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밭의 고추를 뽑고 배추와 무를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감나무 꼭대기까지 타고 오른 호박 이야기로 헛헛한 기분을 달랬었다. [관련 글 : 따, 말아? 감나무 꼭대기의 호박] 일주일쯤 뒤에는 새 밭의 고추도 뽑았다.
탄저를 피한 푸른 고추 몇 줌을 건지는 걸로 우리 고추 농사는 마무리되었다. 틈틈이 따낸 고추는 아내가 노심초사 끝에 햇볕과 건조기로 말려서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기 여러 번, 얼추 열 근에 가까운 양이 되었다. 고춧가루의 고운 빛깔에 아내는 무척 흡족해했고 진딧물과 탄저에도 그쯤이라도 건진 걸 나 역시 대견하게 여겼다.
추석을 쇠고 차일피일하다 보니 열흘이 훌쩍 지났다. 명절 끝에 고구마를 캐자고 했는데 그게 자꾸 미루어진 것이었다. 고구마를 캐고, 못 가본 새에 훌쩍 자랐을 배추와 무도 살펴보고, 새 밭의 대봉감을 따기로 하고 오늘 아침에 텃밭을 찾았다.
그새 배추는 풍성하게 자랐다. 처음부터 꾀기 시작한 배추벌레에 뜯기어 맨 바깥의 잎이 너덜너덜해진 것을 제외하면. 나는 어저께 들른 의성 친구의 밭도 꼭 이랬다고 낙심하는 아내를 달랬다. 그렇다. 이왕 나누어 먹는 것, 성한 쪽이라도 우리 몫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여길 일이다.
기대하지 않던 수확이 더 기쁜 법이다
아내가 촘촘하게 심었던 무를 얼마간 솎아주는 동안 나는 바로 새 밭에 가서 거기까지 얼기설기 얽힌 호박 덩굴과 고구마 덩굴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호박 덩굴을 걷어내자 여러 개의 감춰져 있었던 호박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따낸 호박이 대여섯 개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은 더 기쁜 법, 우리는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대봉 감나무 아래서 익어가고 있던 늙은 호박도 땄다. 그렇게 딴 호박을 뜰에다 얹어 놓으니 한 아름이다. 아주 작은 애호박에서 중간 크기에 늙은 호박 후보까지. 어쨌거나 이 수확 앞에서 얼치기 농부들은 잔뜩 고무되었다.
호박과 고구마 덩굴을 걷어내고 우리는 고구마를 캤다. 섣불리 호미를 놀리다가는 고구마 몸에 상처를 내기 쉬워서 가장자리부터 파서 조심스럽게 다루었지만 그걸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뿌리채소는 그 수확물을 캐내는 과정이 각별한 감흥을 준다. 호미질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고구마를 확인하는 게 무척 생광스럽다는 얘기다.
고구마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수확하지 못했다. 아마 모종을 심었지만 여러 포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고사한 탓일 것이다. 거름을 충분히 준 것도 고구마가 적당한 크기로 자라지 않고, 지나치게 굵어진 이유일 테지만. 어쨌든 두 이랑에 못 미치게 심은 고구마를, 그쯤이라도 수확한 것만으로 족할 일이었다.
고구마를 캔 다음에는 밭 가장자리의 감나무에서 대봉감을 땄다. 인터넷에서 산 감 따는 기구를 이용해서 수월하게 일을 끝냈다. 감나무가 어려서 높이도 그만했고 달린 감도 그리 많지 않아서다. 감 따기에는 다소 이르지만 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대로 두면 홍시가 되어 버릴 듯했기 때문이다.
까치밥을 잊은 것처럼 ‘가신 분’도 잊고 있다
담벼락에 붙은 오래 묵은 감나무의 감은 지난번에 와서 땄다. 홍시가 떨어져 길을 더럽힌다면서 이웃에서 베어내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해와 서둘러 따 버렸다. 누군가 살면서 그걸 돌보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을 다 따고 나서야 나는 까치밥을 하나 남겨두는 걸 깜빡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오직 감 따는 일에만 정신을 팔아서 ‘까치밥’을 염두에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을 딴 건 처음이 아니다. 3년 전, 장모님께서 살아계실 때였다.[관련 글 : 감 따기와 ‘곶감’ 만들기]
나는 까치밥 몇 개를 남기고 감을 땄고, 장모님께선 감 따는 기구를 신기해하셨다. 그리고 딴 감은 깎아서 창고 앞 처마 밑에다 주렁주렁 걸었었다. 그러나 그걸 보고 흐뭇해하시던 장모님은 이미 계시지 않는다. 이듬해 가을, 장모님을 먼 길을 떠나셨고 우리는 이제 그 사실도 잊어가고 있다.[관련 글 : 배웅, 다시 한 세대의 순환 앞에서]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아내는 문중에서 꾸린 묘역에 빗돌 하나로 모신 어머니 산소 이야기를 했다. 아직 돌아가신 날짜를 새기지 않은 그 빗돌을 떠올린 것이다. 언제쯤 아내와 함께 그 묘역을 찾아볼까 잠깐 나는 날짜를 헤아려보았었다.
까치밥 따위를 까맣게 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그리 무심해져 버렸나. 그게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고 있는 인지 능력에 저도 몰래 적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끝내니 정오를 넘겼다. 고구마와 호박, 가지 몇 개, 그리고 감을 비닐봉지와 가지고 간 함지에다 담아서 여러 차례 옮겨 차에 실었다. 그만그만한 수확물에 불과하지만 마치 우리는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감을 깎아서 말리려 한다. 지난번에 딴 감은 깎아서 지금 베란다에서 마르고 있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한 사나흘쯤 선풍기를 틀어서 말렸는데 그게 성공한 것인지 어떤지, 지금 감은 바야흐로 거죽이 꾸덩꾸덩 굳어가고 있다.
나는 성공이라고 여겼지만, 아직 쾌재를 부르기엔 이를지 모른다. 이르게 깎은 곶감은 안에서 발효하면서 시어지는 듯하다. 어저께 한 개, 오늘도 한 개가 걸이에서 떨어졌는데, 꼭지 떨어진 데서 물이 배어 나오는데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직 얼마간은 더 지켜봐야 할 이유다.
나는 아내에게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깎는 걸 좀 미루자고 했더니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했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깎아서 다시 베란다에 내거는 수밖에 없다. 선풍기로 습기를 차단해 주면 때도 10월 말, 곶감은 제대로 마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패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17. 10.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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