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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선물

by 낮달2018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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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이야기

 

아침에 미역국을 먹었다. 일요일인데도 아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더덕구이와 갈치자반이 상에 올랐다. 잠이 덜 깬 딸애가 밥상머리에 앉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고, 곧 서울에서 아들 녀석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른바 ‘귀가 빠진 날’인 것이다.

 

선물은 생략이다. 아내가 선물 사러 나가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험 준비 중인 딸애는 따로 선물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던 듯했고, 아들애는 전화로 제 어미에게 대신 선물을 준비하라 이른 모양인데, 내가 선물 얘기를 잘라버린 것이다. 나나 아내는 여전히 선물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다.

 

지난 5월(어버이날)에는 딸애가 카네이션 바구니를, 군에 있던 아들 녀석이 ‘군사우편’을 보내왔었다. 오후에는 외출에서 돌아온 딸애가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 말대로 ‘노티 나지 않는’ 티셔츠였다. 지난해 생일 때 받은 손목시계에 이은 두 번째의 실한 선물이었다.

 

그날 저녁엔 아내와 함께 셋이서 식당에서 복매운탕을 먹었다. 밥값도 아이가 냈다. 무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는데도 아이와 마음으로 나누는 시간은 행복했다. 아들 녀석은 짧게 쓴 편지에서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흔한 인사였는데도 그 울림이 꽤나 오래 가슴에 남았다.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부드러운 면 티셔츠를 입었을 때의 감각과 지난해, 두텁고 실하게 바느질된 가죽 줄의 시계를 팔목에 찼을 때의 느낌은 남달랐던 듯하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여물어 온 내 삶의 무게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는 게 바빠서 우리 식구들은 따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를 갖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중고를 거쳐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따로 부모님께 선물을 해 보지 못했다.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랬지만, 부모님에게 기대어 살면서 뻔히 거기서 나온 돈으로 무언가 모양을 낸다는 게 우스꽝스러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어머니 생일 선물’을 고민하는 넉넉한 집 아이를 마치 외계인처럼 바라보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장성해서 가정을 꾸린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첫 봉급을 받아 내의를 사다 드린 이래, 무슨 날이라고 ‘선물’의 격식을 차린 기억은 별로 없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는 선물보다 생신상을 차리는 게 우리 몫이어서 그랬고, 필요할 때마다 옷이나 이불 따위를 사 드리는 데 그쳤다, 그러고 보니 선물에 관한 생각은 아내도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경제적, 문화적 여유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다른 것은 이처럼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부모가 그러니 당연히 아이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게 된다. 어버이날 달랑 꽃 하나 달아주면 그게 끝이다. 수학여행을 가면서 무슨 선물을 원하느냐는 물어 ‘안 해도 괜찮다’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이었다.

 

그나마 선물이라고 주고받게 된 것은 몇 해 되지 않는다. 딸애가 아르바이트로 소액이나마 용돈을 벌어 쓰게 된 이후부터이다. 그간 받은 선물은 면도기, 지갑, 허리띠 등이었다. 선물을 받고 행복하다든가, 기분이 좋다는 것은 단지 받은 물건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이 전해지는 과정에 배어 있는 아이의 마음이 애틋해서이다. [관련 글 : 시계, 시간, 세월]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선물이 그러할진대, 제대로 된 일을 갖게 된 자식이 봉급을 헐어 사 오는 선물은 참 얼마나 고맙고 기특할 것인가. 선물을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다소 어지러워진다.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기억들이 되살아난 까닭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건 내가 임용된 이듬해이다. 첫해는 살림을 나며 얻은 빚을 갚는다고 쪼들리며 지냈고, 이듬해는 오른 전세를 감당하기에 버거운 시기였다. 그해 한가위를 쇠고 난 음력 8월 말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채식 외에 고기를 거의 드시지 않았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육식을 좋아하셨다. 어떤 반찬이든 아주 맛있게 잘 드시는 편이었는데도 따로 아버지께 삼겹살 한번 제대로 사 드리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건 변명이다.

 

언젠가 자형으로부터 함께 일식을 대접받고 당신께서 회를 무척 좋아하신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역시 회 한 접시 사 드리지 못했다. 그게 밟혀서인가, 횟집에 가면 나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 점은 형님도 마찬가진 듯했다.

 

선물로 받은 물건을 지니고 다니면 기분이 유쾌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있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우리가 뒷날, 아이들에게서 받을 선물의 목록도 좀 더 다양해지고 그 액면가도 나날이 높아가리라.

 

그러나 그 넉넉한 주고받기의 풍경 너머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돌아가실 즈음, 낡은 여름 양복을 걸치고 계신 아버지의 실루엣이다. 양복 한 벌도 못 해 드리고 떠나보낸 당신, 옹색한 살림살이와 고단한 삶으로 얼룩진 남루한 과거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풍경 앞에서 나는 새삼스레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하다.

 

 

2007. 10.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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