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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신라 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

by 낮달2018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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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신라능묘 특별전 1> 관람

▲ 신라능묘 특별전 황남대총 신라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 전시관 입구 ⓒ 국립경주박물관
▲ 전시회 포스터

수명이 고작 100년에 못 미치는 인간에게 있어서 천 년쯤의 시간은 일종의 불가사의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것이 단순히 100년이 열 번 되풀이된 단순 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의 누적임에랴. 인류의 역사 연구로 누천년에 걸친 역사의 속살까지 엿볼 수 있게 되었지만, 고대의 시간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1천5백 년 전 서라벌, 황금의 나라의 고분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물론 그것은 실제 무덤이 아니라, 거기서 출토된 유물로 재현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신라능묘 특별전 1 황남대총 신라 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2010.12.10.~2011.2.6.)를 관람한 것이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그 전날 밤을 감포 바닷가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귀갓길에 경주를 향했다. 수십 년만의 대설로 얼어붙은 도로는 이제 막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중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의 신라시대 절터에서 눈밭에 고즈넉이 서 있는 장항리 서5층 석탑(국보 236호)를 둘러보았다.

 

토함산을 넘어 경주로 들어간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경주박물관을 찾았다. 경주에 사는 동료 하나가 합류하면서 거기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을 추천한 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바늘같이 매웠고 박물관 주차장은 답사객들의 차량으로 빼곡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유적지다. 흔히들 이곳을 ‘벽 없는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거기 있다. 무엇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분은 이 도시가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 준다. 일제강점기에 경주 시내 일대에 외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고분 155기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절터의 서 5 층석탑과 동탑 .

1500년 전 왕릉, ‘98호 고분’ 속으로

 

이번 신라능묘 특별전의 대상이 된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원래 98호 고분으로 불린 경주 대릉원 안에 있는 숱한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은 쌍무덤으로 남분에는 왕이,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분(積石木槨墳)]인 이 무덤은 남북 길이가 120m이며 동서 지름이 80m인데, 높이는 남분 21.9m, 북분 22.6m이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무덤의 주인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는 5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이다.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문화적 요소는 많은 부분이 고구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황남대총의 축조연대를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잘 지내던 4세기 후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시기의 신라의 임금은 마립간으로 칭호로 불리었다.

 

남분의 주인공은 ‘마립간’이긴 하지만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라 왕의 칭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으로 바뀌는데 마립간은 삼한 시기부터 지역의 작은 나라를 이끌던 지배자인 ‘간(干, Khan)’보다 한층 높은 통치자를 일컫는 왕호다.

 

‘마립간(麻立干)’은 제17대 내물부터 22대 지증까지 6대의 임금을 부른 칭호인데 황남대총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세상을 떠난 마립간은 내물, 실성, 눌지 셋이다. 당연히 이 셋 가운데 한 사람이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특별전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일요일인데다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다. 우리는 천천히 어두운 전시실을 천천히 돌면서 이 1천5백 년 전 한 고대국가의 왕과 왕비가 누린 권력과 그 영광을 확인했다. 흔히 ‘황금의 나라’로 일컬어지던 이 시기 신라를 통치한 이가 바로 마립간이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관 꾸미개와 금관 ⓒ 국립경주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의 ‘마립간’ 시대

 

신라는 이웃 일본에서도 ‘금의 나라’로 불릴 만큼 금은 제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친 나라다. 특히 마립간은 황금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 지배계급의 권위를 표현했다. 이들은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 안의 왕족은 황금제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다. 방계의 왕족과 지방의 전통 족장 세력은 금동, 또는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한 것은 바로 그런 권력과 위계의 표현이었다.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5만8천여 점의 유물 가운데 전시 가능한 5만2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이번 특별전은 일단 그 전시 형태부터 흥미롭다. 전시장은 황남대총의 내부 구조를 그대로 재현했다. 관람객들은 왕의 무덤인 남분으로 들어가 왕의 목관과 부장품들을 두루 살핀 뒤, 왕비의 무덤인 북분으로 들어가 왕비의 목관과 부장품을 거쳐서 이 고분을 빠져나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목관은 출토 상태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왕비의 목관에는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국보 191호)이 1천5백 년의 시간 속에서 화려하게 깨어나 있었다. 벽장마다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토기가 겹겹이 쌓였는데 그 규모가 21세기의 관람객을 압도해 버린다.

▲ 왕의 목관 ( 남분 ) ⓒ 국립경주박물관
▲ 왕의 부곽 ( 남분 ).각종 항아리와 토기들 무더기로 쏟아졌다 .
▲ 왕의 부장품. 토기와 철기류가 전시장 벽장에 가득하다.
▲왕의 부장품 가운데 토기류 .; 주로 굽다리접시가 많다 .
▲ 왕의 부장품 가운데 유리구슬 . 이는 서역과의 교류를 증명해 주는 유물이다 .

왕릉, 왕의 권위와 ‘계세사상’의 표현

 

남분과 북분에는 왕과 왕비의 지위를 상징하는 수많은 부장품이 묻혔다. 물론 대부분 장신구는 황금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금동, 금은으로 만든 칼과 각종 마구(馬具)들, 그릇은 왕의 권위를 표현하는 물건이다. 또 칼과 창, 화살 등을 통해서는 무력을, 여러 개의 큰 독에 가득 담은 곡식과 음식, 엄청난 양의 덩이쇠는 왕가의 재력을 드러낸다.

 

구슬과 그릇 등 유리로 만들어진 공예품들은 신라 왕국이 주변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의 증거들이다. 비록 사자의 공간이긴 하지만 왕릉은 ‘저승의 궁전’이라 할 만했다. 부장품들의 수효와 양은 곧 왕의 권위와 힘을 상징한다. 전시장 벽장마다 가득 찬 부장품은 마립간과 왕국의 영광이 내세로 이어지리라는 믿음의 표현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 시대의 신라인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죽은 조상의 권위는 죽어서 이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덤에 생전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과 음식을 바친 것이다.

 

당연히 왕은 저승에서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산 자들은 죽은 왕의 권위를 위해 엄청난 재화의 손실은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 자는 이 같은 정성을 바치고 손실을 감수하는 대가로 사자의 권위를 계승했다. 결국 왕릉의 호화와 사치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서 권력을 이어받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전시장을 돌면서 관람객들은 1천5백 년 전의 왕국을, 왕의 권위를, 그 시대의 시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까. 전시된 유물과 그것이 말해주는 왕의 권력을 확인하면서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지배자의 그 호화와 사치를 극한 무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요구된 피지배계층의 희생과 봉사는 얼마쯤이었을까. 이 시기 왕릉에서 가야의 옛 무덤에서 보이는 ‘순장’이 없는 것을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신라 왕조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 지역의 패권국가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것일 터였다. 신라에서는 6세기 중반 이후 금속화폐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를 박노자는 신라의 강력한 행정력에서 찾고 있다.(거꾸로 보는 고대사, 한겨레출판, 2010) 즉, 신라는 국가도 평민들도 굳이 돈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직접적 인력 동원과 현물 수취를 중심으로 행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북분을 돌아 나오면 전시장 출구다. 관람객들은 드디어 1천5백 년의 시간에서 깨어난 98호 고분을 벗어나 다시 21세기 한복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고대의 ‘왕과 왕비의 시간’으로부터 현대인의 일상으로의 귀환이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피장자의 신원이 완전하게 밝혀진 경우는 없다. 황남대총도, 천마총도, 일련번호로 존재하는 155호분도 마찬가지다. 서라벌 곳곳의 미궁에 싸인 고대의 무덤들이 그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는 날은 언제쯤일까를 상상하며 우리는 국립경주박물관을 떠났다.

▲ 경주박물관 뒷마당에 옮겨져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2011. 1.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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