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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도토리’ 노략질 이야기

by 낮달2018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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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뒷산에서 꿀밤을 따다

▲ 학교 뒷산에서 쑥부쟁이를 찍다가 도토리를 만났다. 그걸 한 줌씩 땄다가 모으니 묵거리가 되었다.

수업 없는 시간에 뒷산 기슭에 무리지어 핀 쑥부쟁이를 찍었다. 후배가 ‘백구자쑥’이라고 한 그 쑥부쟁이다. 보랏빛 쑥부쟁이를 찍었으니 남은 건 흰빛의 구절초[백구(白九)]다. 산이 깊지 않아서일까. 뒷산에는 구절초가 눈에 띄지 않는다.

 

동료로부터 어느 골짜기에 가면 구절초가 두어 포기 피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선뜻 길을 나서지는 못한다. 그게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처에 다른 쑥부쟁이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 길도 없는 숲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쑥부쟁이를 찾다가 내가 찾은 건 숲에 소복이 떨어진 도토리였다. 꿀밤! 국어사전에서야 ‘도토리’라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게 그것은 ‘꿀밤’이다. 간밤에 분 바람 탓일까. 제법 굵직한 크기의 도토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가으내 산에는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아예 전대를 만들어 찬 중년 사내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등산로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참나무·떡갈나무 숲 모두가 표적이었다. 눈에 띄는 놈을 줍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지 이들은 꼬챙이를 갖고 다니면서 수북이 쌓인 낙엽 더미를 헤집기도 하였다.

▲ 산에서 만난 쑥부쟁이. '백구자쑥'이니 쑥부쟁이는 보랏빛 꽃이다. 잎은 쑥을 닮지 않고 가늘고 길다.

마주 앉은 후배 교사와 가끔 도토리 채취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주 사람들이 꿀밤의 씨를 말리려는가 보네.”

“그러게요. 불법이라는데 막무가내네요.”

“저거, 사실 산짐승들 먹이를 도적질하는 건데 말이야.”

“그렇지요. 노인들이 용돈 만든다고 줍는 건 그래도 나은데, 젊은 사람들조차 나서니…….”

 

글쎄, 산에서 도토리를 줍는다고 해서 모두가 이를 장에 내다 팔려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더러는 도토리묵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무료한 등산길에서 도토리를 줍는 재미를 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에 깃든 짐승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그들의 먹이를 노략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산등성이 여기저기 흩어진 도토리를 하나씩 줍는데 금방 손안이 가득 찼다. 바지 주머니에 도토리를 집어넣고 다시 땅바닥을 훑기를 여러 번, 어느새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땅바닥을 살피느라 분주히 조리개를 맞추던 눈은 쉬 피로해져서 침침해지고 잠깐 사이에 나는 거기 푹 빠져버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엎드린 등허리로 도토리가 후드득 떨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알뜰히 땅바닥을 훑었지만, 나무에 달려 있던 열매까지는 어쩌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약 한 시간가량을 정말 도토리 줍기에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함께 온 산을 누비며 탄피 따위의 쇠붙이를 주우러 다니던 때의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올랐다.

 

무언가에 순수하게 집착하는 건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아무 잡념 없이 오직 풀숲에 떨어진 밝은 갈색의 매끄러운 도토리 껍질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주변 숲에서 들려오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무슨 축복처럼 들었다.

 

한 손에는 사진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만 도토리를 줍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사진기를 인근 나뭇가지에다 걸어놓고 아예 양손으로 작업에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양의 도토리를 주운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나는 딴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머니가 가득 차서 더 이상 여지가 없어져서 나는 산에서 내려왔다. 주머니에 가득 찬 도토리가 묵직했다. 위생 봉투에 담으니 가득했다. 동료 교사들이 한마디씩 치하했다. 그러나 나는 좀 겸연쩍게 받았다.

 

“짐승들 먹이를 노략질해 왔어요.”

 

교무실에 들렀던 똑똑한 아이 하나가 당돌하게 묻는다.

 

“선생님, 그거 불법이죠?”

“그래, 정확히는 몰라도 그런 것 같구나.”

산에서 야생의 열매를 채취하는 건 위법이라고 듣긴 했지만, 관련 법령이 뭔지는 몰랐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국립공원에서의 그것은 ‘자연공원법 제 29조와 동법 시행령 제26조 규정’이란다. 물론 예의 법령에는 도토리의 ‘도’자도 안 나온다. 국립공원 안에서의 도토리 등 열매의 무단 채취는 ‘그 밖의 행위’로 묶여 ‘제한’되고 ‘금지’된다.

 

“국립공원 안에서만 해당하는 것 같은데…….”

“아마, 개인 산주의 허가 없이 채취하는 것도 법에 저촉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것까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산에서 노략질한 도토리를 아내에게 가져다주었다. 도토리묵을 쑤어 보고 싶어 했던 아내는 반색했다. 그러나 올핸 꿀밤이 흉년이라더니 도토리가 너무 잘다고, 또 벌레 먹은 놈이 많다고 아내는 불평했다. 밤에 우리 식구는 둘러앉아 도토리의 껍질을 깠다.

 

껍질 벗긴 도토리를 아내는 물에 담가 두었다. 아마 조만간 우리는 아내가 쑨 탱글탱글한 ‘꿀밤묵’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빛깔이 희끄무레한 메밀묵보다는 짙은 밤색의 도토리묵을 훨씬 좋아한다. 채로 썬 묵에 물을 붓고 양념장과 김치를 얹어서 먹는 도토리묵 별식이 만들어지면 이웃들께 지면으로나마 이를 대접(?)해 드릴까 한다.

 

 

2011. 10.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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