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73년 3월 6일, 소설가 펄 벅 영면하다
1973년 오늘(3월 6일) 이른 아침, 필라델피아 북쪽 벅스 카운티에 있는 그린힐스 농장에서 소설가 펄 시던스트라이커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이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세. 퓰리처상(1932)과 소설 <대지(The Good Earth)>로 노벨문학상을 받은(1938) 작가였지만 거기 헌신적인 봉사를 더한 열정적인 그녀의 삶은 작가 이상의 것이었다.
전 세계의 신문들이 다투어 그의 부음을 전했고 그의 문학을 소개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72년 중국 방문 때 동행을 원했던 펄의 요청을 거부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녀를 ‘동서 문명의 다리’라고 칭송했다.
펄 벅, 공공의 선을 위한 열정과 헌신
그녀의 장례는 농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낳은 유일한 혈육 캐럴은 오지 못했고 입양한 아이들만이 참석했다. 비종교적인 짧은 장례식이 끝나고 펄은 집 근처의 커다란 서양 물푸레나무 밑에 묻혔다. 그녀가 도안을 뜬 묘비에는 영어 이름 대신 소용돌이무늬 안에 ‘펄 시던스트라이커’라는 중국 글자가 새겨졌다.
펄 벅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다. 일찌감치 나는 그가 <대지>의 작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대지>를 읽지 않았고 읽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떤 경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운 좋게 노벨상을 탄 작가라며 그를 잔뜩 시뻐 보고 있었던 것 같다.
펄 벅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의 미국 문학기행 덕분이었다.[관련 기사 : 이런 ‘반공주의자’ 펄 벅] 선생은 유명 작가이면서도 유독 한국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는 그를 그의 정치 활동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펄 벅의 전기 <펄 벅 평전>(은행나무, 2004)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자 펄 벅 인터내셔널 위원장 피터 콘(Peter Conn)의 <펄 벅, 문화적 전기(Pearl S. Buck: A Cultural Biography>)를 번역한 것이다.
이 704쪽짜리 전기는 그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와 선교사, 어머니로서의 펄 벅을 복원하고 있다. 그리고 비로소 편견의 베일을 벗은 한 작가의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게 한다.
펄 시던스트라이커는 생후 3개월 만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펄은 싸이전주(賽珍珠)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불리면서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길 만큼 중국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펄은 1910년 대학을 다니기 위해 귀국해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펄이 시던스트라이커 대신 ‘벅(Buck)’을 성으로 쓰게 된 것은 1917년 중국 농업을 연구하던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면서였다.
1920년 펄은 딸 캐럴을 얻지만, 그 아이는 대사 장애 유전병인 페닐케톤뇨증(PKU)을 앓고 있었다. 치료하지 않으면 지적 장애를 일으키는 병이었지만 그 시기엔 치료법은 물론 그런 병이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결국, 캐럴은 지적 장애인이 되었고 펄은 자서전에서 그 아이가 자신을 작가로 이끌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 인생의 전반부 40년 동안을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보낸 펄은 자신을 ‘문화적 이중 초점’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조국인 미국보다 중국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인종 간 이해’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중국에서의 40년, ‘문화적 이중 초점’
중국을 다룬 그의 소설들은 선교사의 딸이었던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주제 면에서, 특히 아시아에 대한 묘사, 그중에서도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 측면에서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
중국계 미국 작가인 맥신 홍 킹서턴(Maxine Hong Kingston)이 벅을 서양 문학에 처음으로 아시아인의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이라 찬사를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벅이 중국인 등장인물들을 감정과 연민을 담아 묘사함으로써 내 부모님을 내게 번역해 주었고 우리 조상들과 우리의 관습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1930년 펄은 중국에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첫 장편소설 <동풍 서풍>을 출판하였는데,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1년이 채 안 되어 3번이나 다시 인쇄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어 빈농 출신의 주인공 왕룽과 그 아내 오란, 세 아들의 가족사를 그린 장편 <대지>(1931)를 출판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대지>는 왕룽의 사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군벌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 <분열된 집>(1933)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1934년 이후, 펄은 자신의 작품을 출간해 온 존데이 출판사의 리처드 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하였다.
펄 벅은 70권의 책을 쓰고 그중 15권은 ‘이달의 북클럽’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것은 책의 수준과 판매를 일정하게 보장하는 장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1938년에 펄은 <대지>로 미국의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20세기 가장 대중적인 소설가였다. 펄 벅에 이어 미국의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55년 뒤인 1993년이었다. 그러나 펄 벅은 미국문학사에서 잊힌 존재였다. 그의 전기를 쓴 피터 콘이 쓴 600쪽에 이르는 미국문화사에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다.
피터 콘이 “펄 벅은 예전에 우리의 문화 경관에 크게 어른거렸다가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역사 이해에 장애를 준 작가의 완벽한 사례”라고 말하는 이유다.
아버지가 일생을 선교에 몸 바쳤지만 펄 벅은 기독교 선교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것은 부친의 보수적인 선교 활동 때문이었다. 소설 <대지>에서 선교사가 등장하는 장면도 기독교가 왕룽 일가에게 맞지 않는다는 강조하는 듯한 부분일 정도였다.
<대지>로 유명해지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중국 선교를 비판했다. 장로교 여성단체의 요청으로 강연을 하며 그는 선교단을 ‘정신적 제국주의’로 호칭하고 복음 전도의 결점, 미신, 문화적 오만, 잔인함을 폭로했다. 그는 결국 선교사직을 사임해야 했다.
“저는 교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정통 선교사들. 다시 말해 지긋지긋한 설교를 늘어놓고. 자신들이 구원하려는 사람들에게 동정심도 갖지 않고, 자기 문명이 아닌 다른 모든 문명을 비난하고, 서로 자기 판단이 옳다고 강요하는 선교사들을 보았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교양 있는 사람들 앞에서 거칠고 아둔한 모습을 보이는 선교사들을 보고 창피하고 가슴이 답답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 그녀는 저술을 계속하면서 7명의 아이를 입양해 길렀다. 두 번째 남편 리처드 윌시와 함께 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비교 문화적 이해를 도모하는 동서협회(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매카시즘의 표적이 되는 바람에 1950년대 초 해산하였다.
펄은 또 10년 이상 잡지 <아시아>를 발행하였고 1940년대 초에 중국인 이민 배제법을 폐지하기 위한 전국 운동을 이끌었다. 또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들을 억류한 정책에 강력히 항의한 소수의 미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웰컴 하우스’ 설립
펄은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녀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거나 인종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기존 입양기관들이 아시아인과 미국인의 혼혈과 아시아인 아이들을 입양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웰컴 하우스를 설립(1950)했다.
이듬해(1951)에는 자신의 지진아 딸 캐럴의 이야기인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를 출간함으로써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즉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인 로즈 케네디가 지진아 딸 로즈메리 이야기를 공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정신질환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데 이바지한 것이었다.
1964년에는 펄 벅 재단을 설립하여 아시아 10여 개국에서 2만5천 명이 넘는 미국인과 동양인 혼혈아동에게 의료 혜택과 교육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1960년 11월 첫발을 디딘 이후 1969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한국을 오가며 경기도 부천에 펄 벅 재단을 설립(1967)했다.
일찍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반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한 그는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다. 그는 1962년 존 케네디 대통령에게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일본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했다. 1968년에는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한 작품 <새해(The New Year)>를 출간했다.
인권,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
펄 벅은 평생에 걸쳐 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유색인 발전을 위한 전국 연합(NAACP)의 기관지에 정기 기고했다. 이 단체(NACCP) 사무국장을 역임한 월터 화이트(Walter White)가 1942년에 “미국의 백인 중에서 흑인 삶의 현실을 이해한 사람은 둘뿐”이라며 “그 두 사람은 여성으로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와 펄 벅”이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펄 벅은 미국의 인권 옹호 투쟁에도 이바지했다. 대다수 백인 지식인들이 인종편견에 시선을 돌리기 10여 년 전에 이미 그는 에슬란다 로버슨(Eslanda Robeson)과 함께 미국의 인종차별을 다룬 대담집 <미국의 주장>(1949)을 펴냈던 것이다.
펄 벅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현대의 산아제한을 지지하여 친구인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를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 있는 여성 중 한 사람’, 정의를 위한 현대 개혁 운동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라고 불렀다.
여성과 유색인을 위한 펄 벅의 이러한 활동은 결국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Edgar Hoover)의 적대적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에프비아이(FBI)가 1937년부터 작성한 펄 벅 관련 서류는 거의 300쪽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펄의 문학적 명성은 한계점까지 위축되었다. 그의 주된 주제였던 중국과 여성은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잊히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게 된’ 이유를 피터 콘은 “그녀는 그녀의 복잡다단한 삶과 업적을 잘못 그린 풍자만화에 가려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좌우로부터 공격받은 ‘정치적 적개심의 희생자’
펄 벅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경이로우며 반대로 장제스의 정적 숙청은 스탈린과 닮았다고 비난하며, 중국 농민을 포용하는 유일한 정당은 공산당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적극적인 인권 활동 때문에 우파의 공격을 받은 데다가 반공산주의 발언 때문에 좌파의 불신을 받은 정치적 적개심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펄이 죽고 몇 달 뒤인 1973년 8월에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이 문을 열었다. 장소는 1848년에 여성 인권 투쟁 집회가 처음 열린 뉴욕 세네카 폴스였다.
개관일에 20명의 여성이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정치 지도자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수전 앤서니, 엘리너 루스벨트, 헬렌 켈러, 환경주의자 레이첼 카슨, 그리고 펄 벅 등이었다. [관련 글 : 수잔 앤서니, ‘역사적 투표’에 성공하다 / ‘세계 여성의 날’과 노회찬의 장미, 마거릿 생어와 낙태죄 논란]
작가로서 사회, 인권운동가로서 헌신했던 펄 벅을 그러나, 피터 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가 알게 된 펄 벅은 친절한 만큼 냉혹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불안하고, 갈등을 빚고, 한계도 지닌 여성이었다.”
피터 콘은 책머리와 맺는말에서 ‘펄 벅 인터내셔널의 서류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김경림이라는 두 살 된 고아’를 이야기한다. 그가 한국에서 입양해 지금은 제니퍼 경 콘이라 불리는 그 아이는 영양실조와 온 몸에 염증이 난 상태로 20년 전에 ‘그의 삶에 들어왔다.’
제니퍼는 사망률이 50%였던 고아원 출신이었다. 지금 제니퍼는 스미스 대학을 졸업해서 뛰어난 요리사이자 작가가 되어 있고 뉴욕시에 있는 한 재단에서 집 없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콘은 펄 벅이 없었다면 자신이 결코 제니퍼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며 글을 맺고 있다.
경기도 부천에는 2000년 이희호 여사가 펄 벅 상을 받은 뒤 추진위원회를 발족, 2006년 개관한 문화 공간 펄 벅 기념관이 있다. 펄 벅은 마땅히 기념되어야 할 인물이다.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 작가의 삶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017. 3. 5. 낮달
*덧붙임 : <펄 벅 평전>이 간행된 것은 2004년이다. 그러나 지역의 도서관에서는 그 책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혹시 싶어서 희망도서 신청을 했는데 얼마 후에 들였으니 빌려 가라는 전갈이 왔다.
<펄 벅 평전>은 704쪽에 이르는 하드커버 소장본이다. 책을 빌려다 놓았지만, 두께에 질린 데다 짬이 없어서 나는 닷새 만에 책을 반납해 버렸다. 이 책을 다시 빌린 것은 어저께다. 책이 얼마나 묵직한지 누워서 읽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책의 ‘들어가는 말’과 ‘4장 대지’를 읽고 나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삽하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아주 명료한 감각과 서술로 책은 펄 벅의 삶을 복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책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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