인 2, 30대 여성 기타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도 곁들여져 있다.
‘통기타 치며 밤새 노래를 부르는 건 아저씨 문화’인데도 어느덧 통기타 배우는 이들에게 이는 ‘로망’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대중문화에 가끔 나타나는 복고조인지, 아니면 다른 문화적 변화의 하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자음에 길든 젊은이들이 통기타에 매료되고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도 ‘풍금’이라 부른 ‘오르간’으로 노래를 배웠다. 학교에 한 대밖에 없는 오르간은 5, 6학년 고학년 남자아이들이 네댓이 달려들어야 움직였는데 수업을 따라 교실을 옮겨 다녀야 했다. 도회의 중학교에 진학해서야 처음으로 ‘피아노’를 구경했으니 그게 ‘풍금’과 얼마나 다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북이나 장구, 징과 꽹과리 따위의 국악기 말고 우리가 구경할 수 있었던 양악기는 하모니카가 고작이었다. 마을의 꼬맹이들 모두가 이름을 부르던 노총각 ‘판이’가 연주해 주던 그 유려한 하모니카 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좀 더 개명한(?) 동네의 청년들이 기타를 친다는 이야기는 단지 풍문이었다.
기타 연주를 경험했던 당시의 우리 동무들은 기타를 ‘키타’라고 발음했다. 가수가 ‘카수’였던 것과 같이, 낯선 이름을 거센소리로 발음한 것은 시골 사람들의 ‘무의식적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자기 삶과는 무관한 낯선 악기나 삶의 방식에 대한 일종의 구분의식이 그런 발음으로 드러났던 것일까.
‘키타’와 ‘카수’, ‘낯선 삶’에 대한 ‘경계’와 ‘구분’?
고등학교에 진학한 해가 1972년이다.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불린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던 시기다. 그 당시 중고생들에게 가장 멋있는 그림은 통기타와 ‘야전’이라 불린 휴대용 전축 따위를 메고 ‘캠핑’을 가는 것이었다. 도시 근교의 유원지로 가는 역이나 버스 정거장에는 으레 차를 기다리면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내 주변에도 그런 여유를 일상으로 부리던 급우들이 없지 않았지만, 기타를 연주하며 과장된 발음으로 팝송을 노래하던 그들의 문화는 내게서는 멀기만 했다. 그들이 누리는 여유를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멋들어지게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은 그 시절 모두의 것이었다.
유행가를 비슷하게 흉내 내어 부르는 것을 빼면 나는 태생적으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집에서도 늘 스피커의 음량을 최저로 해 놓고 컴퓨터를 쓰는 이유는 예고 없이 쏟아지는 음악을 소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단지 내 삶과 어떤 형식으로 이어진 노래나 음악에 어쩌다 한번 귀를 기울이는 게 고작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30분을 견디지 못한다. 일에 열중하면 이미 귀는 닫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30분쯤 지나면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모두 소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천적 감각도 감각이려니와 어려서부터 음악적 훈련을 받아오지 못한 탓도 크리라.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아이들에겐 음악을 들려주어야겠다며, 저가의 음향기기를 장만하고 세미클래식 전집을 산 것은 그래서였다. 글쎄, 아이들에게 얼마나 음악을 들려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부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악과 친숙한 사이로 성장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해직 시기여서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쉽게 악기와 친해지지 못해서 아이들은 피아노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자랐다. 딸애는 얼마간 피아노를 배우는 듯했지만, 중간에 작파했고 아들애는 아예 피아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걸 몹시 후회하고 있다. 어렵더라도 그건 제대로 시킬걸…….
기타, 유한계급의 표지?
아이들이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때 기타를 사 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기타를 사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이들은 틈틈이 기타를 쳤는데 굳이 교습소에 다니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모를 닮아선지 끈질기게 거기에 골몰하지 않아 지금도 아이들은 초보를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이 기타를 배우는 걸 보고 학년말(가장 여유가 있는 이맘때다)에 한 달쯤 기타 교습을 받아보리라고 결심한 때가 있었다. 한 이태 전이다. 마침 아는 사람이 음악학원을 하고 있었는데 환영한다는 인사까지 받고도 정작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음악적 감각이 절벽인데다 손까지 굳은 사람이 기타를 배우겠다고? 나는 깨끗이 욕심을 접었다.
복직한 학교 동료 가운데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이가 있었다. 동호회 활동을 하던 이 동료가 이웃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가서 연주를 듣는 대신 우리는 순전히 동료애로 화분인가 꽃바구니를 보낸 게 고작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동료들도 음악에 무심하였던 것은 매한가지였던 것 같다.
기타는 때로 유한계급의 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조세희의 중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막내 영희가 연주하는 기타가 그것이다. 이 대도시 빈민가의 소녀가 치는 기타는 줄이 끊어졌다. 그것은 고물상에서 구해 온 제 기능을 잃은 악기였을 것이다.
영희는 온종일 팬지꽃 앞에 앉아 줄 끊어진 기타를 쳤다. ‘최후의 시장’에서 사 온 기타였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베토벤은 ‘기타는 그 자체가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다지만 글쎄, 내 무딘 귀로는 기타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결을 잘 알지 못한다. 기타 연주곡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아, 작가 윤후명의 소설집 <부활하는 새>에 실린 단편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같은 제목의 연주곡이 있다는 걸 알긴 했다.
(……)나는 그녀의 기타 소리를 들으면서 줄곧 어떤 폐허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폐허가 주는 연상 작용으로 그 곡이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고 여겨졌다. 도무지 맥락이 닿지 않는 소리였다. 알람브라궁전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곡이었다. 내가 폐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건물은 말짱하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옛 제왕(帝王)의 영화는 덧없이 사라졌다는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에서는 닭똥 냄새가 났다.
- 윤후명 단편소설,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중에서
윤후명 특유의 환상적 분위기 속에 마치 소품처럼 등장한 그 유명한 악곡을 정작 들은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소설에서 작가가 말한 폐허의 느낌이나 닭똥 냄새를 맡지 못한 건 물론이다. 단지 악기 하나만으로도 저런 오묘한 소리를 지어낼 수 있구나, 하면서 나는 감탄했을 뿐이다.
기타 독주곡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을 듣는다. 섬세하고 맑은 소리의 결 너머로 나는 내 소년기의 한때를 아주 막연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절과 현재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강을 허위허위 건너가 본다. 기타가 흔든 건 ‘청춘의 감성’만이 아니다. 우리들 ‘중년의 추억’도 거기 흔들렸다.
2011. 2.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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