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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밥 못 먹여 주는’ 시와 함께 살아온 시인의 20년 세월

by 낮달2018 2021.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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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상학 시집 <아배 생각>

▲ <아배 생각>(2008,&nbsp; 애지 )

지역에 사는 안상학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을 냈다. 따로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았던가, 나는 그의 시집을 지역포털업체인 <안동넷(http://www.andong.net/)>을 통해서 받았다. 일전에는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도 서평이 실렸다. 서평에서 다루었던 시들을 새로 읽으면서 처음으로 나는 안상학 시인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관련 기사 : 능청스런 은유로 떠올리는 그리운 이름 아배]

 

기억이란 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나는 늘 그를 처음 만난 때를 1984년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988년에 세상을 떠난 내 친구를 통해 안동의 어느 다방에서 그를 만났다고 기억하는데, 그때 그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직후였다. 그러나 그가 신춘에 뽑힌 것은 1988년이니 내 기억은 착오다. 아마 당선 통보를 미리 받았던 1987년 연말이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안동에 와서 살게 되면서 가끔 술자리나 집회에서 그를 만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지인으로서 안부만 나누는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를 가끔 읽을 수 있었고,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엽서>의 출간기념회에도 참석했다.

 

▲ 오래된 엽서(2003, 천년의시작)

국문학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에 대한 이해가 얕고 아득하다.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참고서 수준으로 웅얼거리는 형편이니 좀 쉽게 쓴 시는 그나마 더듬겠는데, 어떤 시들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아예 주변의 시인들이 시집을 내면 소박한 비평이나마 거들어야 하지만 그저 수고했다고 축하하는 걸로 예를 차리고 만다.

 

그런데 굳이 그의 시집 출간 소식을 글로 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매우 열심히 사는 시인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고 그의 삶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여느 시인처럼 ‘부업’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쓰는 일은 그에게 ‘본업’이다. 모르긴 몰라도 스물여섯 살 적에 신춘으로 등단한 이래, 무려 이십 년째 그는 다른 붙박이 직업을 갖지 않고 시를 쓰면서 살아온 거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삶이 참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는 작가회의 등의 문인단체 일을 보거나 얼마 전 1주기를 지낸 권정생 선생을 기리는 권정생 어린이 재단 설립 준비위원회 사무처장 일을 보는 게 고작인 것이다.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같은 방법으로 이 시집을 받은 친구가 있다. 그가 문자를 보내왔다. 잘 아십니까? 시집이 증정본으로 왔는데……. 잘 알지.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안동은 좁다. 어리대다 보면 사돈의 팔촌까지 다 알게 되는 동네다. 아마 촛불집회에 가면 만날 수 있을걸?

 

그러나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안상학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자신의 시집의 독서 후기를 써야겠다더니 어느새 블로그에 그게 올라와 있다.(http://blog.daum.net/cordblood/13107111)

▲ 안상학 (1962~   )

시 공부는커녕, 문학과도 무관한 의학을 전공한 친구인데도 눈매가 쓸 만하다. 독서 후기를 써야겠다는 얘기부터 어랍쇼 하고 생각했는데……. 나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대여섯 살쯤 더 먹은 이로서, 안상학의 외로운 시 쓰기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아배’는 물론 ‘아버지’다. 안상학이 어릴 적에 ‘아배’라 부르며 컸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을 노래한 시들은 정겹다. 나머지 시편들도 모두 그만그만한 온기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 없는 시와는 다르니 수월하게 한 권을 훑어볼 수 있었다.

“작반(作伴)”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눈길을 끈다. 우리말로 바꾸면 ‘길 가는데 동무 삼음’, 쉽게 풀어 짝짓기’쯤 되려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그것을 별과 달과 산이 무리 지어 연출하는 ‘작반’으로 넌지시 부르면서 남은 삶도 그처럼 유장하게 치를 수 있을지를 노래하고 있는 시다.

 

때에 따라서는 거짓 무념 흉내라고 시비가 일 수도 있지만, 그의 나이쯤이라면 그 정도는 용서할 만하다. 마지막 행에서 ‘생각하는 날이 잦다’면서 은근히 정색하고 시치미를 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주변에 시를 쓰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도 안상학을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떠올리는 까닭은 그렇다. 다른 밥 버는 직업도 없이, 밥을 먹여 주지 못하는 시를 끼고 살아온 한 시인의 20년 세월의 무게가 만만찮은 탓이다. 문득 시를, 혹은 그것을 잣는 마음을 기리는 일도 동시대의 이웃으로서 내가 맡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다.

 

 

2008. 6.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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