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7 텃밭 일기 4] 탄저가 와도 ‘익을 것은 익는다’

by 낮달2018 2021. 8. 29.
728x90
SMALL

▲ 싱싱했던 고추(위)가 아래 사진처럼 바뀌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지난 일기에서 밝혔듯 장마 전에 찾아온 불청객, 탄저(炭疽)를 막아보겠다고 우리 내외는 꽤 가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어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아내의 성화에 식초 희석액을 여러 차례 뿌렸다. 내가 좀 뜨악해하는 눈치를 보이자 아내가 직접 분무기를 메고 약을 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관련 글 : 진딧물 가고 탄저 오다]

 

아내가 일이 있어 두 번쯤은 나 혼자서 텃밭을 다녀왔다. 지지난 주에 시간 반쯤 걸려 익은 고추를 따는데 탄저로 흉하게 말라 죽고 있는 고추를 보면서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두 주쯤 먼저 가꾼 묵은 밭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여서 다음번에 들를 때는 밭을 갈아엎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탄저는 ‘자낭균류에 의해 일어나는 식물의 병’(<다음 한국어사전>)이다. ‘탄저균’에 의해 발생하는 소나 양 따위 가축의 전염병도 탄저병으로 부른다. 원래 비가 자주 오는 8~9월께 많이 발생하는 병인데, 텃밭 농사를 짓는 이웃들에게 들으니 올해는 유난히 탄저병이 심하다고 한다.

 

▲  탄저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고추들 .  이 병충해의 결과는 보기보다 훨씬 참혹하다 .

어제 아내와 같이 텃밭에 들렀다. 탄저는 꼼짝없이 묵은 밭을 잠식해 버린 것 같았다. 건질 만한 성한 열매가 있나 돌아봤지만 거의 전멸 상태다. 아내가 식초 희석액이라도 제대로 쳤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느니 어쩌니 하며 구시렁대었다.

 

요컨대 내가 탄저 방제에 제대로 신경을 안 썼다는 얘기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병충해 잡는데 매달리지 않기로 작정하다 보니 그런 건 사실이다. 망가진 고추밭을 보니 그게 새삼 밟히는 모양이라, 나는 앞으로 약은 당신이 알아서 치라고 되받아 버렸다.

 

결국 ‘묵은 밭’은 갈아엎었다

 

아내가 새 밭의 고추를 따는 동안 나는 묵은 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지지대를 뽑은 뒤 가지를 고정해 두었던 비닐 끈을 걷어낸 다음, 고춧대 윗동을 쥐고 힘을 주니 고추는 뿌리째 뽑혔다. 뽑아낸 고춧대는 담 밑에다 차곡차곡 쌓았다.

 

상기도 달린 붉은 고추는 얼룩덜룩했고, 익지 않은 푸른 고추도 온전한 게 거의 없었다. 탄저는 시나브로 작물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랑을 덮었던 멀칭 용 검은 비닐도 걷어내면서 보니 새 밭에서 아내가 어느 틈에 분무기를 메고 식초 희석액을 뿌리고 있었다. 답답한 사람이 샘을 파기 마련인 것이다.

 

▲ 묵은 텃밭(위)과 어저께 갈아엎은 텃밭(아래). 밭은 임자에게 줄 거 다 주고 원래로 돌아갔다 .

여기저기 돋아난 잡초를 뽑고 나니 밭은 감쪽같이 지난 4월 모종을 심기 이전으로 돌아갔다. 가녘에 남긴 가지는 여전히 길쭉한 열매를 매달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래도 가지가 효자 노릇을 했네, 했더니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 올여름에 가지는 한 번도 안 사 먹었네.

 

이웃집에서 담에 바투 붙어 서 있는 매실나무 가지가 뻗어서 불편하다고 하니, 아내가 베어내자고 했다. 그나마 얼마간의 매실을 수확한 나문데 했더니, 아내는 밭에 그늘이나 지우고 매실도 시원찮다며 그리 결정하였다.

 

밭은 줄 거 다 주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자동차 트렁크에 있는 휴대용 톱을 가져와 나무를 베었다. 아내가 그 옆의 참죽나무와 지난봄에 죽은 대추나무도 베어달라고 했다. 굵은 나무는 아니었지만, 꽤 힘이 들었다. 나란히 서 있던 나무 세 그루를 베어내자 밭의 풍경이 달라졌다. 나무를 베어내도 담으로 막힌 거야 다르지 않지만, 시야가 틔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쪽파의 구근. 일반에서는 이를 ‘종구’라고 하는데 이는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잠깐 방에 들어가 가져간 커피 한잔을 우려먹는 동안, 아내는 잡초를 뽑고 밭을 골라 놓았다. 그리고 얕게 고랑을 타더니 어제 시장 씨앗 가게에서 사 온 쪽파 구근(이걸 ‘종구’라고 하는데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을 하나씩 심기 시작했다. 괭이로 고랑을 타주고 거들어 이내 작업을 끝냈다.

 

밭 하나를 갈아엎고도 우리는 꽤 쏠쏠하게 수확물을 거두었다. 탄저를 이기고 제대로 빨갛게 익은 큼지막한 고추가 대견했고 박 한 덩이, 애호박 한 개, 큼지막한 가지 몇 개, 쪄서 쌈으로 먹겠다면서 뜯은 호박잎 등속이 든든했다. 어쨌거나 밭에 뿌리 내렸던 작물은 저마다 살아 있었던 자취를 남기고 가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든 의문 하나는 심고 따로 물을 주지 않고 온 쪽파가 제대로 싹을 틔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밤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믿어보기로 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아내가 다시 고추를 말리는 일로 노심초사하겠다.

 

▲ 어저께 수확물. 작은 박 한 덩이에 애호박, 가지, 호박잎,  익은 고추. 돌아오는 마음은 늘 부자다.
▲ 아내는 집에 오자마자 자리를 깔고 고추 초벌 말리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밭에 들를 때마다 따낸 고추는 말려서 빻았는데 얼추 10근에 가깝다. 늦장마와 겹치면서 햇볕에 말리지 못하고 결국 제습기를 돌려서 초벌 말리고 그다음은 식품 건조기에 넣었다. 그렇게 말린 고추를 동네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니 그 고운 빛깔에 우리 내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지막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아내는 벌써 텃밭에 갈 날짜를 받아보고 있다. 한가위가 10월 초니 이제 우리 텃밭 농사도 걷을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2017. 8. 29. 낮달

반응형
LIST

댓글