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재선충병의 습격 앞에 무너지는 숲
이런저런 일로 일주일 넘게 산을 통 찾지 못했다. 강원도를 다녀와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짓고 있는 전원주택을 지나면 바로 등산로다. 그 어귀에 들어서다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꽤 굵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빨간 띠, 노란 딱지
뒤늦게 온 태풍은 피해 갔다는데 웬 나무가 다 쓰러졌나 싶었는데, 나무 몸통에 붉은 페인트 자국이 선명하고 그 위에 노란 딱지가 붙어 있다. 노란 딱지는 ‘소나무재선충병 방제사업’을 알리는 표지였다. 언덕 위에도 몇 그루가 같은 빨간 띠와 노란 딱지를 달고 있었다.
수십 년을 묵었을 나무인데도 언덕 아래로 벋은 나뭇가지는 모두 벌겋게 말라 죽어 있었다. 아마 소나무재선충에 감염된 나무라는 표지인 듯했다. 소나무를 절멸시킬 수도 있다는 무서운 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어쩐지 몸통에 둘러놓은 빨간 띠가 마치 핏자국처럼 느껴져 섬뜩했다.
거기서부터 정상으로 오르는 산등성이에 거의 4, 5m 간격으로 빨간 페인트 띠를 두른 나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귀와는 달리 굵은 나무는 없어서 다행이다 싶기는 했다. 대체 언제 북봉산에도 소나무재선충병이 퍼졌던가.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감염된 나무 표시가 눈에 덜 띄었지만, 정상을 거쳐 반대쪽으로 하산하는 길에 이는 다시 늘어났다. 나무와 숲을 즐기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애정을 굳이 확인해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산행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국유림사업소와 시청 산림과에 물어보니 내가 목격한 붉은 띠와 노란 딱지가 소나무재선충병 감염이 의심되는 나무를 골라내는, ‘선목(選木)’ 사업의 표시였다. 이 나무들은 벌목하여 10월 말께 훈증 처리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훈증(燻蒸) 처리란 고사한 나무를 잘라서 약제 처리한 뒤 방수 천으로 덮어놓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선충이 아닌 매개곤충을 없애기 위한 방제(防除) 작업이다. 인근 산비탈 곳곳에 청색 방수 천으로 싸매놓은 정체불명의 더미가 바로 이 ‘훈증 더미’다.
소나무재선충병, 98 시군에 피해 고사목 137만 그루
소나무재선충은 크기 1mm 안팎의 실 같은 선충인데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 같은 매개충의 몸 안에 서식하다가 새순을 갉아 먹을 때 상처 부위를 통하여 나무에 침입한다. 침입한 재선충은 빠르게 증식하여 수분과 양분의 이동 통로를 막아 나무를 말라 죽게 한다. 이 병은 치료 약이 없어 감염되면 100% 고사한다고 한다.
재선충에 감염되면 6일째부터 잎이 처지고 20일째면 잎이 시들기 시작하여 30일이 지나면 잎이 급속하게 붉은색으로 변색하여 고사한다.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리는 수종은 소나무, 해송, 잣나무 등이다. 이 병이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것은 치료 약이 없어 고사하는 비율이 100%이기 때문이다.
소나무재선충병이 최초로 발생한 것은 1905년 일본에서였다. 이후 미국(1934), 중국(1982), 대만·캐나다(1985), 멕시코(1993), 포르투갈(1999), 스페인(2009) 등으로 확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생한 것은 1988년이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4월 기준으로 전국 98개 시군구에서 피해 고사목 137만 그루가 발생했다.
최초 발병 이후 2005년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으나 반복적으로 재발하여 현재 백두대간, 국립공원 등 위험지역까지 번진 상황이다. “이런 추세면 앞으로 3년 안에 소나무가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다”라는 녹색연합의 우려(2015)를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 2절 중]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天)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윤선도 <오우가> 중]
소나무는 국내 산림면적의 37%나 차지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다. 이 땅의 어느 산엘 가도 푸근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니, 애국가 2절에 나올 자격은 충분한 셈이다. 특히 해안 지방에서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곰솔[흑송(黑松)]은 지역 주민들의 삶과 마을공동체를 지켜주는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벌레가 생기고 휘거나 갈라지지도 않는 소나무는 절집을 짓는 재목으로 쓰였다. 특히 궁궐을 짓는 목재는 소나무 외에는 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강원도와 경북 울진, 봉화에서 나는 춘양목이 최고급 목재가 된 것은 결마저 곱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마을 숲과 경관을 이루는 데도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사찰과 같은 주요 문화재를 보호해 주고 그 숲 그늘에 송이버섯을 키워 시골의 주요 소득원을 선사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버릴 게 없는 나무라고 해도 좋다.
소나무는 또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사는 나무로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다. 일찍이 고산 윤선도가 다섯 벗[오우(五友)]의 하나로 솔을 꼽은 것은 이 나무가 가진 변함없는 ‘푸름’, 그 절의(節義)의 덕성 때문이다. [관련 글 : 송홧가루와 윤삼월, 그리고 소나무]
그런데 그 소나무가, 소나무가 이루는 숲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재선충을 예방하기 위해 나무주사나 항공방제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급속도로 확산하는 병충해를 잡는 게 역부족인 듯하다. 정말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지게 될까.
소나무가 사라진 한반도, 상상할 수 없다
재선충이 발생한 지 110년, 전체 산림면적의 7%에 이르렀던 소나무가 절반이 채 안 되는 3% 수준으로 급감해 ‘소나무 무덤’이 된 일본의 경우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소나무가 사라진 한반도를 상상하는 것은 여간 끔찍하지 않다.
하산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에도 빨간 띠와 노란 딱지가 붙어 있다. 소나무는 암수한그루이면서도 암수 꽃의 위치를 달리함으로써 수분(受粉)을 쉽게 하고 근친교배를 피한다. 이처럼 영특한 풍매화(風媒花)가 일찍이 겪지 못한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그리며 나는 산을 내려왔다.
2016. 10.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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