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안상학 사화집 <시의 꽃말을 읽다>
안동의 안상학 시인이 책을 냈다. 지난 9월 중순께 지역에서 출판기념 북 콘서트를 연다는 시인의 전갈을 받았지만 나는 다른 일 때문에 거기 참석하지 못했다.
북 콘서트는 책에 시가 실린 시인 몇이 손수 자기 시를 낭독하고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등의 행사였는데 보지 않아도 지역의 지인들로 성황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한가위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서 시인이 서명한 책을 등기로 받았다. 마땅히 먼저 사서 읽고 뒤에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편하게 앉은자리에서 증정본을 받게 된 것이다.
시인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 <그대 무사한가>(1991)를 냈다. 그리고 10년 후부터는 <안동소주>(2002), 오래된 엽서(2003), <아배 생각>(2008)을 차례로 냈고, 지난해에는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를 상재했다. [관련 글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아배 생각> ]
시집 5권을 낸 ‘전업시인’ 안상학
이 땅에서 전업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몇 해 간격으로라도 시집을 내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안상학은 어렵사리 시를 쓰고 드문드문 시집을 낸다. 그것이 시의 평가 이전에 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오롯이 지켜가고 있는 그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 이유다.
이번 책은 자신의 시가 아니라, 시인이 골라 뽑은 주옥같은 50편의 시와 여기에 해설을 덧붙인 시선집이다. 그는 2013년에 대구 <매일신문> 문화면에 ‘안상학의 시와 함께’라는 꼭지를 연재했다. 매주 두 편의 시를 골라 해설을 붙이는 형식의 글이었다. 거기 실은 글 가운데 작고 시인과 외국 시편 등을 제외하고 골라 뽑은 게 이번 책이다.
출판사의 소개대로 이 책은 안상학 시인이 엮은 첫 번째 사화집(詞華集)이다. 시인은 독자로서 다른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었을까. 책 끝에 실린 시인의 후기는 그의 소략한 시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실마리를 드러낼지도 모르겠다.
첫 사화집 <시의 꽃말을 읽다>
그는 “죽은 듯한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봄, 자라는 여름, 거두어들이는 가을, 살아 있는 것들이 다시 죽은 듯이 숨어드는 겨울을 시인들은 어떻게 시에 녹여내는지를,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어떻게 삶의 닮은꼴을 찾아 시로 노래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시를 오랫동안 읽어왔지만, 연재 기간만큼 집중해서 읽은 적은 없다. 이 기간에 새삼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시가 태어나는 지점. 시인들은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을, 왜 쓰는지에 대한 내 막연한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는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던가. 그렇다. 시는 인생의 사계절 중 겨울에 태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는 겨울의 언어였던 것이다. 겨울 중에서도 매서운 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치거나 어둠이 내리면 시는 더욱 빛나는 존재로 태어난다. [……]
시는 겨울을 건너가는 방식에 대한 깨달음이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처했을 때 자가 격리와 자발적 소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그러안는다.
겨울 세상에 널린 뭇 생명들만큼이나 많은 동류의 외로움과 고통에 동참하여 동고동락한다. 무연자비(無緣慈悲),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연 아닌, 인연 없는 것들과 슬픈 사랑을 나눈다. 그리하여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과 다독이는 손짓의 언어들을 원고지에 옮겨 심는다. [……]
- 후기 ‘시는 살아간다’ 중에서
이런 형식의 시선집이 그러하듯 이 책은 우리가 기왕에 기대하는 것 같은 방식의 해설은 아니다. 그건 전적으로 시인이 시를 읽는 방식이 독자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일 터이다.
독자들은 대체로 시에 촘촘히 들어선 은유의 숲, 때론 현란하고 때론 담백한 비유의 거미줄에 걸려서 허우적댄다. 그래서 그 거미줄을 단칼에 잘라 버리는 해설을 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동업자’의 눈으로 그걸 바라본다. 시를 친절하게 해설하는 게 아니라 그는 시편마다 고유한 개성과 그 표현의 속내를 눈여겨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당연히 거기엔 시적 언어에 대한 시인 특유의 애정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자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갈증을 해소하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독자와 시인 독자가 나누는 ‘공감’
그러나 독자는 그의 해설을 통해 자신과 시인이 각각 바라본 시의 어떤 부분의 이해가 일치하거나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이해가 시인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한 편의 시를 두고 독자와 독자로서의 시인이 나누는 공감의 지점이 될 것이다.
안상학이 고른 50편의 시 가운데에는 낯선 시인이 적지 않다. 여전히 내 시 읽기는 여느 독자의 그것을 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나는 여러 번 책을 펴들었다가 덮곤 했다. 가을 탓일까, 어지러운 심사 탓일까. 눈은 시의 행간을 읽고 있는데도 그것들은 눈앞에 떠오르다가 스러져 버리곤 하여 쉽사리 내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서안나 시인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낯선 이름인데, 시의 배경인 병산서원이 낯익어서일까. 나는 그녀의 시와 안 시인의 해설 사이를 오가며 머리를 주억거리곤 했다. 역시 내 이해의 어떤 부분이 그와 겹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다음이 서안나의 시와 안상학의 해설이다. 눈 맑고 밝은 이들은 두 시인의 사유와 정서의 경로를 따라가며 공감과 이해에 다다를 수도 있으리라.
가을이 깊어가고 시간은 넘치게 많다. 두고두고 그가 전해주는, 시인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어떻게 시에 녹여내는지를,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어떻게 삶의 닮은꼴을 찾아 시로 노래하는지를’ 차근차근 알아볼 일이다.
2015. 10.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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