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0년 3월 15일, 전대미문의 추악한 부정선거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사건도 바래어간다. 그 퇴색은 반드시 현재 시각과의 시차에 따르지는 않는다. 사건의 규모나 영향력, 사건의 성격과 범위가 전국을 포괄하는가, 지역에 한정되는가도 변수다. 어떤 것은 잊히고 어떤 것은 왜곡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바래어가는 역사, ‘3·15부정선거’
아무리 전후 세대라 하더라도 6·25 한국전쟁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4·3항쟁이나 5·18민중항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거나 왜곡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건의 전국적 성격을 외면하고 의도적으로 지역적 범주로 이해하고자 하는 정치 사회적 의도가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던 4·19혁명이나 1987년 6월항쟁은 그 실상이 가려져 있는 경우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세력들이 현존하는 권력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4월 혁명을 짓밟은 5·16 군사쿠데타의 후예들은 물론이거니와 6월항쟁 때 시민들에게 굴복한 신군부가 만든 정당도 이름만 바꿔가며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4·19혁명을 촉발한 3·15부정선거도 같은 경우다. 특히 3·15부정선거는 13년째 집권 중이던 초대 대통령이 사임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결국 제1공화국 붕괴의 배경이 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추악한 부정선거를 전후한 이승만 독재의 실상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있다.
장기집권을 이어가기 위해서,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3·15는 제1공화국과 이승만의 종말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제4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기획된 것이지만 기실 그것은 1952년 선거에서 재선된 이승만의 집권욕에서 비롯된 자충수였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이승만(1875~1965)은 1952년에도 재선을 원했지만 앞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 다수당이 되지 못했다. 이에 이승만은 한국전쟁 도중에 치러진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어 조봉암을 누르고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장기집권욕으로 유린당한 민주주의
1956년 3대 대선을 앞두고 이미 장기집권을 꿈꾸기 시작한 이승만은 헌법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이른바 ‘초대 대통령 무제한 연임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한다. 이 개헌안을 가결하기 위해 자유당은 매수, 협박, 회유 등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사실상 개헌안은 부결된다. 이에 자유당은 이른바 ‘반올림의 원리’를 내세워 부결된 개헌안을 가결로 번복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다. [관련 글 : 이승만 정권, 사사오입 개헌으로 중임제한 폐지]
개헌 후 치러진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야당 후보인 신익희의 사망으로 조봉암을 또다시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은 자유당 후보(이기붕)가 아닌 민주당 후보(장면)가 당선되었다.
1958년 자신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진보당의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제거한 이승만은 1960년 제4대 대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경제 사정이 악화하자 서민들의 삶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민생의 악화와 함께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시행한 무리한 개헌은 정치적인 부패를 심화시키게 되고 국민은 차츰 자유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정적이 사망하거나 제거되면서 순탄할 듯한 그의 4선 가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1960년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서 자유당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정선거밖에 없었다. 통상 5월에 치러온 대통령 선거를 법에 규정된 날보다 두 달이나 앞당겨 치르기로 한 것도 자당에 유리하게 선거를 치를 속셈 때문이었다.
10년이 넘게 장기 집권해 온 자유당은 이미 자정 능력을 잃고 있었다. 정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이기붕을 선출했지만, 이승만의 또 다른 측근인 이범석과 윤치영도 부통령으로 출마하는 등의 불협화음이 드러난 것이다. 야당인 민주당에서 조병옥-장면이 정·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기붕 당선을 위한 패착, 부정선거 획책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두고 신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56년 대선에 이어 두 번째로 단독후보가 되었다. 유력한 야당 후보의 급서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떼어놓은 당상이 되었지만, 이는 자유당에 새로운 패착을 가져오고 말았다.
자유당은 야당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지난 대선 때의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그들은 공무원과 경찰을 이용한 선거운동을 시행한다는 기본 계획에다 정치 깡패 동원, 공개 투표, 완장 부대 활용,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 투입, 야당 참관인은 투표소에서 추방하는 등의 세부계획을 마련해 이를 시행했다.
투표일인 3월 15일에는 전국 투표소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 부정선거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 당일 오후에 민주당이 ‘부정선거에 의한 선거 무효’를 선언한 뒤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미 보름 전인 2월 28일에 대구에서 고교생들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획책에 반발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유세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이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된 이 시위는 이후 3·15 마산시위의 밑불이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관련 글 : 2·28-대구 고교생들, 이승만 선거 방해 공작에 맞서 일어서다]
부정선거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는지 개표가 시작되면서 자유당 이기붕 후보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정부는 이후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율을 조정하라고 지시해야 할 정도였다.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보였던 민주당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이며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마산 등지에선 시위가 계속되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1944~1960) 군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마침내 이 시위는 4월혁명으로 발전했다.
4월 19일, 경찰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4월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이자, 오후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183명이 사망했고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했다. 독재자를 지키기 위해 경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발포한 것이었다. [관련 글 : 미완의 혁명과 ‘노래’들]
4월 25일 교수단이 시국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자, 결국 이튿날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붕괴했고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혁명 때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던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튿날 새벽 0시께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쏘고 자신에게도 방아쇠를 당겼다.
독재자, 혹은 권력의 최후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 날인 5월 29일에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 자신의 책임인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빼앗고 독립한 나라의 민주주의 압살한 부끄러운 초대 대통령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진 것일까.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아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의 삶과 행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논란이 많은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 부분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정부 수립 후에 식민지 역사 청산 실패, 13년 동안의 독재와 민주주의 유린에 대해서는 여러 상황 변수를 동원하더라도 그 공과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이 결국은 망명으로 귀결된 독재자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추앙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심지어는 그가 행정부의 수반이 된 정부 수립조차 ‘국가 수립’으로 왜곡하는 등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묻어버리는 일에 급급하다.
3·15 부정선거는 우연히 일어난 돌발 사건이 아니라, 헌법을 유린해 가며 장기집권의 노욕을 달성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이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자행한 선거 범죄였다. 그리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국민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의 목숨까지 빼앗은 부끄러운 야만의 역사다.
반세기가 훌쩍 흘렀지만, 노회한 정치가 한 사람의 노욕 때문에 벌어졌던 역사의 한 장면을 돌아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이후에도 독재와 부정선거가 되풀이되었지만, 우리의 역사는 여전히 그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 3.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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