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 함께한 ‘3장(張) 1박(朴)’의 여름
밀양을 다녀왔다. 내게 밀양은 몇 해 전만 해도 ‘표충사’와 ‘영남루’ 따위의 관광지와 함께 기억되는 남녘의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그곳은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지였다.
밀양역 앞에서 만난 단발머리 여고생은 둘째 음절을 유달리 강조하는 억센 경남 사투리로 시내버스 격인 마이크로버스의 운임을 알려 주었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젊은 연인들은 상대가 민망해하지 않을 만큼의 크기로 유쾌하게 웃었고, 두고두고 그 인상적인 억양을 입에 올리며 추억을 곰씹곤 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밀양은 내게, 하고 많은 숱한 도시가 아니라, 각별한 고장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햇수로 치면 18년, 내 젊음의 한때, 서툰 욕망과 열정으로 좌충우돌하던 시절, 그 시절의 꿈과 사랑을 함께했던 친구 하나가 김해를 거쳐 밀양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20년도 전에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펴고 있었던 여제자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양은 이제 표충사나 영남루를 둔 고장으로서가 아니라, 내 친구가 칠곡, 안동과 예천, 울진과 김해를 거쳐 고단한 세월을 뉜 곳으로, 마치 아련한 첫사랑처럼 내 초임 시절의 여제자가 지어미로, 어머니로 단란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정겨운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88년에서 1989년은 ‘우리’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로 기억되는 시간이다. 거기에는 뭐랄까, 여물지 않은 순수한 열정과 욕망이 기존의 가치관과 모순적 관행과 뒤얽혀 자아내는 불협화음과 마치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 같은 것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모두가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겠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1988년은 오랜 굴종의 시간에서부터 스스로 해방을 선언한 교육운동의 원년으로 기억된다. 그해 11월 하순에 우리 지역의 교사들이 만든 매우 느슨한 형식의 교원조직은 이듬해인 89년 5월에 전국 단위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국 1천 5백 명에 이르는 ‘대량 해직’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해, 우리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타협(조직에서 떠나겠다는 각서 쓰기였다.)을 거부한 이는 넷이었는데, 당연한 절차를 거쳐 모두 해직되었다. 3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청년들이었는데, 1살 차이라거나, 사범대를 나오지 않았고, 사학 출신이라는 등의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쉬 친해졌고, 이후 4년 6개월 동안의 시간을 오롯이 나누게 되었다.
이 네 명의 사내가 내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다. 그중 셋은 한자는 달랐지만 ‘장’ 씨 성을 갖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박(朴)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3장 1박’으로 경북의 동지들에게 알려져 있다.
친했다고 했지만, 내남없이 무던한 사이였을 뿐, 서로 간에 말투는 쉽게 바꾸지 못했다. 말하자면 ‘해라’와 다름없는 ‘해요’체를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말이다. 서른아홉, 마흔 살에 각각 복직했는데, 세월이나 연륜은 때로 강파른 성격이나 강단까지도 무화해 버리는 모양이다. 몇 해가 흐르면서 우리는 아무도 제의한 적도,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아주 쌍소리까지 섞은 ‘해라’체를 쓰고 있었고, 마치 형제가 된 듯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 네 명의 사내가 모여 하룻밤을 함께 지내는데, 올해도 작년에 이어 밀양에 살고 있는 장(나머지 둘은 베풀 張자 장인데, 이 친구는 드물게 글 章자 장이다.) 덕분에 밀양에서 만났다. 지난해에 이른바 ‘풍’을 만나, 6개월간의 휴직을 해야 했던 이 친구를 배려한 까닭이다. 다행히 그의 건강은 매우 좋아 보였다.
밀양을 방문하게 된 첫해에 표충사, 이듬해에 얼음골과 호박소, 구만폭포 따위를 이미 섭렵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시원한 곳’만 찾았다. 의논 끝에 산내면 쪽의 동강에 가서 장(章)의 아내가 정성껏 장만해 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고, 곧 같은 산내면의 인골 계곡으로 들어갔다. 날씨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는데, 다행히 계곡의 한적한 소(沼)에 자리를 잡고, 네 사내는 의심 없이 벌거벗고, 물속으로 들어갔겠다.
모두 활동으로부터 한발 비켜선 탓도 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화제는 일상과 건강 주변을 넘나들었다. 조직 활동이나 방향을 놓고 핏대로 올리던 시절의 풍경에 비하면 거의 타락한 파락호에 견줄 만했을 게다. 그러나 그게 세월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저도 몰래 체머리를 흔들고 혈압이 높아지고 있거나 전립선이 시원찮은 등, 저마다 하나씩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쉰 세대’였으니 말이다.
도덕을 가르치는 친구 박(朴)은 어부다. 나는 아직 그처럼 완벽한 투망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계곡을 나와 동강 줄기에서 두어 시간 동안 천렵을 했는데, 그의 완벽한 투망의 순간을 사진기로 잡겠다고 나는 그를 내내 뒤쫓았다. 그러나 느려터진 내 똑딱이 사진기의 셔터속도는 그의 동작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가 몇 번의 투망 질로 잡은 고기를, 내를 떠나면서 우리는 놓아주었다. 야, 방생은 처음이구먼. 누군가가 말했고, 그렇지 않다고, 자주 그랬다고 어부가 받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날 밤, 산외면의 한 모텔에서 잤다. 오래된 에어컨의 성능이 형편없어서 다소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자정을 전후하여 모텔 앞의 편의점의 파라솔 아래서 맥주를 몇 잔 마셨고, 천렵하는 동안 냇가를 오르내린 게 고단했던지 나는 푹 잤다.
이튿날, 우리는 시내의 한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고, 점필재 김종직의 생가, 그리고 인근의 예림서원을 들렀다. 점필재의 생가는 크게 손을 대지 않아서 옛 정취를 잃지 않고 있었는데, 뒤란으로 돌아가는 중문 너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멀지 않은 곳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예림서원(禮林書院)이 있었다. 독서루(讀書樓)라는 좀 지나치게 크지 않나 싶은 누각 저편에 서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어떤 서원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아주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단순히 느낌으로 말해 보라면 도산서원은 답답하다. 모신 이가 퇴계여서 번창한 탓인지, 별로 크지 않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때문에 드는 느낌일 거다.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은 좀 다른 의미에서 답답하다. 정면에 길쭉하게 들어선 만대루의 크기나 호방한 전망에 비기면 정작 서원의 안뜰이 다소 좁지 않나 싶어서이다. 예림서원은 구영당(求盈堂) 건물을 나무가 막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역시 규모 때문인가.
예림서원은 잘 가꾸어진 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편안했다. 독서루에서는 한 떼의 젊은이가 공부를 하고 있었을 뿐, 사위는 적막했다. 어디선가 매미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날씨만 덥지 않았다면 좀 넉넉하게 쉬고 싶었던 곳이었다.
날씨는 어제보다 더 더웠다. 아침나절인데도 불볕이었다. 우리는 남천강 이쪽에서 강 건너 영남루를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으로 영남루의 안부를 대신 물었다. 흔히들 안동에서 영남 3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안동 영호루(映湖樓)를 꼽는다고 하니, 영천 출신의 친구는 “영천에서는 영호루 대신에 서세루(瑞世樓)”를 친다고 받는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어서 우리는 헤어졌다. 모두에 얘기한, 밀양에 살고 있는 제자가 두루 연락해 부산에서 네 명의 친구를 불렀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때쯤 우리가 쉬고 있었던 교동 사무소 앞의 쉼터에 도착한 까닭이다. 특별히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았고, 시덤덤하게 악수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겨울, 새해의 첫 주말에 아마 우리는 복직교사 모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때는 조금씩 더 건강해져서 더 편안하고 정겨운 얼굴로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2006. 8. 5. 낮달
칸 영화제에서 상을 탄 영화 덕분에 요즘 밀양이 뜨고 있는 듯하다. 어쩌다 스쳐 간 도시인데도 공연히 마음에 감겨오는 도시가 있다. 내겐 밀양이 그런 곳이다. 결혼 전에 함께 한 짧은 여행 덕분에 아내도 밀양을 잊지 못한다. 그곳 출신의 극우보수파 정치인을 생각하면 좀 끔찍하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한때는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기도 했는데 요즘은 이리 심드렁하다.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시간을 만들지 않는 속내는 역시 심드렁하기 때문이다. 밀양(密陽)을 ‘Secret Sunshine’으로 번역한 감각도 마음에 드는데…….
지난 새해엔 넷이 다 모이지 못했다. 밀양에 있는 친구가 바빴기 때문이다. 자연히 올여름도 아마 밀양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 좀 푸근하게 며칠씩 묵는 것도 좋다 싶은데 글쎄, 어떻게 될는지.
2007. 6. 17.
정작 우리는 제 자녀는 출가시키지 못한 채 두 아이의 혼례는 챙겼다. 잘 자라서 스스로 짝을 찾아 혼인하고 어머니가 된 아이들이 대견할 뿐이다. 막내는 언제쯤 짝을 찾으려나…
2019.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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